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봉수대

진주 망진산봉수를 찾아

천부인권 2018. 12. 1. 06:00

2018.11.27 망진산봉수

 

11월 27일 지인이 드론으로 봉수대를 찍어 줄 수 있다고 하여 사천 각산봉수를 목표로 하고 창원을 출발하여 국도2호를 타고 진주로 향했다. 창원에서는 깨끗한 날씨는 아니지만 사진을 찍을만한 날씨였다. 창원시를 벗어나 수발재(修鉢재)를 넘어 진주시 이반성면에 들어서는 순간 안개가 자욱하다. 100m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안개는 차량의 속도를 뚝 떨어지게 한다. 안개로 인해 들판에 우뚝 솟은 이반성면 대천리 입석은 물론이고 경상남도 수목원도 보이지 않는다. 진주시가지에 거의 다다랐을 때 안개가 걷혀 급히 진주의 망진산봉수(望晉山烽燧, 해발 172m)부터 찾기로 목적지를 수정했다.
진주시 망경동 산 29-3번지에 위치한 망진산봉수는 차량으로 봉수대의 바로 앞까지 갈 수 있다. 망진산봉수는 남강의 깎아지른 절벽위에 복원을 했고 도착하니 마침 보수공사 한창이다.

 

2018.11.27 남쪽방향에서 본 망진산봉수

 

이곳 망진산봉수 앞에는 ‘시작이자 마지막일 통일의 봉홧불을!’이라는 시비가 세워져 있다.

1
기미년 삼월 일일
우리나라 산봉우리마다
때맞추어 봉홧불 활활 타올랐네
흰옷 입은 사람들
가슴에 불을 놓아
삼천리 골골샅샅 독립만세 번져갔네
진주사람 카랑한 정신으로 감연히 일어섰네.
걸인들도 기생들도 앞다투어 나섰네.

2
진주를 굽어보며 진주를 지켜 주는
망진산 봉우리에 찰진 햇살 넘치네.
진주의 풀, 꽃, 뭇 벌레 한데 어우러지고 있네.
고시랑거리며 지나가는 바람의 속말에는
에나 에나
전신 잘 챙겨서 올곧게 살라 하네.
나를 버리고 모두를 세우라 하네.

3
백두산 진달래 한라산 유채꽃
지리산 큰 달맞이
떠돌이 잡동사니 여기다 모여라.
두억시니 몽달이도 나오너라
우리함께 봉홧불을 지피자
한때는 짝사랑 그리움도 되었다가
지금은 전부요 숫제 통곡인
통일의 봉홧불을 지펴 올리자
사람은 사람끼리 살 부비고 살아가게
살아서 끝끝내 꽃 피우는 우리의 역사
시작이자 마지막일 한 나라에 이르는
망진산 통일맞이 봉홧불을.

 

망진산봉수에서 본 진주성

 

