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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명륜당의 명륜당기와 명륜당상량문 明倫堂上樑文

천부인권 2020. 6. 20. 06:00

2018.3.16. 성균관 명륜당明倫堂 모습

성균관 명륜당 대청 위에는 많은 편액들이 달려있다. 그 중에서 명륜당을 설립한 이유를 담은 명륜당기明倫堂記가 있어 먼저 소개를 하고 편액으로 남지는 않았지만 명륜당상량문明倫堂上樑文 역시 글로 남아 있어 명륜당의 역사를 전하고 있다.
명륜당에 남은 편액들은 당대 최고의 경지에 오른 문장과 글씨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성균관 방문 때마다 하나씩 읽어 보기도 하지만 능력의 부재로 항상 아쉬움을 뒤로하고 왔다. 지금이라도 살펴보고 공부할 기회를 가진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명륜당明倫堂 편액

【고전원문-무명자집-無名子集 詩稿 册二 / 泮中雜詠。二百二十首】 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明倫堂後岡,有萬松蒼欝,世呼“碧松亭”。其下卽明倫堂,後壁上揭三箇金字,是朱子筆。前簷又揭朱之蕃墨字,而詩不及之


명륜당(明倫堂) 뒤의 언덕은 만 그루의 소나무가 울창하여 세상에서 벽송정(碧松亭)이라고 부른다. 그 아래가 곧 명륜당이다. 명륜당 안쪽 뒷벽에 황금색으로 된 세 글자의 편액이 걸려 있는데, 바로 주자(朱子)의 글씨이다.명륜당 앞 처마 밑에는 또 주지번(朱之蕃)이 쓴 먹색 글자로 쓰여진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이 시에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碧松亭下明倫堂 / 벽송정 아래 명륜당 앞에는
槐杏雙雙儼作行 / 회화나무와 은행나무가 짝지어 가지런히 늘어섰네
黃金大字留華扁 / 황금빛 큰 글자가 아름다운 편액에 남았으니
筆法森嚴仰紫陽 / 엄정한 필법 보며 자양 부자(紫陽夫子) 우러르네

 

명륜당기 明倫堂記

明倫堂記 成侃撰
我太祖卽位之某年。設國學於東北隅。凡經營,指計,規模,制度。咸底厥宜。無一不完。大略南爲廟。廟左右。有廡。廟主祀先聖。而廡祀先師。國之故典焉。東爲正錄所。其南爲廚。又其南爲食堂。廟北兩旁。引長廊。廊之北。高其基。左右夾室而中爲堂。以爲師生講勸之所。是謂明倫也。館爲屋大小。計凡九十有六。而獨是堂。與聖廟爲最尊。攻斸純締構堅。隆然其高也。奐然其新也。學官大司成以下凡幾人。大昕。鼓徵諸生。列于庭下。一揖之後。升是堂。執經論難。講之爲君臣焉。講之爲父子焉。講之爲長幼焉。講之爲夫婦朋友之道焉。揉而熟之。箴之翼之。時其動息而弛張之。日漸月漬。磨勵變化。他日。將爲忠臣爲孝子於國於家者。必將林林焉而出。吁。其盛矣。自我東國以來之所未有也。或曰。聖人之敎。亦多端矣。名是堂獨以明倫。何也。曰。父子也。君臣也。夫婦也。長幼也。朋友之交也。本諸天理之固然。窮天地而始終。夫人之爲道。豈有大於此乎。曰夏,曰商,曰周之校序庠學。無非所以明此倫也。人倫明於上。庶民親於下矣。夫子大聖也。數仞之墻。得其門而入者。其亦寡矣。然求其所以爲聖人。不過能盡之而已。故曰。聖人人倫之至也。是猶規矩之盡方圓。斸不可毫未加也。秦,漢以來。正學不傳。申韓以毁之。老莊以淫之。而倫始不明。訓詁之拘拘。詞章之嘐嘐。而倫全不明。其異於物者。幾希。嗚呼。可不惜哉。今之遊於斯。陟降於斯者。覩其名而知其義。非徒知其義。抑亦允蹈其實。以無負聖朝長育之意。斯可矣。若其功夫節目。雖未可以一言盡觸。類而長之。亦不出是堂之內。上宇下棟。尊臨卑也。背幽向明。內別外也。自門而堂。自堂而奧。循循乎等威之不可躐。燭燭乎東西之不可迷。如是求之。庶乎其得矣。
崇禎紀元後 再癸巳五月日 趙正緖書

