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들/향교와 뿌리

고성향교 풍화루 상량문과 기문

천부인권 2019. 12. 16. 21:29

 

 

 

2019.12.9. 고성향교 풍화루 전경

 

고성군 고성읍 교사리 270-1번지에 위치한 고성향교(固城鄕校)를 이번에 방문하게 된 것이 3번째이다. 사람은 “아는 것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알게 된다.”는 것을 이번 방문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2010년에 첫 방문을 했을 때 향교가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을 봐야 하는지 그 특징은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 그래서 안내표지에 쓰여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공부를 했다. 거의 10년이 흘러 다시 방문한 고성향교는 볼 것도 많았고 공부할 내용도 너무 많다. 무엇보다 향교의 정확한 역사와 내력을 적은 기문(記文)과 상량문(上樑文)을 보게 됐다는 점은 어떤 볼거리와도 비교 불가이다.
또한 고성향교만의 특징적 건축과 풍화루(風化樓) 앞 정면의 계단과 명륜당 앞 정료대의 받침돌에 새겨진 성혈의 흔적을 보게 되었다는 점은 나름 공부를 하고 있다는 증거와 같아 만족을 한다.
고성향교에는 풍화루와 명륜당에 현판들이 집중적으로 걸려 있는데 그 양이 많아 풍화루의 기문들만 우선 소개를 하고자 한다.

 

 

 

 

2019.12.9. 고성향교 풍화루 앞 계단의 성혈

 

 

 

 

風化樓重修記上樑文
伏以傍宮墻而基兆仍舊以觀 夫子之遺風用絜矩而 棟宇重新爭趨章甫之訖役輪煥美其如彼文明煥乎 在玆緬惟風土鄒魯鄕嶺南人物士大夫冀北伽倻國 千載上縱文憲之無懲鐵城邑百里中幾賢哲之有作玄冠素履爭歌齊魯之風白面靑襟丕變賨渝之俗顧此 風化樓者基於尊聖之地煥然入德之門智爲築而仁 爲材輸牛山之美木義以樞而禮以戶集蛾述之群儒 昭揭日月之光明廣施乾坤之闔闢三門磅磗像三綱 而䤵鋪八柱崢嶸儀八條而羅列小人有所畏君子有 所依在嶺南七十州魯城之絃誦不墜環海東數千里 齊庠之講論猶存樂其化焉升彼堂而斐然改舊聞其 風者入此門而期乎 自新鄕傳昌平之風村 成闕里之俗 能使四方之居者 俱瞻一樓之歸然縱云 飛鳥之逈 臨曷許 元龍之高臥 當年之經始 勿亟閔侯之題板 終古不泯 其時之有司 賢勞崔公之彈誠 至今咸頌第緣 營建之旣久斯致傾圮之 是憂星霜累經 棟楹之漫漶 幾歲風雨斯萃軒窓之頹敗 堪憐玆因瞻仰之無由爰 謀堂宇之重建 伏惟權侯以簪弁令族售勇白猿惟忠賢 後孫流略黃石 擢虎榜而登 仕以儉俗 興化爲先豎熊 幡而分憂以愛士慕聖 爲務來銅章於蜀郡擬繡 漢京纔於民情遍察之時遽當聖門修葺之日 學宮之事不可緩也 士林之請惡得已乎 特嘉時齋任董役之多勞深體統相國輸材之一念 廣問規畫斯速經營周覽基址 慨前倅之未暇商量大事勉 後進之成功爰始 爰謀乃岡乃景豈殫財於百室因子來於四封拓基於 四會之疆授規於三農之隙念 前日之創建 在甲其年 及後人而重修幸丁吉運展也 繩墨之咸得倏爾規模之鼎新 美哉翬飛鳥革之形 煥然矣 鸞翔鳳翥之狀六鰲 戴蓬萊之島 雙虹飮星宿之河 黌堂屹爾成摸聖煥然 增色趨縫掖而濟濟皆有賀重新之美功來 庶民而欣欣孰不聞聖人之風化 惟余雙忠遺裔一介腐儒遊未 及二三子之間 但得聞顔 閔之好學生 旣晩數千年之後 竊有慕游夏之文章 誦濂洛群賢之著 書 無路尋師 而學北講湖嶺先輩之遺業 只信吾道之在東每愧乏 於奇才撫身命 而永歎未能遂於愚志瞻棟宇而長吁 玆因雙樑之修式和六偉之唱抛梁東巨流山色入雲 空願言聖域長瞻仰從此吾鄕振古風抛梁南碧榜嵬 嵬天共參斗柄漸移回盛運百年吾邑出奇男抛梁西 文洙庵屹與雲齊望中中國知何處想得轍環路不迷 抛梁北無量高出雲邊矗太和春掃陰崖寒滿地祥光 亘斗極抛梁上時時雲物靜中蕩玩來天上圖書奇香 案仙官承帝命抛梁下多少行人必式馬眼界遙通海 色涵夕陽芳草連平野伏愿上樑之後俗習時革文敎 日新師思孟慕顔曾七十子典刑從此可想家詩書戶 絃誦三千弟遺範於斯可觀望其門焉惰慢之氣自然 而滅登斯樓也孝悌之心油然而生永作尊瞻之基終 爲感化之地使鬼神保護與天地始終豈徒觀美而然 是乃重修之意
甲申三月上浣      崔祥翊 撰
丙子正月 日 再從姪 必灝 改書
                  不肖孫 東冀 幹役