그 옆에는 ‘망진산 봉수대의 약사(略史)’라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가야인의 숨결이 서린 땅, 수많은 성이 흙담처럼 무너져 내리던 임란에 진주의 횃불은 꺼질 줄 몰라 온 조선을 공그어 받치던 곳이었어라. 그러나 뒤 알았으랴. 나약한 왕권 아래 외침을 알리던 진주의 망진산봉수대 불 꺼지고 일제의 병단 아래 종수대 깡그리 무너지고, 못난 정치의 시대 선도된 역사의식은 망진산봉수대를 역사의 뒤뜰에다 매몰시킨 채 망각의 세월이 100년을 헤아리게 될 줄이야. 그래도 진주는 역시 진주 아니던가. 한줄기 맑은 샘물처럼, 한줄기 맑은 바람처럼, 한줄기 밝은 빛살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어 건너 뛴 세월의 뒤안에 파묻힌 망진산봉수대의 역사적 사실을 파내어 흙을 털고 때를 벗기어 이곳에 다시 세우게 되었으니 망진산봉수대의 그 역사와 복원의 과정을 여기 적는다.
일반적으로 봉수대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시대부터 외적의 침입을 알리는 통신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조 세종 4년(1422)에는 봉수제도가 정비되어 5등급, 5개의 직봉노선을 거쳐 한양의 목멱산(남산)으로 연결시켜 운용하였다. 진주의 망진산봉수대는 조선시대에 돌과 흙을 섞어서 만들어진 것으로 전하며, 위에 말한 5개 직봉노선 가운데 동래 다대포진에서 목멱산에 이르는 제2노선의 보조노선(간봉)으로서 남해 금산↔창선도 대방산봉수↔사천 각산봉수↔사천 안점산봉수를 받아 진주시 명석면 광제산봉수로 이어 주는 곳이다.
그러나 1895년 전국의 봉수제를 폐지하면서 망진산봉수대도 기능을 잃었으나 1894년 동학농민항쟁과 1919년 3·1만세운동을 벌일 때 망진산봉수를 사용한 것으로 전하며, 그 뒤 일제는 전국의 봉수대를 파괴하거나 훼손하여 역사적 사실을 파묻었고 우리 민족 또한 망각의 세월을 살았다.
그러다가 광복 50년인 1995년 통일기원 전국봉화제의 일환으로 진주문화 사랑모임을 비롯한 민간단체가 중심이 되어 망진산봉화제를 올렸고 다시 망진산봉수대를 복원하기 위한 시민운동을 펼쳐 봉수대 복원추진위원회가 구성되고 2천여명의 시민이 참여하여 6천5백여만원(1구좌 5천원)의 성금을 모았으며 문화재건위원들의 감수와 고증을 거쳐 봉수대 모형을 확정지어 다시 세우게 되었다. 망진산봉수대 복원이 갖는 의미는 우리 진주 사람들의 올바른 역사의식을 달구어 벼르는 일이며 새로운 진주의 역사를 창조하는 일이라는 점이다. 또 애초에 망진산봉수 복원은 민족통일의 염원을 담고 이루어진 것이므로 백두산 돌과 한라산 돌, 지리산 돌, 독도의 돌, 진주 월아산 돌을 모아 기단에 심었고 금강산 돌은 통일이 되는 그날 가져다 심기로 하였다. 그러므로 망진산봉수는 우리 진주 사람들의 통일염원을 담은 소도이며, 역사인식의 가늠대이며, 문화사랑의 척도가 되는 것이다.』

1996년 8월 11일

진주문화사랑 모임 망진산봉수대복원추진위원회

 

 

‘망진산 봉수대의 약사(略史)’를 읽는 동안 민족의 아픈 역사에 절로 가슴이 먹먹하다. 임진난 때 민족과 산천이 유린당하면서도 봉홧불을 굳건히 밝혀 처참히 지켜낸 자존심을 결국 미제의 비호 하에 일제의 야욕으로 조선이 멸망하여 치욕적 수치를 당했다. 그 수치를 극복하고자 망진산봉수에 봉홧불을 밝힌 진주 사람들의 정신을 어찌 부러워하지 않으랴.

 

세종실록 150권, 지리지 경상도 진주목에 의하면
烽火五處, 望津山在州南,【南準泗川城隍堂, 北準光濟山】 光濟山,【北準丹溪縣 笠岩】 角山鄕主山在州南,【東準固城 佐耳山, 北準泗川 針枝, 南準金良部曲 陽芚山】 陽芚山,【南準南海島 望雲山, 北準本州桂花山】 桂花山,【西準全羅道 件代山】
봉화가 5곳이니 망진산(望津山)은 주(州) 남쪽에 있다. 【남쪽으로 사천(泗川) 성황당(城隍堂)에 응하고, 북쪽으로 광제산(光濟山)에 응한다.】 광제산(光濟山) 【북쪽으로 단계현(丹溪縣) 입암(笠岩)에 응한다.】 각산향 주산(角山鄕主山)은 주(州) 남쪽에 있다. 【동쪽으로 고성(固城) 좌이산(佐耳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사천(泗川) 침지(針枝)에 응하며, 남쪽으로 금량 부곡(金良部曲) 양둔산(陽芚山)에 응한다.】 양둔산(陽芚山) 【남쪽으로는 남해도(南海道) 망운산(望雲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본주(本州) 계화산(桂花山)에 응한다.】 계화산(桂花山) 【서쪽으로 전라도 건대산(件代山)에 응한다.】

 

 

