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회암영당-주자정동강당

천부인권 2013. 3. 26. 07:17

 

 

 

<회암영당, 주자정동의 모습>


 

회암영당(晦菴影堂)을 찾아 지난 2월에 진해를 찾았으나 주민들은 회암영당이라는 이름을 몰라 찾는데 실패를 하고 이번에 다시 찾아보았다. 예전에 보았던 천자봉공원묘지 입구 쪽에 걸려 있던 주자정동(朱子井洞) 안내판이 회암영당과 같은 이름이라는 것을 알고 인터넷으로 대략의 위치를 파악하고 출발하였으나 웅천 입구에 도착하여 주민에게 물으니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몇 사람에게 물었더니 천자봉가든을 하고 있는 분에게 물어보라고 하여 때마침 마당을 수리하고 있는 주인에게 물으니 주자정동은 대풍아파트 뒷길로 가면 보인다고 하였다.

 

 

 

<웅천 입구 사거리 풍경 이곳에서 좌회전하여 대풍아파트 뒷길로 간다.>


진해대로를 따라 웅천으로 가다가 천자봉공원묘지 입구 방향으로 빠지면 웅천로를 타고 웅천으로 가게 된다. 이 웅천로는 웅천으로 가는 옛 길이다. 웅천동 입구로 접어들면 우측에 소류지가 있고 소류지가 끝나는 지점에서 약300m를 가면 웅천에서 만나는 첫 번째 작은 사거리가 나온다. 좌측은 천자봉가든이고 우측은 주유소가 있다. 이 사거리에서 좌회전을 하여 대풍아파트 뒷길인 산자락을 따라가면 도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회암영당을 만나게 된다.

 

 

 

 

 

회암영당(晦菴影堂), 주자정동(朱子井洞), 주자영당(朱子影堂), 주자정동강당(朱子井洞講堂)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진해구 웅천1동 북부동 440번지(웅천북로39번길 12-3) 관정마을에 위치한 주자정동강당은 휘국공 회암 주희(徽國公 晦菴 朱熹)선생의 영정을 봉안(奉安)하여 모시고 매년 음력 3월 15일과 9월 15일에 향례(享禮)를 올리고 있는 곳이다.


 

 

 


경남교원지에는 「조선 숙종 계해(朝鮮 肅宗 癸亥 1683) 주부자 후예(朱夫子 後裔) 등이 존모지성(尊慕之誠)을 실현(實現)코저 상조(祥兆), 응신(應新), 상진(祥璡) 등이 경사 정승지 태호공 댁(京師 鄭承旨 泰好公 宅)을 방문하여 기가(其家)에 봉안되어 있는 주자 진상(朱子 眞像)을 모사 봉영(奉迎)하여 와서 영당을 세워 향화(香火)를 받든지 30년 후부터 사림이 거향적(擧鄕的)으로 채례봉행(采禮奉行)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외삼문 문루 위에 있는 황.청룡이 서로 언킨채 바라보고 있는 조각품이 이채롭다.>


이곳에 봉안한 주자영정은 숙종 12년(1683년)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판서 홍수헌이 봉행하여 귀국한 뒤 홍씨 종실에 봉안 하였으나 그 후 손자사위인 정태호의 서루에 봉안한 것을 모사하여 가져와 철종 14년(1863년) 양사재에 별저를 신설하여 임시로 향사를 거행했다.
강당에서는 강회를 열어 후진을 양성하는 지방교육 발전에 이바지한 현존하는 조선시대 교육시설로는 유일한 곳이다. 그러나 현대식 교육이 시작되면서 폐지되었고 지금은 강회를 여는 강당의 기능은 사라지고 영정을 모시는 기능이 크므로 "회암영당"으로 부른다.