 

풍화루중수기상량문(風化樓重修記上樑文)
엎드려 교궁(校宮)의 담장과 기초를 의지하고 옛 모양으로 인하여 부자(夫子)의 유풍(遺風)을 관찰(觀察)하며 도량(度量)으로써 동우(棟宇)가 갱신(更新)함은 오고가는 의관(衣冠)의 완공(完工)이다. 이와 같으니 문명의 환란(煥爛)함이 이에 있다. 생각해보면 풍토(風土)는 추로(鄒魯) 향(鄕)으로 영남(嶺南)의 인물과 사대부(士大夫)가 이 가야국(伽倻國)인 천재(千載)를 기망(冀望)하나 문헌이 무징(無徵)하고 철성(鐵城)의 백리(百里)에 현인과 철인(哲人)이 출생하여 현관(玄冠)과 소이(素履)로 재로(齊魯) 풍속을 영가(詠歌)하며 백면(白面)과 청금(靑衿)으로 크게 실윤(實倫)의 풍속을 변(變)하였으니 이 풍화루(風化樓)는 존성(尊聖)의 지위(地位)를 존중(尊重)하여 환연(煥然)이 입덕(入德)하는 문(門)이다. 지(智)로써 건축하고 인(仁)으로써 취재(取材)하니 우산(牛山)의 미목(美木)을 윤전(輪轉)하여 의(義)와 예(禮)로써 호추(戶樞)를 성립(成立)하고 아술(娥述)하는 군유(群儒)를 회집(會集)하여 일월(日月)의 광명(光明)함을 소게(昭揭)하며 건곤(乾坤)의 개벽(開闢)을 넓게 베푸니 삼문(三門)이 방전(磅磚)하여 삼강(三綱)을 유상(儒想)하며 팔주(八柱)가 쟁영(崢嶸)하고 팔조(八條)가 나열(羅列)한다. 소인(小人)은 송구(悚懼)하며 군자(君子)는 의귀(依歸)하니 영남의 칠십주(七十州)에 노성(魯城)의 현송(絃誦)이 추락(墜落) 되지 않고 해동(海東)의 수천리(數千里)에 제상(齊庠)의 강론(講論)이 의재(依在)하여 그 풍화(風化)를 열락(悅樂)한다. 전당(殿堂)에 오르니 비연(斐然)이 개신(改新)되어 그 풍화(風化)를 득문(得聞)하며 이 문(門)에 출입하는 자는 자신을 함양함에 기대(期待)하고 향중(鄕中)에 태평(太平)의 풍화(風化)를 전(傳)하는 촌항(村巷)에 궐리(闕里)의 미속(美俗)을 성치(成致)하여 사방에 거주(居住)하는 자로 하여금ㅂ 풍화루(風化樓)의 규연(巋然)함을 첨앙(瞻仰)하고 종천(縱天)하는 비조(飛鳥)가 회염(回염)하니 어찌 원용(元龍)의 고와(高臥)에 비(比)하리요. 당년(當年)의 경시(經始)함을 빠르게 말과 민후(閔侯)의 제판(題板)이 불민(不泯)하니
황석공(黃石公)이 호방(虎榜)에 등과(登科)하여 검속(儉俗)과 흥화(興化)로써 최선(最先)으로 능번(能幡)을 수립(樹立)하고 애사(愛士)와 모성(慕聖)에 전력(專力)하여 동장(銅章)을 촉군(蜀郡)에 내환(來還)하고 수헌(繡軒)을 한경(漢京)에 모범(模範)하여 민정(民情)을 통찰(通察)함에 비로소 하고 성문(聖門)을 수즙(修葺)함에 당(當)하여 학궁(學宮)의 역사(役事)는 위완(違緩)치 못함이라. 사림(士林)의 청탁(請託)을 어찌 사양(辭讓)하리요. 특히 재임(齋任)과 동역(董役)의 노고(勞苦)를 가상(嘉尙)하며 이에 경영(經營)함을 속(速)히 하고 그 기지(基址)를 주람(周覽)하니 전군수(前郡守)의 여가(餘暇)에 틈타니 전일(前日)의 창건(創建)이 갑모년(甲某年)과 및 후인(後人)의 중수(重修)함에 있다. 다행이 길운을 당하니 광대(廣大)하다. 승묵(繩墨)의 규조(規條)를 얻어 정신(鼎新)함이다. 운비(暈飛)하는 조혁(鳥革)의 모형(貌形)이 환연(煥然)하며 난상(鸞翔)과 봉저(鳳翥)의 형상(形像)이 육년(六年)에 봉래도(蓬萊島)에 추대(推戴)하니 쌍홍(雙虹)이 은하(銀河)를 머금고 성묘(聖廟)가 환연(煥然)이 증색(增色)하니 의관(衣冠)이 내임(來臨)하여 모두 중신(重新)의 미공(美功)을 축하(祝賀)하며 무민(廡民)이 희열(喜悅)하니 뉘가 성인(聖人)의 풍화(風化)를 불문(不聞)하리요. 