신증 동국여지승람(1530년) 진주목(晉州牧)에 기록된 봉수는
[臺方山烽燧 在州南一百十四里南應南海縣錦山北應角山]
대방산봉수 주(州) 남쪽 1백 14리에 있다. 남쪽으로 남해현 금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각산에 응한다.
[角山烽燧 在州南七十六里南應臺方山西應昆陽牛山北應泗川鞍岾]
각산봉수 주(州) 남쪽 76리에 있다. 남으로 대방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곤양 우산에 응하며, 북쪽으로 사천 안점에 응한다.
[望晉山烽燧 南應泗川鞍岾北應廣濟山]
망진산봉수 남으로 사천 안점에 응하고 북으로 광제산에 응한다.
[廣濟山烽燧 在州北三十一里南應望晉山北應丹城笠巖山]
광제산봉수 주(州) 북쪽 31리에 있다. 남으로 망진산에 응하고 북으로 단성 입암산에 응한다.

 

 

진양지(晋陽志-1625년) 권지2와 진양지(晋陽志)에 기록된 봉수에는
[臺方山烽燧 在州南一百十四里昌善島中 南應南海縣錦山北應角山] 대방산봉수는 주(州) 남쪽 1백 14리 창성도 안에 있다. 남쪽으로 남해현 금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각산에 응한다.
[角山烽燧 在州南七十五里末文里 南應臺方山西應昆陽牛山北應泗川鞍岾] 각산봉수 주(州) 남쪽 76리 말문리에 있다. 남으로 대방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곤양 우산에 응하며, 북쪽으로 사천 안점에 응한다.
[望晉山烽燧 在州南四里涉川里 南應泗川鞍岾北應廣濟山] 망진산봉수 주(州) 남쪽4리 섭천리에 있다. 남으로 사천 안점에 응하고 북으로 광제산에 응한다.
[廣濟山烽燧 在州北三十里省台洞里 南應望晉山北應丹城笠巖山] 광제산봉수 주(州) 북쪽 30리 성태동리에 있다. 남으로 망진산에 응하고 북으로 단성 입암산에 응한다.

 

 

진주군읍지(晋州郡邑誌-1899년)에 기록된 봉수에는
[臺方山烽燧 在州南一百十四里昌善島中 南應南海縣錦山北應角山] 대방산봉수는 주(州) 남쪽 1백 14리 창성도 안에 있다. 남쪽으로 남해현 금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각산에 응한다.
[角山烽燧 在州南七十五里末文里 南應臺方山西應昆陽牛山北應泗川鞍岾] 각산봉수 주(州) 남쪽 76리 말문리에 있다. 남으로 대방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곤양 우산에 응하며, 북쪽으로 사천 안점에 응한다.
[望晉山烽燧 在州南四里涉川里 南應泗川鞍岾北應廣濟山] 망진산봉수 주(州) 남쪽4리 섭천리에 있다. 남으로 사천 안점에 응하고 북으로 광제산에 응한다.
[廣濟山烽燧 在州北省台洞里 南應望晉山北應丹城笠巖山] 광제산봉수 주(州) 북쪽 성태동리에 있다. 남으로 망진산에 응하고 북으로 단성 입암산에 응한다.

 

 

 

거제 강망산봉수 거제 옥녀봉봉수거제 가라산봉한산도 한배곶봉수 통영 미륵산봉수 통영 우산봉수 고성 좌이산봉수 사천 각산봉수

 

남해 납(원)산봉수
남해 설흘(소흘)산봉수
남해 미조 망운산봉수

남해 금산봉수
창선도 대방산봉수
사천 각산봉수
사천 안점산봉수
사천 우산봉수
 ⇔  진주 망진산봉수

 

진주 광제산봉수 ⇔ 단성 입암산봉수 ⇔ 삼가 금성산봉수 ⇔ 합천 소현봉수 ⇔ 거창 금귀산봉수 ⇔ 거창 거말흘산봉수 ⇔ 상주 지례현 구산봉수

 

출처 및 참고
경남지역의 봉수Ⅲ-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2015.08.16.)/디자인세상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Ⅳ-고전국역총서43/재단법인 민족문화추진회-32권(1971.2.20.)
진양지(晋陽志-1625년) 권지2-서울대학교규장각 지리지
진양지(晋陽志)-서울대학교규장각 지리지
진주군읍지(晋州郡邑誌-1899년)-서울대학교규장각 지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