 

 

 


 

고종 광무2(13-1898) 봄 웅천현감 김구현(金龜鉉)의 의연(義捐)에 의해 영당(影堂)을 건립하여 보수해 왔으나, 붕괴될 지경에 이르러 1996년 진해구에서 사업비 204,500천원을 들여 기존의 건물을 모두 헐어내고 새롭게 영정각과 강당을 신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朱子影堂記(주자영당기)
孟子歿千五百年 朱子溯洙泗之統 承河洛之傳 以牖天下萬世 後 朱子四十三年 而晦軒安先生昌朱子之學於海東以來 學者宗師朱子 讀遺書奉眞像 建祠院俎豆之 以致尊慕之誠焉 若熊川之井洞 影堂其一也 士林本孫春秋行舍采禮者三百十有七年於斯 屢經滄桑 吾道益孤 不禁滿庭春草之感矣 庚戌秋洪斯文祐至甫 被選講長 年迫八旬 鞠躬盡瘁 訪昌原倅 得郡費買土 新設入門路 以便車馬之回旋 又交涉鎭海市長得市費 爲年次事業 而修補建物 以新材易朽爛 加彩丹靑 築垣墻 治庭園 栽花木 於是重地之體貌淸肅 其苦心熱誠 人所難能 而未嘗自居其功 寔鄕林之所共稱誦者也 戊午春不意遭廟變 杳無還奉之道 講究移摹他所眞影 而以本堂財政不能濟事 乃率先喜捨特志家 從而捐義 薦遣儒林金允甲本孫炅出 遍訪國內而上京 問議於朱氏宗親會 則曰 高宗庚寅後孫翰林學士道煥奉使中華 摹紫陽書院影幀 而來今奉安於綾州廟 兩代表認 其爲眞本 遂囑寫本 近四朔往復喫辛耐苦 聞者莫不致謝 今年八月二十八日奉安于影堂 實玆鄕盛事也 囑余識其顚趾略綴如右 以資後攷
檀紀四千三百十二年己未中秋  
竹溪 安龍鎬 謹記  講長 洪祐至 鄕有司 李成植 

주자영당기(朱子影堂記)
맹자(孟子)가 돌아가신지 1500년에 주자가 공자와 맹자의 학문 洙泗는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에 있는 洙水와 泗水로 곧 공자와 맹자를 뜻하는 것이고, 洛閩은 宋나라 때의 학자 程顥 · 程頤 형제가 살던 洛陽과 朱熹가 살던 閩中을 말한 것.
을 거슬러 올라가서 정이천과 정호의 전통을 천하 만대에 전하였다. 그 뒤 주자 43년에 회헌(晦軒) 안향(安珦)선생이 주자의 학문을 우리나라에 퍼트린 이래로 배우는 자들이 주자를 최고의 스승으로 삼고 그 남긴 책을 읽으며 그 진영(眞影)을 봉안하여 사당을 짓고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존중하고 사모하는 정성을 다하였다. 웅천(熊川)의 정동(井洞)에 있는 영당(影堂)이 그 중 하나이다. 사림(士林)과 본손(本孫)들이 봄가을에 이곳에서 석채례(釋菜禮)를 드린 것이 317년이나 되었다. 그러나 그 후로 상전벽해가 여러 번 일어나 유학이 갈수록 외로워져 봄이면 뜰에 잡초만 가득하고 찾아오는 이 없는 것에 대한 회한을 금할 수 없었다. 경술(庚戌)년 가을 선비 홍우지(洪祐至) 씨가 장장(講長)으로 선출되었는데 나이 80이었다. 그럼에도 몸을 숙여 고역을 다하면서도 창원군수를 찾아가 군비(郡費)를 얻어 땅을 사고 새롭게 문으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 거마(車馬)가 잘 돌아 나가는데 편안하게 하였다. 또 진해시장과 교섭하여 시비(市費)를 얻어 연차사업으로 건물을 보수하는데 낡고 무너진 자재를 새것으로 바꾸고 단청을 다시 칠하고 담장을 고치고 정원을 다듬어 꽃과 나무를 심으니 이에 이 땅의 모습이 맑고 엄숙하게 되었다. 그 고심과 열성은 사람들이 능히 하기 어려운 일인데도 그공을 자기의 것으로 여기지 않으니 이에 고을 유림들이 모두 칭송하였다. 무오(戊午)년 봄에 묘당에 불의의 변고를 만나 다시 봉안할 방도가 없을 듯하였으나 다른 곳의 진영(眞影)을 그대로 모사할 것을 강구하였으나  본당의 재정으로는 그 일을 해내기가 불가능하였다. 이에 재물을 내놓을 독지가를 찾아다니며 그 의로운 뜻을 기부받았다. 이에 유림에서 김윤갑(金允甲)과 본손(本孫) 주경출(朱炅出)을 천거해 보내어 국내 여러 곳을 두루 방문하고 상경하여 주씨 종친회에 의논하였다. 그런즉 말하기를 고종(高宗) 경인(庚寅)년에 후손(後孫) 한림학사(翰林學士) 도환(道煥)이 중국으로 사신을 가서 자양서원(紫陽書院)의 영정(影幀)을 모사(摹寫)하여 와 지금 능주(綾州)의 묘당(廟堂)에 봉안하고 있다는데 양대(兩代)가 인정하는 표가 있으니 진본(眞本)이라고 하였다. 드디어 진본을 모사할 것을 부탁하고 거의 4달을 왕복하며 온갖 괴로움과 어려움을 다 감내하였다. 듣는 사람들이 치사(致謝)하지 않음이 없었다. 금년 8월 28일에 영당에 영정을 봉안하니 이것은 실로 이 고을의 성대한 일이다. 나에게 그 일의 전말을 기록할 것을 부탁하여 간략하게 이와같이 엮어서 후세에 자료로 삼으려 한다. 
단기(檀紀) 4312(1979)년 기미(己未) 중추(中秋)  
죽계(竹溪) 안용호(安龍鎬) 삼가 쓰다.  
강장(講長) 홍우지(洪祐至) 향유사(鄕有司) 이성식(李成植)