오직 나의 쌍충(雙忠)의 유예(遺裔)이며 일개(一介)의 부유(腐儒)로 이삼자(二三子)에 미급(未及)하나 다만 안자(顔子)와 민자건(閔子蹇)의 호학(好學)함을 득문(得聞)하고 또는 수천년(數千年)의 후(後)에 출생(出生)하여 자유(子遊)와 자하(子夏)의 문장(文章)을 사모(思慕)함과 렴락(濂洛)에 군현(群賢)의 저서(著書)를 송독(誦讀)하고 심사(尋師)를 할 전도(前途)가 없어 호령(湖嶺)에 선배(先輩)의 유업(遺業)을 강습(講習)하며 다만 오도(吾道)의 동방(東方)에 있음을 신뢰(信賴)하고 신명(身命)을 의탁(依託)하여 영탄(永歎)하고 동우(棟宇)를 첨망(瞻望)하여 장우(長吁)하며 이에 쌍량(雙樑)의 수식(修式)을 인(因)하여 육위(六偉)의 창(唱)을 화(和)하노니
대들보를 동(東)으로 하니 거류산(巨流山)의 경색(景色)이 운공(雲空)에 솟으니 원(願)하건대 성역(聖域)을 기리 첨앙(瞻仰)한다. 이것이 오향(吾鄕)의 고풍(古風)을 진작(振作)함이다.
대들보를 남(南)으로 하니 벽방산(碧芳山)이 높고 높아 하늘과 같고 북두(北斗)가 이전(移轉)하여 성운(盛運)이 회복(回復)하여 백년(百年)의 오읍(吾邑)에 기남(奇男)이 출생(出生)하네.
대들보를 서(西)으로 하니 문수암(文殊庵)이 높아서 구름 같으며 만중(望中)에 중국(中國)이 어느 곳이야 철환(轍環)을 상상(想像)함에 노정(路程)이 미란(迷亂)치 않다.
대들보를 북(北)으로 하니 무량산(無量山)이 높아 운변(運邊)에 솟아 태화(太和)의 춘일(春日)에 음애(陰崖)가 차가우며 만지(滿地)한 상광(祥光)이 북두(北斗)를 통(通)했다.
대들보를 상(上)으로 하니 시시(時時)로 운물(雲物)은 정중(靜中)에 탕잔(蕩殘)하고 완래(玩來)의 천상(天上)에 도서(圖書)가 기밀(奇密)하며 향안(香案)의 선환(仙宦)이 제명(帝命)을 계승(繼承)한다.
대들보를 하(下)으로 하니 다소(多少)의 행인(行人)이 반드시 하마(下馬)하고 안계(眼界)가 원통(遠通)하여 해색(海色)이 유함(濡涵)하고 석양(夕陽)의 방초(芳草)가 평야(平野)에 연(連)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상량(上樑)의 후(後)로 속습(俗習)이 시화(時華)하고 문교(文敎)가 일신(日新)하여 자사(子思)와 맹자(孟子)와 안자(顔子)와 증자(曾子)를 추모(追慕)하여 칠십제자(七十弟子)의 전형(典刑)을 이로부터 상상(想像)하고 시서(詩書)로써 삼천(三千)의 제자(弟子)와 유범(遺範)을 현송(絃誦)하면 이에 그 문장(門墻)을 관망(觀望)함이며 정만(情慢)한 기색(氣色)이 자연(自然)이 멸(滅)하리니 이 루(樓)에 등임(登臨)하면 효제(孝悌)의 마음이 유연(油然)이 발(發)하여 영영(永永)히 존첨(尊瞻)의 기초(基初)를 하여 종말(終末)에 감화(感化)의 지경(地境)이 될 것이니 귀신(鬼神)이 보호(保護)하여 천지(天地)와 같이 시종(始終)하리니 어찌 관미(觀美)만 하리요. 이것이 중수(重修)의 의미(意味)이다.
갑신삼월상완     최상익(崔祥翊)이 짓고
병자정월 일 재종질 필호(必灝)가 고쳐 썼으며
                     손자 동기(東冀)가 일을 담당했다.