 

명륜당기 明倫堂記-성간成侃 짓다.
우리 태조께서 즉위하신 어떤 해에 국학(國學)을 동북의 구석에 설립하였는데, 그 경영ㆍ설계와 규모ㆍ제도가 모두 적의하게 되어 하나도 완전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대략을 들면 남으로 묘(廟)를 만들고 묘의 좌우에 무(廡)를 두어 묘에는 선성(先聖)을 제사하고, 무에는 선사(先師)를 제사하는 것이 나라의 옛 전통이요, 동에 정록소(正錄所)를 만들고, 그 남으로 주(廚)를 만들고, 또 그 남으로 식당을 만들고, 묘(廟)의 북쪽 양 옆으로 장랑(長廊)을 만들고, 낭(廊)의 북쪽에 그 터를 돋우어 좌우로 협실을 두고, 중간은 청을 만들어 선생과 제자의 강학하는 장소를 만들었으니, 이를 명륜당(明倫堂)이라 이른다. 관의 옥(屋)이 대소를 합하여 무릇 96간인데, 유독 이 당이 성묘(聖廟)와 더불어 가장 높아서 치목(治木)도 정하고 구조도 튼튼하며, 우뚝하고 높으며 찬란하고 새롭다.
학관(學官)은 대사성(大司成) 이하 무릇 몇 사람인데, 이른 아침에 북을 울리어 제생(諸生)을 불러 뜰 아래 도열시키고, 한 번 읍한 다음에 이 당에 올라 경(經)을 가지고 논란하며, 군신(君臣)의 도를 강론하고, 부자(父子)의 도를 강론하며, 장유(長幼)의 도를 강론하고, 부부(夫婦)와 붕우(朋友)의 도를 강론하여, 익혀서 익숙하게 하고, 경계하고 격려하며, 움직이고 쉬는 때를 따라서 조이고 늦추어, 날로 진보하게 하고 달로 젖게 하여 연마해서 변화하게 하니, 훗날에 장차 나라에 충신이 되고 집안에 효자가 될 자가 반드시 쏟아져 나올 것이다. 아, 거룩한 일인 동시에 우리 동방에 일찍이 없던 일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성인의 가르침이 또한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유독 명륜(明倫)으로써 이 당을 이름한 것은 무엇인가.”라고 하지만, 부자나 군신이나 부부나 장유나 붕우의 사귐은 본래 천리(天理)의 당연한 것으로써 천지가 다하도록 시종을 같이 하는 것이니, 사람으로서 할 일이 어찌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겠는가. 하(夏) 나라나 상(商) 나라나 주 나라의 상서(庠序)가 모두 이 윤리를 밝히자는 것에 불과하다. 인륜이 위에서 밝아지면 서민이 아래에서 친하게 되는 것이다. 공자는 대성인이시니 몇 길이나 되는 성인의 담장 안 문에 들어가는 자가 또한 적었다. 그러나 그 성인이 된 이유를 찾아보면 능히 인륜을 다한 것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성인은 인륜의 지극한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규구(規矩)가 방원(方圓)에 극진하여 털끝만큼도 더 깎아 낼 수 없는 것과 같다. 진(秦)ㆍ한(漢) 이래로 바른 학문이 전해지지 않아 신한(申韓)으로써 허물어지고 노장(老莊)으로써 음탕해져 인륜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였고, 자구의 해석에만 얽매이는 훈고(訓詁)의 학문과 문자의 수식에만 신경쓰는 사장(詞章)의 학문으로써 인륜이 전혀 밝혀지지 못하였으니 동물과 다른 것이 거의 드물다. 아,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지금 이 당에 놀고 이 당에 오르내리는 자는 그 이름을 보면 그 뜻을 알아야 하며, 한갓 그 뜻만 알 것이 아니라 또한 그 실제를 이행하여, 성조(聖朝)의 장육(長育)하는 뜻을 저버림이 없게 하면 이로써 되는 것이다. 그 공부의 절차로 말하면 비록 한마디 말로 다할 수 없으나, 같은 유에 미루어 나간다면 또한 이 당의 안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상우(上宇)와 하동(下棟)은 높음으로써 낮은 데에 임한 것이고, 어둠을 등지고 밝음을 향한 것은 안과 밖을 구별한 것이고, 문으로부터 당으로, 당으로부터 아랫목으로 가게 한 것은, 등위(等威)를 무시해서는 안 되고 동서(東西)의 구분에 희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구하면 거의 얻게 될 것이다.
1653년 5월 일 조정서趙正緖 글씨를 쓰다.

