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강공 천표명 병서 學生姜公阡表銘并序
學生姜公阡表銘并序
余凤交姜君允瑞東秀。壬戍夏。二君訪余鳳林室東秀。請其先考晩堂公阡上之文曰。吾父有至行。不忍泯没。願得秉管君子一言。以光來世。以狀出眎。允瑞傍助而固其請曰。是狀也。約而無濫。子信而爲徵。余不得辭。而按其狀。公諱秉祚 字奉準。晚堂。其號也。姜氏其先。晋陽人。以高麗兵部尚書殷烈公諱民瞻。爲上祖。自後赫舃。爲東方著姓。六傳。元鑑。太子詹事。五傳。元啟。三重大匡典法判書。佐翼功臣。三傳。勗。封晋川君。入李朝。曰安重。曰琯父子。幷爲翰林。琯子應台。歷典翰大司成。以忠孝。蒙旌。享臨川院。學者稱誠齋先生。傳至諱一齋號瞑齋。自州東白也村。移居樞洞。於公。間八世。曾祖曰水竹亭文伍。重齋金先生。銘其墓曰。温維基德維儀。素乎履。行無詭。祖曰錫字。有質行。考諱在善。號樞溪。妣達城徐氏。父聖淳。以高宗丁亥四月六日。生公于樞洞世第。儀形瑞秀。性温而資淳。自幼少。未嘗肯與人争。不言之過誤。受學于家庭。早馴程課。不待督責 而自知勉勵 甚得長者稱譽。弱冠。槩涉經史諸家。旣而。見父公。從士友遊。不遑家事。乃專担幹務。勤身節蓄。產業利治增田潤藏暇則温理舊書。於是。事二親。志體之養。俱到。無愛四弟四妹。俾各成立。及中身。母徐氏。不幸病兩眼數年。公竭誠求治。百藥無售。竟至失明號天而痛曰。吾母之至此也。自後。寢席起臥。門户出入。飲食匙著。以至便廁盥沐。無不扶將。而承奉之告聞見。以破閒。供談笑。以慰悅。如是三十年。始終無懈。鄉里皆嗟歎。以爲不可及。及丁外内艱。哀痛。多感人流涕。三年。禮持甚嚴。人稱善居喪。又孝及于追遠。策勵諸弟群從。重建曾王考水竹亭于里中。其範圍經略則。諮詢于三從叔寢郞在傳氏。記文則謁得晦峯河先生。規模之縉密。又如此。於是。士友之來訪者日滋。咸稱公考事之出人。以年七十二之戊戌五月二十六日終。葬樞洞鼎洞峴先塋下乾坐。配。金寧金氏。麗聲女。忠毅公白村文起后。有至行。舅病。吮瘡致效。與夫始終。始患至誠。傳聞閭里美談。後公十一年而卒。壽八十一。墓在樞洞石洑山甲坐原。生二男。東秀東哲。四女適新安朱宰寬。密陽朴鍾述。綾城具滋彧。晋陽河龍淵。東秀四男。尚壎正壎龍壎鍾壎東哲。四男。孟壎仲壎昌壎海壎悔。餘不錄。銘曰
人於百行。惟孝爲。源懿哉姜公。月朝有論。卅載萱堂。母眼病昏。扶將起卧。出入庭闈。至誠洞屬。夙夜無違。不有其躬。親體則安。于以追遠。竹舍清閒。遐邇交訪。頌言紛紛。我辭有徵。庶賁千春
학생 강공 천표명 서문을 아울러
내가 일찍이 강윤서 강동수 군과 교유하였는데 임술년 여름 두 군이 나의 봉림서실을 방문하여 동수가 그의 선고 만당(晩堂)공의 묘상지문을 청하면서 하는 말이 “우리 부친이 지극한 행실이 있어 차마 없어지게 할 수 없어 붓대를 잡은 군자의 한 말씀을 얻어 내세에 빛을 내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면서 家狀을 내보였다. 윤서가 곁에서 도우면서 굳이 청하면서 말하기를 “이 글은 요약되어 무람없습니다. 선생님께서 믿으시고 징험해 주십시오.”라 했다. 내가 사양을 얻지 못하여 그 글을 안념해보니 공의 휘는 병조(秉祚)이며 자는 봉준(奉準)이며 만당(晩堂)이 그 호이다. 강씨의 그 선대는 진양인 이다. 고려 병부상서 은열공 휘 민첨(民瞻)이 上祖가 되며 이후로 빛나는 벼슬로 동방에 드러난 성씨가 되었다. 6대를 내려와 원감(元鑑)은 태자 첨사요 5대를 내려와 원계(元啓)는 삼중대광 전법판서 좌익공신이다. 三傳하여 욱(勗)은 晉州君에 봉해졌다. 이조에 들어와서 안중(安重) 관(琯) 父子는 나란히 翰林이며 琯의 아들 응태(應台)는 典翰大司成으로 충효로 정려(旌閭)를 입어 임천원에 배향되어 학자들이 성재(誠齋) 선생이라 일컫는다. 傳하여 휘 一齋 호 명재(瞑齋)에 이르러 고을의 동쪽 백야촌에서 추동으로 移居하니 공과 8대 사이 이다.