 

 

 

 

 

風化樓重建記

凡是樓之重建 在於甲午 而閔侯記曰 但廟宇巋 然門無設焉重建之時 始有設門之制歟 又曰仍舊額而字 義大哉重建之前已 有置樓之規歟由 是觀之重建之前不知 其幾度重建亦不知 幾度移建也 噫甲午重建之時 惟我伯父與族兄某以 是役爲己任 而所謂開導 趨向之方深得 風化之旨者 實閔侯之公言也 自今去 甲午五十有一年 而是樓風雨所萃幾至 傾圮鄕人屬 余以重修之役 余不敢辭而何幸太守權公其自下車之初 以興化爲先多般規畫靡不用 極罔俾閔侯有能 專美於古也 但齋長崔士誠以私 故功未半而遞歸是 爲可恨遂與副有司崔允益 自甲申六月始之而粤七 月庚戌告訖其規模則皆仍舊而特改牕爲戶粗開通 暢之勝以光前人之功然惟勤勉幹敏之勞實有愧焉 而使登斯樓者瞻仰起敬感發其良心 則庶幾有補於 風化之萬一云爾
崇禎紀元後 四甲申 七月 二十八日
  掌議兼重修都監 崔光礪記
                  儒生 金宗環書
都有司兼重修都監 許東成
  掌議兼重修都監 李基賢
齋有司兼重修有司 千學大
                   色史 朴尙淑
                   片手 姜達旭
                          朴思儉
                   庫直 尹三未

 