朱子影堂敍(주자영당서)
郡北井洞有影堂焉 乃晦菴夫子眞像奉安之所也 噫斯堂之營建于吾鄕果何理由 與地之相距不翅千有餘里也 世之相後幾乎千有餘年矣 而建斯堂妥眞影以寓尊慕之誠者 其必有說矣 吾夫子盛德光輝日月所照霜露所墜 凡有血氣者 莫不尊親焉 況我小中華嶠南鄒魯之鄕 秉彝好德之良心所同者哉矧乎 夫子之雲仍蕃衍是邦 殫誠先後於其間 而不懈益勤者哉 粵在癸亥本孫中 祥兆應新祥璡 謹奉迎于京師 鄭承旨泰好之家 建祠而香火之矣 伊後三十有年一鄕士論齊發 先賢眞像專委本孫  奉祠其在尊道慕賢之議 誠小未安 故別遣鄕儒以建院俎豆之意 往質于淵齋宋先生皐比之下 則答云  邦禁未弛建院 未妥止 以春秋間 焚香參謁講論經義以寓景慕之意何如 故奉而承之 以是遵行于玆有年矣 去戊戌歲春金侯龜鉉之宰于玆土也 瞻仰棟宇 特以慕賢之道 出義傾廩葺而新之 益復輪奐 是誠興起斯文之兆朕也哉 嗟夫拜夫子之像 讀夫子之書 誦夫子之詩 講夫子之道 而宛然如夫子之在坐 而提耳面命焉 是所謂像亦不爲無助者良有以也 一鄕之士拜之而矜式焉 一國之士過之而矜式焉 天下之士聞之而矜式焉 則斯堂之有光於吾林 有輔於世敎 興於百世之上 感於百世之下者 果何如哉 今其裔誰誰相繼 幹蠱 克紹先志 奉香周旋 於鄕儒參謁之地 而屬余爲文以敍其事 累以不嫺爲辭而不獲略敍如右 若其眞像奉迎上國之由 講堂肯構重修之節 備載於集成錄中 故玆不敢贅焉
光武六年壬寅三月上浣
仁川     李夢熺 謹敍
講長     洪鎭謨
鄕有司   裵憲國
本孫有司 朱基碩