증조는 水竹亭 문오(文伍)이며 重齋 김선생이 그 墓碣銘에 온유로 기초로 하여 德의 거동으로 실행을 평소로 했다. 행동에는 속임이 없었다.
祖父 휘 석우(錫宇)는 질박한 행실이 있었으며 父親 휘 재선(在善)이며 호는 추계(樞溪)이다. 모친은 달성서씨로 부친이 성순(聖淳)이다. 고종 정해(丁亥 1,887.) 4월 6일에 추동 세재에서 공을 낳으니 몸가짐이 단정하고 수려하고 성품은 따뜻하면서 바탕이 순수하여 어려서부터 일찍이 남들과 다툼을 기꺼이 하지 않았고 남들의 잘못에는 말하지 않았다. 가정에서 受學하여 일찍 課程에 순치되어 재촉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부지런히 힘쓸 줄 알아서 심히 어른들의 칭찬과 영예를 얻었다. 약관에 경사와 제자백가의 大槪를 섭렵하고 얼마 후 부친공이 士友를 따라 교유하여 가사에 돌볼 겨를이 없음을 보고 이내 主幹을 전담하여 몸을 부지런히 하고 절약 저축하여 산업을 이롭게 다스리니 전답이 늘어나고 간직한 것이 윤택하였다. 틈이 나면 옛날 책을 복습하여 정리하고 이에 양친을 지체 지양으로 섬기고 모두 이르게 하였다. 네 아우와 네 누이를 어루만져 사랑하고 각기 그들로 하여금 이루어 세우니 중년에 미쳐 어머니 서씨가 불행하게 두 눈의 병으로 수년에 공이 정성을 다하여 치료를 요하니 온갖 약으로 치료할 수 없어 마침내 실명에 이르렀다. 하늘에 울부짖어 통곡하여 말하기를 “ 어찌 우리 어머니가 여기에 이르렀는가?” 이뒤로 잠자리를 일으키고 눕히고 문호를 출입과 음식에 수저와 뒷간과 목욕에 이르기까지 부축하고 받들지 않은 것이 없었고 보고 들은 것을 아뢰고 심심풀이로 談笑를 이바지하고 喜悅로서 이같이 30년을 게을리 않았다. 향리에서 모두 탄식하고 한탄하여 미칠 수 없다고 여겼다. 모친상을 당하여 애통하여 많은 사람을 감동케 하여 눈물을 흘렸고 삼년의 상례를 유지하기를 심히 엄하게 하였다. 사람들이 居喪을 잘하였다고 칭찬하였으며 또 효도 및 追遠에 여러 아우와 사촌형제 및 여러 조카들을 策勵하여 증조부 水竹亭을 마을 가운데에 重建하고 그 범위를 경영하고 다스려서 三從叔 침랑(寢郞: 陵參奉) 재전(在傳)씨에게 물어 의논하고 記文은 晦峯 河先生에게 여쭈어서 얻으니 규모가 치밀하기가 또 이와 같았다. 이에 사우들이 찾아오는 사람이 날로 불어나 모두 공이 일을 詳考함이 남보다 뛰어남을 칭찬했다. 나이 72세의 무술 5월 26일에 마쳤으니 추동(樞洞) 정동(鼎洞)고개 선영아래 乾坐에 장례하다. 배위는 김녕김씨 여성(麗聲)의 따님이다. 충의공 백촌 문기(文起)의 뒤다. 지극한 행실이 있으며 시아버지 병환에 종기를 빨고 효험을 이루었다. 남편과 함께 처음에서 끝까지 시어머니 병환에 지극한 정성으로 마을에 미담으로 알려졌다. 공보다 11년후에 돌아가시니 향수 81세이다. 묘는 추동(樞洞) 석복산 甲坐의 언덕에 있다. 두 아들을 낳으니 東秀 東哲이며 네 딸은 신안 朱宰寬 밀양 朴鍾述 능성 具滋彧 진양 河龍淵 에게 시집갔다. 동수의 네 아들은 상훈 정훈 용훈 종훈이며 동철의 네 아들은 맹훈 중훈 창훈 해훈이다.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명하기를
사람은 百行에 오직 孝가 근원이 된다.
아름답도다. 강공이여!
월조(越朝: 人物評)에 논의가 있었으니 삼십년의 훤당(萱堂: 慈堂)이다. 어머니는 눈병으로 어두우니 부지하여 일으키고 눕혔다.
정위(庭闈: 衡門)의 출입에 지성으로 통촉(洞屬)했다
주야로 어김이 없으니 그 몸은 있지 아니하였다.
아버지의 몸이 곧 편안하니 추원(追遠)으로 간여(干與)했다.
대나무집이 맑고 한가하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서로 찾아온다.
칭송하는 말이 紛紛하니 내 말에 징험이 있으면 거의 千春을 구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