풍화루중건기(風化樓重建記)
무릇 이 누의 중건은 갑오년(甲午年)에 있었는데 민후(閔候)가 기록하기를 묘우(廟宇)만 우뚝할 뿐 문은 설치됨이 없었다고 하였으니 중건할 때 처음 문을 설치한 체제가 있었던 것일까? 또 이르기를 옛 편액을 사용했으나 글자의 뜻이 크도다 하였으니 중건하기 전에 이미 누를 설치한 규범이 있었던 것일까? 이로써 볼 것 같으면 중건하기 전에 몇 차례 중건하였는지 알 수 없고 또 몇 차례 이건하였는지도 알 수 없다.
아아! 갑오년 중건할 때 백부와 족형 광의(光嶷)가 이 일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으니 따라갈 방향을 열어 인도하였으며 깊이 풍화(風化)의 뜻을 얻었다고 칭송한 것은 실로 민후(閔候)의 공변된 말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지난 갑오년까지 51년이 되는데 이 누는 풍우에 쓸려 거의 넘어지게 되었다.
향인이 나에게 중건을 위촉함에 나는 감히 강경하게 사양하지 못하였다. 다행이도 태수 권호(權灝)가 부임하여 교화를 일으키는 것을 우선으로 삼아 제반 계획을 지극히 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민후(閔候)만 옛적에 아름다운 일을 하도록 하지는 않았다. 다만 재장(齋長) 최사성(崔士誠)이 사사로운 일로 공사를 반도 일우지 않아서 바뀌어 돌아갔으니 이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이에 부유사(副有司) 최윤익(崔允益)과 함께 갑신년 2월부터 시작하여 7월 28일이 되어 마쳤다. 그 규모는 모두 옛것을 따랐으나 창을 고쳐 난간으로 하여 조금이나마 더 시원하게 통하도록 함으로써 앞 사람들의 공을 빛나도록 하였지만 부지런 하고 민첩하게 알선한 수고는 실상 전보다 부끄러운 점이 있었다. 이 누에 오르는 이로 하여금 우러러 보고 공경심을 일으키게 하여 그 양심을 감동시키게 한다면 풍화에 만분의 일이나마 보탬이 될 것이다.
숭정기원후 사갑신(四甲申:1824) 7월 28일
  장의겸중수도감 최광려(崔光礪) 기록함.
                  유생 김종환(金宗環) 글씨를 쓰다.
도유사겸중수도감 허동성(許東成)
  장의겸중수도감 이기현(李基賢)
재유사겸중수유사 천학대(千學大)
                   색사 박상숙(朴尙淑)
                   편수 강달욱(姜達旭)
                           박사검(朴思儉)
                   고직 윤삼미(尹三未)

 

 

 

 

 

風化樓重建記
昔有鄕之立校也 殿曰大成堂曰明倫樓曰風化者窮有深意焉 大成者使萬物莫不遂 其性者之聖殿也
昔有鄕之立校也 殿曰大成 堂曰明倫 樓曰風化者 竊有深意焉 大成者使萬物莫不遂其性者之聖殿也 明倫者德之所以養守內者也 風化者新民之所以及於外者也 然非明倫則無以爲修齊之本 無風化則亦無以成治平之資 是以上古盛世綱倫明於上 風化美於下 此明倫之所以一無缺者也 而歲久年深 瓦缺瞻宵之風化樓傾頹危立者久矣 出入章甫者齎恨嗟咨者十數禩之玆矣 夫亂極當治 廢久復興 固理勢之所使然哉 典校李在鎬及鄕之翹楚諸氏以殫誠極力 累請於當局 獲得文化財基金貳億餘圓 經之營之 於是匠工獻其圖 龜筮叶其吉 運北石輸南材 上層而通下宇 踰年而功告訖 其輪奐之美增采於山川草木也 孰不曰壯擧也哉 嗚呼 後之登斯樓者 念正學之湮晦 憂斯道之榛蕪 發憤奮起 永圖修己及人之方 則庶幾有補於風化之萬一云爾
孔紀二五六五年甲午天中節
成均館典學 鄭昌碩 記
鄕校典校   李在鎬
儒道會長   具判鈺
成均館典學 劉富烈 謹鐫

 

