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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충절 김문기의 넋을 추모하는 세한재

천부인권 2013. 2. 4. 12:26

 

 

 

세한재(歲寒齊)는 2004년(甲申年) 창원시 의창구 동정길35번길 4-13(동정동 386-3번지)에 국가의 사림공정(士林工程)으로 건설된 김녕(金寧)김씨의 제실이다. 세상 사람들이 조선조(朝鮮朝)의 충절(忠節)을 칠 때 이곳 세한재(歲寒齊)에 배향된 충의공 백촌선생 휘 문기(忠毅公 白村先生 諱 文起)를 맨 먼저 꼽을 정도로 추앙 하고 있다.
경상대학교 허권수(許捲洙) 교수가 지은 세한재기(歲寒齊記)에 의하면 “선생은 하늘이 낸 효자로서 일찍이 문과에 올라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집현전 학사(集賢殿 學士), 승정원 도승지(承政院 都承旨), 함길도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등의 직책을 두루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 겸(兼)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에 이르렀다.”고 한다.
 

 

 

 

1456년(세조 2)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등이 단종(端宗)의 복위를 꾀하다가 김질(金礩)의 밀고로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되었지만 숙종 7년(1681)에 이들의 충성심과 장렬한 의기를 추모하기 위해 사육신(死六臣)으로 칭하고 서원을 세웠으며, 정조 6년(1782)에는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우는 비)를 세웠다.
백촌선생 역시 이들 사육신(死六臣)과 함께 단종복위를 계획한 뒤 병력동원을 맡았지만 아들 현석(玄錫)과 함께 처형당했다. 1791년(정조 15)에 정조가 규장각과 홍문관에 명하여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정(編定)할 때 민신, 조극관과 함께 삼중신(三重臣)으로 선정하였다.
이처럼 백촌선생이 화(禍)를 당하자 자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시문(詩文)도 흔적 없이 사라졌으며 그의 산소마저도 소재를 알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난리 통에도 선생의 다섯째 아들 통덕랑(通德郞) 휘(諱) 정석(正錫)의 후손 휘 도소(道紹)가 상주(尙州)에서 영동(永)同으로 옮겼다가 다시 창원부의 무동(茂洞)으로 옮겨 일시 거하다 이곳 관동(冠洞:갓골)으로 자리 잡은 것이 지금으로부터 430여년 정도 되니 조상의 산소도 무동과 관동 등지에 있다.

 

 

 


이후 여러 후손들이 정성을 모으고 힘을 합해서 집을 한 채지어 세한정(歲寒亭)이라 편액(扁額)을 걸었다가 2004년에 국가의 사림공정(士林工程)으로 인하여 집을 다시 확장개축하게 되었다. 이에 세한정이라는 이름을 세한재(歲寒齋)로 고쳤다. 대개 향사를 거행하기에는 정(亭)이라는 이름보다는 재(齋)라는 이름이 더 적합하고, 또 재자(齋字)에는 엄숙하고 경건한 뜻이 더 많기 때문이었다.
세한재에는 백촌선생 제단비를 오른쪽에 옮겨 세우고, 마루 뒷벽에는 감실(龕室)을 만들어 선조들의 신주를 모시고 매년 음력 2월 중정일에 제사를 지낸다.
세한재(歲寒齊)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선생이 지은 “한 해가 추워져 눈보라 치는 속에서도 머물러 있을만 하다.” 라는 시와 논어에 나오는 “한 해가 추워진 뒤에라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까지 푸르름을 안다.”라는 구절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

 

세한재(歲寒齊)는 천주산(天柱山) 맥 한 줄기가 남쪽으로 달려와 기가 뭉친 용지봉(龍池峯)이 재실의 뒤에 우뚝이 솟아 있고, 앞은 남산에 마주하여 있으니, 땅의 형세가 암은(安檼)하여 글을 읽고 예(禮)를 익히기에 좋은 곳이라 한다.

 

박정희대통령 때 김재규가 중앙정보부장으로 있을 때 선생이 사육신이라고 주장했고, 이에 1977년 7월 국사편찬위원회는 사육신 문제를 논의한 끝에 유응부(兪應孚)를 없애고 김문기(金文起)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顯彰)하여 그의 가묘를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설치했다. 그러나 종래의 사육신 구성은 변경하지 않았다.
이 사육신 문제는 지금까지도 정리가 되지 않은 채 여러 가지 문제들을 만들고 있어 국가적 차원에서 더 이상 이들의 숭고한 뜻이 훼손되지 않도록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어 보인다.
[출처 : 세한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