 

明倫堂上樑文-李廷龜
聖人百世師也。旣賀聖廟之一新。學則三代共之。載見學舍之重煥。於斯爲盛。于古有光。眷茲泮宮。寔惟勝境。三山鼎峙。秀出文筆之峯。二水環流。自成泮璧之制。杏壇幽敞。想闕里之遺風。槐市蔥籠。接上林之佳氣。殆天作而地設。應鬼護而神慳。恭惟我朝奎開文治。日昌煕運。謹庠序之敎。勞來輔翼。又從而振德之。重賢士之關。直溫寛栗。皆所以明倫也。逮我聖上。治本儒術。學傳道宗。作之君作之師。是謂人倫之至。敎以詩敎以禮。式闡風化之源。司成館祭酒堂。絃誦之聲洋洋在耳。胄子監上舍選。俊髦之士藹藹登朝。云何兵燹之慘經。幸値文運之光復。廟宇纔備。咸喜瞻依之有歸。黌舍猶墟。其奈講劘之無所。衿袍尙依於墻壁。函丈久設於蓬蒿。必待百年而興。正屬亨嘉之會。不可一日無敎。寧緩修擧之方。惟其人心所同然。若有神物之相者。苟合矣苟完矣。意實在於無華。美輪焉美奐焉。功已成於不日。從此大庇寒士。不翅廣廈千萬間。於焉樂育英才。嗟哉吾黨二三子。作新風采。聳動觀瞻。匠氏告成。兒郞贊偉。
抛梁東。洙泗千秋宗派通。道體流行元一氣。汪洋璧水振文風。
抛梁西。斯文一柱與天齊。高堅氣像重瞻仰。直到眞源路不迷。
抛梁南。明庭松檜儼相參。冠童暇日整春服。風浴歸來見二三。
抛梁北。巍然華扁可矜式。歸而求則有餘師。會見吾心一太極。
抛梁上。奎璧光涵太平象。玉燭吾東看泰來。文猷粲然明天壤。
抛梁下。惟忠惟孝大倫也。明之惟在復其初。看取虛靈不昧者。伏願上梁之後。眞儒輩出。道學大明。摳衣叩篋而升者。盡是台輔之才。執經倚席而講者。皆負山斗之望。東序西膠。夏絃秋誦。明吾心固有之天。學顏志尹。家程戶朱。續斯文不傳之緖。

 