풍화루중건기(風化樓重建記)
옛날 고을에 향교를 세움에 전은 대성이라 하고 당은 명륜이라 하고 누는 풍화라 했던 것이 가만히 생각하면 깊은 뜻이 있었다. 대성이라 하면 만물로 하여금 각기 그 성품을 따르지 않을 수 없게 하여 성전이라 하고, 명륜이란 덕을 밝혀 그 마음을 지키고 기르게 함이요, 풍화란 백성을 새롭게 하여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게 함을 이른다. 그러나 명륜이 아니면 수신제가의 근본이 없고, 풍화가 없으면 역시 치국평천하를 이룰 수 있는 자질이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상고의 태평성대에는 강륜이 위에서부터 밝혀지고, 풍화가 아래에서 아름답게 이루어지는 것이니 이 때문에 명륜과 풍화는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세월이 깊어지고 오래되어 기왓장이 어긋나고 하늘이 올려 보이는 풍화루가 기울어질 듯 위태롭게 서 있은 지가 오래되었다. 향교를 출입하는 유생들의 숙원이 쌓여 탄식한 지가 10여년이 넘었다. 대개 난이 극에 달하면 순치가 이루어지고 폐허가 오래되면 부흥이 되는 것은 진실로 이치가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전교 이재호(李在鎬)를 비롯한 고을의 뛰어난 선비들이 정성을 다하고 있는 힘을 쏟아 수차례 당국에 요청하여 문화재 기금 이억 여원을 획득하여 경영을 시작함에 서광이 비춰서 명장들이 계획된 도면을 헌납하고 점괘가 길일을 점지하여 북쪽에서 옥석을 실어오고 남쪽에서 재목을 날라다 2층 누각을 지을 새 해를 넘겨 준공을 하였는데 그 아름다운 자태가 산천초목도 광채를 더하더라. 그 누군들 장엄한 거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아! 뒷날 이 풍화루에 올라오는 자들이 공자님의 정학이 민몰됨을 염려하고 우리의 유도가 땅에 떨어짐을 걱정하여 분을 발하고 용기를 내어 깊이 수신하고 명덕을 닦아 다른 사람에게 미칠 수 있는 공부를 도모한다면 거의 성현의 풍화에 이르리라.
공기2565년 갑오(2014)년 천중절(단오)
성균관전학 정창석(鄭昌碩) 짓고
향교전교   이재호(李在鎬)
유도회장   구판옥(具判鈺)
성균관전학 류부렬(劉富烈) 삼가 새겼다.
홍보장의  심상정 번역  

 

 

 

 

 

風化樓重建記
張方平之益州也 以齊魯而待蜀 蜀之人化焉 此非風之所動歟 我東風化之樓布列于八域 爲宇牧之任者 或力於宣風 則近而畿句 遠而海澨 均之爲齊魯也 於化民乎何有哉 噫斯樓之有名 而宲無者業己年代 而今則將幷興其名 而泯之者殆一國矣 孫侯永穆氏下車大修學改 越三年庚申春 謁聖廟環視宮墻樓 則棟橈廡欲屋壞 卽矍然集州之人士曰公等皆縫掖者 豈能無茂草之憾 耶盍謀耶以新之也 余適黍在直員之職 乃興諸公創繕事 首尾凡略于月 而功造迄 余諗于僉曰 舊樓之新 他郡耶未聞而吾郡先之俾 一鄕人事各自幷厲 而振援之亦將有辭于後 而皆侯之力也侯旣 以齊魯待吾吾等 獨不以張公待侯乎 僉曰諾是爲之記
聖誕二千四百七十一年 庚申七月十五日
       完山 崔正喆 撰
監役 金海 許在現
       咸安 李鎭坤
掌議 陜川 李勉潤
齋有司 金海 金澤權


풍화루중건기(風化樓重建記)
장방평(張方平)이 익주(益州)로 부임했을 때 파주(巴州)가 제노(齊魯)로써 촉(蜀)을 대접(待接)하여 촉인(蜀之)이 감화(感化)하였으니 이것이 풍화(風化)의 감동(感動)이 아닐까. 아동(我東)의 풍화루(風化樓)가 팔역(八域)에 포재(布在)하여 태수(太守)에 임(任)하는 자(者) 혹풍화(或風化)에 힘쓰면 근접(近接)은 기구(畿句)이며 원정(遠程)은 해서(海澨)이나 균등(均等)하게 제노(齊魯)가 되면 화민(化民)에 무엇이 있으리요. 아아! 이 루(樓)가 유명(有名)하나 포무(宲無)한지 이미 연대(年代)이다. 지금은 그 명분(名分)이 병(幷)하여 민몰(泯沒)됨이 일국(一國)이다. 손후영목씨(孫侯永穆氏)가 하차(下車)하여 학교(學校)를 크게 수리하고 월삼년(越三年) 경신(庚申) 봄에 성묘(聖廟)를 배알하고 궁장루(宮墻樓)를 시찰(視察)하니 괴토하므로 향인(鄕人)을 소집(召集)하여 이르기를 공등(公等)은 어찌 무초(茂草)의 감(憾)이 없으리요. 내 직원(直員)의 직(職)으로 제공(諸公)과 함께 창선(創繕)을 도모(圖謀)하여 약우(略于)의 달에 공흘(功迄)하고 첨원(僉員)에 고하기를 옛 누각의 갱신(更新)이 타군(他郡)에 비(比)하여 우선되니 일향(一鄕)의 인사(人事)는 진원(振援)하여 후인(後人)에 전(傳)함이 모두 후(侯)의 노력이다. 제노(齊魯)로써 오등(吾等)을 대(待)함이 독(獨)히 장공(張公)이 아니리요. 이로써 기(記)하노라.
성인탄신 이천사백칠십일년(1920) 경신 7월 15일
       완산 최정철(崔正喆) 짓고
감역 김해 허재현(許在現)
       함안 이진곤(李鎭坤)
장의 합천 이면윤(李勉潤)