주자영당서(朱子影堂敍)
군(郡) 북쪽 정동(井洞)에 영당(影堂)이 있는데 회암(晦菴) 선생의 진영(眞像)을 봉안한 장소다. 아! 이 당이 우리 고을에 지어지게 된 것은 과연 무슨 이유인가. 지역적인 거리도 천리가 넘을 뿐만 아니라 시대적 차이도 거의 천년이 넘지 않은가. 그런데도 이 영당을 지어 진영(眞影)을 모시고 존중하고 사모하는 정성을 깃들이는 것은 반드시 그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우리 선생의 성대한 덕과 빛나는 업적은 해와 달이 비침과 같과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것과 같으니 그 혈기(血氣)가 있는 사람은 존중하여 모시지 않음이 없다. 하물며 우리 동방예의지국 중에서 영남의 추나라와 노나라로 불리는 창원고을이 떳떳한 윤리를 지키고 덕을 좋아하는 올바른 양심이 한결같은 자들이 많음이겠는가.   이겠는가. 또한 선생의 후손들이 이 나라에 번성하여 그 동안 앞뒤로 정성을 다하면서 게으르지 않고 더욱 근면했던 사람들이겠는가. 지난 계해(癸亥)년에 본손(本孫) 중에 상조(祥兆) 응신(應新) 상진(祥璡)이 서울의 스승인 승지(承旨) 정태호(鄭泰好)의 집에서 영정을 모시고 내려와 사당을 세우고 향을 피우고 제를 올렸다. 이후 30여년인데 온 고을의 선비들이 모두 선현(先賢)의 진영(眞影)을 오르지 사당에 받든 본손에게 맡기자고 일제히 발의하였다. 그러나 그 도를 존중하고 현인을 사모하는 의론이 진실로 아직 안정된 것은 아니었다.  이에 서원을 지어 제의를 드리자는 의논을 모아 따로 지방 유림들 보내어 연재(淵齋) 송선생(宋先生)의 자리 아래에 가서 질문을 하였다. 이에 답하였다. ‘나라에서 서원 건립을 금함이 아직 강경하므로 타결되지 않고 그쳤다. 그러니 다만 봄가을에 제를 드리며 참배하고 강론하며 의를 논하면서 우러러 사모하는 뜻을 깃들이는 것으로 하면 어떻겠는가.’하니 그 말을 받들어 따랐다. 이에 이곳에서 그렇게 따라 행한 것이 몇 년이나 되었다. 지난 무술(戊戌)년 봄에 제후 김귀현(金龜鉉)이 이 고을에 부사로 왔다. 영당을 둘러보고 특별히 현인을 사모하는 도(道)로 뜻을 일으켜 곳간을 기울여 지붕을 새로 올렸다. 이에 더욱 환하게 되었다. 이는 진실로 유교가 흥성할 조짐이 아니겠는가. 아아! 대저 선생의 영정에 절하고 선생의 글을 읽고 선생의 시를 외며 선생의 도를 강학하면 완연히 선생께서 그 자리에 앉은 듯하고 귀로 듣고 얼굴을 마주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형상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이니 그 말에는 진실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한 고을의 선비들이 배알하고 기준으로 삼고 따르며 한 나라의 선비들이 지나가며 뵙고  또 그러하며 천하의 선비들이 그 소문을 듣고 또한 그러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당이 우리 사림에 빛남이 있는 것이며 세상의 가르침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백 세대 전에 흥기하여서 백 세대 아래에서도 감동을 일으키는 것은 과연 무엇이겠는가. 지금도 그 후손들이 어떤 사람사람들이 서로 이어 계승하여 선대의 뜻을 지금에 받아서 향을 받들고 주선하며 고을에서 유림들이 참배하는 상황인 것이다. 나에게 그 일에 대하여 차례대로 기록해 줄 것을 맡기기에 여러 차례 잘하지 못한다고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간단히 이렇게 서술한다. 만약 그 진영(眞影)을 중국에서 받들고 와서 봉안한 이유와 강당과 영당을 중수(重修)한 절의 등은  집성록(集成錄)에 갖추어져 있으므로 여기에 감히 덧붙이지 않는다. 
광무(光武 6, 1902)년 壬寅 3월 상순
인천(仁川)   이몽희(李夢熺) 삼가 기록하다.
강장(講長)   홍진모(洪鎭謨)
고을유사(鄕有司)  배헌국(裵憲國)
본손유사(本孫有司) 주기석(朱基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