명륜당상량문 明倫堂上樑文-이정구李廷龜
성인은 백세(百世)의 스승이라 이미 성묘(聖廟)의 면모가 일신한 것을 경하(慶賀)하고, 학교는 삼대(三代)의 교육 기관이라 학사(學舍)가 중건된 것을 보노니, 지금에도 성대한 일이요 옛날에도 빛나는 일이로다. 이 반궁(泮宮)을 보니 실로 승경(勝境)이라 삼산(三山)이 솥발처럼 솟으매 문필봉(文筆峯)이 우뚝하고 이수(二水)가 휘감아 돌아 절로 반벽(泮璧)의 제도를 이루도다. 행단(杏壇)이 그윽하고 넓으매 궐리(闕里)의 유풍(遺風)을 상상하고 괴시(槐市)가 짙푸른 빛이라 상림(上林)의 가기(佳氣)와 잇닿았으니, 아마도 천지신명이 만들어 놓은 곳이라 응당 귀신이 아끼고 보호하리라.
삼가 생각건대, 아조(我朝)는 문치(文治)를 크게 열어 국운이 날로 융성하였다. 이에 상서(庠序)의 교육에 삼가 주력하여 위로하고 오게 하고 도와주고 이끌어 주고 또 이어서 깨우쳐 주고 은덕을 베풀어 주었으며 현사(賢士)의 관문을 엄중히 하여 정직하고도 온화하며 너그럽고도 엄한 것이 모두 인륜(人倫)을 밝히는 가르침이로다. 우리 성상에 이르러서는, 정치는 유술(儒術)에 근본을 두고 학문은 도의 정종(正宗)을 이어받아서 임금이 되고 스승이 되니 이는 인륜의 지극함이라 하겠고, 시(詩)를 가르치고 예(禮)를 가르치니 이에 풍화(風化)의 근원을 밝혔어라. 사성관(司成館)ㆍ좨주당(祭酒堂)에는 글 읽는 소리가 귀에 가득 울려 퍼지고 주자감(胄子監)ㆍ상사선(上舍選)에서는 영준한 많은 선비들이 조정으로 등용되었네.
그런데 어찌하여 참혹한 병화(兵火)를 겪었단 말인가. 그러나 다행히 문운(文運)이 다시 밝아지는 시대를 만났도다. 묘우(廟宇)가 겨우 갖추어지매 모두 우러러 의지할 곳이 있게 되었음을 기뻐하였으나 학궁(學宮)이 아직도 폐허이니 강학(講學)할 곳이 없음을 어이하리오. 선비들은 아직도 담장에 기대어 섰고 강석(講席)을 잡초 속에 차린 지 오래였네. 반드시 백 년을 기다려야 흥성하리오? 바로 중흥의 시운(時運)을 만났도다. 하루도 교육이 없어서는 안 되니, 학교를 중수하는 일을 어찌 늦출 수 있겠는가. 모든 사람의 생각이 다 같은지라 마치 신명(神明)이 도운 듯 공사를 쉽게 마쳤네. 무리하게 규모를 갖추지 않았으니 뜻이 화려하지 않은 데 있었고, 저토록 번듯하고 아름다운 건물이 짧은 시일에 완공되었네. 이제 한사(寒士)들이 들어가 쉴 곳이 있게 되었으니, 넓은 집 천만 칸보다 낫도다. 여기에서 영재를 교육하리니, 아아, 우리 젊은이들이여. 새로운 자세를 갖추고 정신을 가다듬어 우러러보라.
목수가 공사를 마치니 아랑위(兒郞偉) 노래 우렁차도다.

들보를 동쪽으로 던져 올리니 / 抛梁東
천추의 수사와 종파가 통하도다 / 洙泗千秋宗派通
도체의 유행은 원래 한 기운이니 / 道體遊行元一氣
드넓은 벽수에서 문풍을 떨치리라 / 汪洋璧水振文風

들보를 서쪽으로 던져 올리니 / 抛梁西
사문의 한 기둥 하늘 높이 솟았도다 / 斯文一柱與天齊
높고 굳은 기상을 거듭 우러러보노니 / 高堅氣像重瞻仰
곧바로 진원에 이르고 길 헤매지 않으리 / 直到眞源路不迷

들보를 남쪽으로 던져 올리니 / 抛梁南
밝은 뜰에 솔과 회나무 엄연히 솟았도다 / 明庭松檜儼相參
어른 아이 한가한 날 봄옷을 차려입고 / 冠童暇日整春服
바람 쐬고 목욕하고 오는 이 두서넛 보여라 / 風浴歸來見二三

들보를 북쪽으로 던져 올리니 / 抛梁北
우뚝 높은 편액의 뜻 본받을 만하여라 / 巍然華扁可矜式
돌아가 찾으면 얼마든지 스승 있으리니 / 歸而求則有餘師
내 마음에 하나의 태극을 반드시 보리라 / 會見吾心一太極

들보를 위로 던져 올리니 / 抛梁上
규벽의 광채가 태평의 기상 머금었도다 / 奎壁光涵太平象
옥촉이 동방을 비춰 좋은 세상 오리니 / 玉燭吾東看泰來
찬연한 문헌이 천지 사이 환히 밝히리라 / 文獻粲然明天壤

들보를 아래로 던져 내리니 / 抛梁下
충과 효는 사람의 큰 윤리로다 / 惟忠惟孝大倫也
밝히려면 처음을 회복해야 하니 / 明之惟在復其初
허령불매한 나의 본성을 보라 / 看取虛靈不昧者
삼가 바라건대, 상량한 후로 진유(眞儒)가 많이 나오고 도학(道學)이 크게 밝아져, 경건한 자세로 강당에 오르는 학생은 모두 재상이 될 재목이고 경전을 잡고 강론하는 스승은 모두 태산북두의 명망을 지닌 학자이며, 동서의 강당에는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아 고유한 천성을 밝히며, 안자(顔子)의 학문을 학문으로 삼고 이윤(伊尹)의 뜻을 뜻으로 삼으며 가가호호(家家戶戶) 정주(程朱)와 같은 현인이 나와서 끊어진 사문(斯文)의 맥을 잇게 되기를 바라노라.