 

 

 

 

 

風化樓重建記
樓以風化爲名 即風以動之 敎以化之之義也 堯曰四方風動 時乃之休 夫子曰君子之德風也 小人之德草也 草上之風必偃 以若夫子之風加之 以夫子之化 則凡有彛性者 孰不尊親而奉承乎 以之而父子親 君臣義 長幼序 夫婦和 朋友信 擧萬世於 堯風舜化之中 而天地位萬物育焉 鳴呼其盛矣乎 以是命名基義深矣 累經風霜棟臬頹敗久 爲士林齎盃而何幸 宋侯燦道來守 是郡深慨于 此遂與鄕中章甫 齊發重修之議 詢謀僉同卜云 其吉乃因舊貫 而易其傾杇 新其丹雘不一月 而功告訖於是乎 登斯樓而望遠 則雲烟改色 日月增光 後之人與侯同志 嗣而葺之永世輪奐 則庶有補於風化哉
秋分節 李宗煥 謹記
  郡守 道宋燦
  直員 李宗煥
  掌議 具純祚
  監督 李鎭協
          許  嚥
          崔元鎭
  有司 金炯大 

 

풍화루중건기(風化樓重建記)
루(樓)를 풍화(風化)로 칭명(稱名)함은 풍(風)으로써 동(動)하며 교(敎)로써 화(化)하는 의미(意味)이다. 요(堯)는 사방(四方)이 풍동(風動)하니 시절(時節)이 아름답다 하였고 부자(夫子)는 군자(君子)의 덕(德)은 풍화(風化)이요 소인(小人)의 덕(德 )은 초(草)라 하였으니 초상(草上)에 풍취(風吹)하면 반드시 굽히나니 부자(夫子)와 같은 풍도(風度)로 부자(夫子)의 교화(敎化)를 더하면 모두 오륜이 있는 것이니 누가 존친(尊親)과 봉승(奉承)을 아니 하리요. 그로부터 부자(父子)가 친(親)하며 군신(君臣)이 의(義)로써 하며 장유(長幼)가 서(序)로써 하며 부부(夫婦)가 화(和)로써 하며 붕우(朋友)가 신(信)으로써 함은 만세(萬世)를 요풍(堯風)과 순화(舜化)에 비(比)하며 천지(天地)가 방위(方位)하고 만물(萬物)이 육성(育成)하니 참으로 성대(盛大)함이니 아아! 그러므로 그 의미를 식득(識得)함이 심중(深重)하다. 그리고 풍상(風霜)을 누경(累經)하여 동얼(棟臬)이 퇴패(頹敗)된지 오래되어 사림(士林)의 한(恨)이 되었으나 다행이 송후결도(宋侯燦道)가 군수(郡守)에 취임(就任)하여 이에 개탄(慨嘆)하고 향중(鄕中)의 사림과 중수(重修)의 의논(議論)을 제발(齊發)하고 첨원(僉員)에게 모의(謀議)하며 이에 구습(舊習)을 인(因)하여 그 경오(傾杇)됨을 보신(補新)하며 그 단청(丹靑)을 익신(益新 )하여 월중(月中)에 흘공(訖工)하니 이에 이 신루(新樓)에 올라 원방(遠方)을 바라보니 운연(雲烟)이 개색(改色)하고 일월(日月)이 증광(增光)함이다. 후인(後人)은 후(侯)와 동의(同意)하여 이어 보수(補修)하고 영세(永世)토록 윤환(輪奐)하면 풍화(風化)에 보조(補助)됨이 있으리라.
추분절 이종환(李宗煥) 삼가 쓰다.
  군수 송찬도(宋燦道)
  직원 이종환(李宗煥)
  장의 구순조(具純祚)
  감독 리진협(李鎭協)
          허  연(許  嚥)
          최원진(崔元鎭)
  유사 김형대(金炯大)

 

鐵城鄕校風化樓重建記
聖門必曰升堂而入室 造詣之工 豈非由人 德之門乎 韓子曰由是而之焉之謂道 道若大道然 有道必有門 庠序有門 以來學者 亦豈非能 近取譬乎 鐵城爲縣 介在南海 距京師千里 而遠風草之化 恐有未周 而惟彼尊 奉孔氏一如中州人士賴以依歸 敦朴禮讓粗有可述 其可尙己 而聖人餘敎不云小矣 但廟宇巋然門無設焉 不知興廢在何年而一方之咨嗟䆮久 齋儒崔生光寲 倡于章甫慨然 爲己任繕材鳩工謀 所以作之今百有七十餘日 而功告訖 門置三閾上爲樓扁之 以風化實仍 舊額而字義大哉 南服荒陬 宣化是先尤 豈非宗吾道 而樂興人爲善乎 克復旣闕之制 開道趨向之方 而深得風化之旨者 余於崔生重以是多之功 成之日燕 以落之庭輳衣冠 而試之崔生尸之而爲之請也 屬余文以記之 余固無辭略言願末 以志斯門之幸 可見素王風化如水在地 而抑有感於廢興之有時己記之者誰也 太守驪興閔昌烈也
崇禎紀元後 三甲午 九月 上澣 揭(一七七四年)

 

철성향교풍화루중건기(鐵城鄕校風化樓重建記)
성문(聖門)에는 반드시 승당(升堂)하여 입실한다고 하나니 조예(造詣)의 공이 어찌 덕으로 들어가는 문을 거치지 않을 수 있으랴. 한자(韓子)는 말하기를 이것을 거쳐서 가는 것을 도라고 한다 하였으니 도는 큰길과 같은 것이다. 길에는 반드시 문이 있으니 상서(庠序)에 문이 있어서 배우는 이들을 오게 한다는 것은 잘 비유한 것이 아닌가. 철성(鐵城)의 고을은 남쪽 바다에 있어서 서울과 천리나 멀리 떨어져 있다. 풍초(風草)의 교화가 두루 미치지 못항 염려가 있으나 공씨(孔氏)를 높이 받드는 일만은 중국 사람과 같아서 선비들이 모여들며 예양(禮讓)이 돈독하여 그런대로 서술할만한 것이 있으니 가상할 뿐더러 성인(聖人)의 가르침이 끼친 여파도 적다할 수 없다. 그런데 묘우(廟宇)만 우뚝 솟아 있고 문이 설치되지 않았으니 어느 해에 세우고 없어졌는지 모르지만 온 지방 사람들이 탄식한지 제법 오래 되었다. 재(齋)에 유생 최광의(崔光寲)가 장보(章甫)들에게 주장하여 개연히 자기의 임무로 삼고 재복을 고치고 공사를 모아 지으려고 꾀한지 이제 170여일이 되어 일을 마쳤다. 문에다 세 곳의 문지방을 설치하고 위로 다락을 만들어 풍화루(風化樓)라 편액을 적었다. 사실상 옛 편액이로되 글자의 뜻이 크도다. 남녘 먼 지방에 교화를 베푸는 것을 앞세웠으니 어찌 우리의 도를 종지로 하고 사람들과 더불어 좋은 일 하기를 좋아함이 아니겠는가. 이미 없었던 체제를 능히 복구하여 따라갈 방향을 열어 주고 길이 풍화(風化)의 뜻을 얻은 것은 나의 최생(崔生)에게 거듭 공이 많았다고 하겠다.
공사를 완성한 날에 잔치하고 낙성하니 뜰에 의관(衣冠)을 정제한 선비들이 몰려와서 최생(崔生)을 시위(尸位)에 앉히고서 청하기를 나에게 글을 지어 기록하라고 하였다. 내 굳이 사양할 수 없어서 그 전말을 대략 말함으로써 사문의 다행함을 기록하노니 소왕(素王)의 풍화가 물이 땅에 있는 것과 같음을 볼 것이며 또한 흥폐의 시기가 있음에 감동할 뿐이다. 기록하는 이는 누구인가 태수인 여흥(驪興) 민창열(閔昌烈)이다.
숭정기원후 삼갑오 구월 상한 게판(1774년)

 

출처
고성향교지-고성향교지편찬위원회/대보사(2002.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