 

명륜당 내부 영역에서 본 동재

【고전원문-무명자집-無名子集 詩稿 册二 / 泮中雜詠。二百二十首】 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東西上下齋,通爲二十八房。最下各二間爲下齋,下齋東西各十人。東齋東向,西齋西向,每房後面爲廣窓,井井相對。

 

동재(東齋)와 서재(西齋)의 상재(上齋)와 하재(下齋)가 통틀어 28개의 방이다. 맨 아래의 동재ㆍ서재 각 두 칸이 하재인데, 하재에는 동재와 서재에 각기 10인씩 거주한다. 동재는 동향이고 서재는 서향이다. 방마다 뒤쪽에 넓은 창이 있어, 동재와 서재의 창이 가지런히 서로 마주하고 있다.

 

明倫堂下東西齋 / 명륜당 아래의 동재와 서재는
廿八房窓互對排 / 스물 여덟 방의 창문 서로 마주 보게 배치됐네
進士生員居上舍 / 진사와 생원은 윗방〔上舍〕에 거처하고
下齋二十自相偕 / 하재생(下齋生) 20명은 따로 함께 거처하네

 

以下詠齋中諸節及食堂故事。

재사(齋舍)의 여러 가지 규정과 식당의 옛 정례(定例)

 

○藥房,東齋最上房名。其西窓外懸鼓,每日未明鼓之,呼“起寢”,又打三鼓,呼“洗水”。
약방(藥房)은 동재(東齋)의 맨 윗방 이름이다. 그 서쪽 창밖에 북을 매달아 두고, 매일 새벽 날이 채 밝기 전에 북을 치면서 “일어나시오!”라고 외치고, 또 세 번 치면서 “세수하시오!”라고 외친다.

 

藥房窓外鼓高懸 / 약방의 창밖에 북을 높이 매달고
每日鼕鼕欲曙天 / 매일 새벽 여명에 둥둥둥 울리네
起寢一聲纔罷後 / “일어나시오!” 한마디가 끝나자마자
更呼洗水兩齋傳 / “세수하시오!” 외침 다시 양재(兩齋)에 전해지네

 

명륜당 내부 영역에서 본 서재

以下詠儒生游居之所。○東西齋,每二間爲一房。東齋第一房曰“藥房”,其次曰“右第一房”,其次曰“掌議房”,其次曰“進士間”,其次曰“下一房”,其次曰“下終房”,其次曰“下齋”。西齋第一房曰“西一房”,其次以下竝與東齋同稱。儒生入居者,必尋其所親,與之同處。或出居泮村與享官廳


동재ㆍ서재는 방 하나가 두 칸씩이다. 동재의 첫째 방을 약방(藥房)이라 하고, 그 다음을 ‘오른쪽 첫째 방〔右第一房〕’이라 하고, 그 다음을 장의방(掌議房)이라 하고, 그 다음을 진사칸〔進士間〕이라 하고, 그 다음을 ‘아래 첫 방〔下一房〕’이라 하고, 그 다음을 ‘아래 끝 방〔下終房〕’이라 하고, 그 다음을 하재(下齋)라고 한다. 서재의 첫째 방은 ‘서재 첫 방〔西一房〕’이라 하고, 그 다음부터는 모두 동재와 명칭이 같다. 재실에 들어오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과 친한 사람을 찾아 함께 거처한다. 어떤 유생은 반촌(泮村)이나 향관청(享官廳)으로 나가 거처하기도 한다.

 

二十八房各有稱 / 스물여덟 방에 각기 명칭이 있고
房房儒士共儕朋 / 방마다 친한 유생끼리 함께 거처하네
少年或爲工夫地 / 젊은 유생들은 더러 공부할 곳을 찾아
僻靜泮村占得恒 / 외지고 조용한 반촌에서 늘 지내네

 

출처 및 참조
한국고전종합DB-고전원문-동문선-東文選卷之八十二/成均館記-成侃
한국고전종합DB-한국문집총간-월사집-月沙先生集卷之四十一/明倫堂上樑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