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운대 다대진 동헌과 정운공 순의비 탐방
아미산 응봉봉수대에서 친구와 산책 온 그 동네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다대진성 객사”를 찾으러 가니, 네비는 몰운대 주차장으로 안내를 했다.
다른 분들에게 물으니 객사가 몰운대 오른쪽 길을 따라가면 나온다는 말을 듣고 무작정 올랐더니 처음 출발지처럼 경사가 조금 있는 동헌 건물을 가기 전에 동래부사를 지낸 이춘원(李春元,1571∼1634)의 몰운대(沒雲臺) 시비가 있어 여기에 옮겨 둔다.
沒雲臺
浩蕩風濤千萬里 호탕한 바람과 파도 천만리로 이어지고
白雲天半沒孤臺 하늘가 몰운대는 흰구름에 묻혔네
扶桑曉日車輪赤 부상(扶桑)¹⁾의 새벽해는 붉은 수레바퀴처럼
常見仙人賀鶴來 언제나 신선은 학을 타고 나타나 오시네
九畹 李春元 朝鮮 宣祖 四十年 東萊府使
(구원 이춘원 조선 선조 40년 동래부사)
【주석】
부상(扶桑)¹⁾ : 산해경 해외동경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 또는 나무, 혹은 그 뽕나무가 있는 곳이라고 일컬어졌으며, 세상의 동쪽 지역 끝의 대명사라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우리나라를 일컬으며 특히 몰운대를 지칭한다.
계속 정상부를 향해 올랐더니 헬리콥터착륙장이 나타나고 위쪽을 쳐다보니 옛 건물이 보여 객사로 알고 안내판을 보니 객사가 아니라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다대진 동헌(多大鎭 東軒) 건물이다. 이곳은 사하구 다대동 산 144이며, 해발 높이는 45m, 좌표는 35°02'21"N 128°58'08"E를 가리킨다.
1972년 이 건물은 “다대포 객사”인 줄 알고 있어 객사를 나타내는 회원관(懷遠館) 현판을 붙이고 있었으나 2020년 동헌으로 알고 지금은 수호각(睡虎閣)이란 현판을 붙였다. “수호각(睡虎閣)”을 뜻대로 보면 “잠자는 호랑이 집”이라 볼 수 있는데 안내판에는 “용맹하고 굳건하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다대진 동헌(多大鎭 東軒)의 안내판의 내용을 옮겨보면
『다대진 동헌은 조선 후기 경상좌수영 산하 다대진의 관아 건물로 수군을 다스리던 무관직인 첨사가 업무를 보던 곳이다. 다대진성(多大鎭城) 안에 있던 관아 건물 가운데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다.
용맹하고 굳건하다는 뜻으로, 범에 비유하여 수호각(睡虎閣)이라 불렀다. 동헌의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순조 25년(1825)에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1895년 갑오개혁 이후 다대진이 없어지면서 방치되다가 1904년 다대포사립실용학교(현 다대초등학교)의 건물로 사용되었고 1970년 다대초등학교 운동장 공사 때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여 복원되었다.
건물 형태는 정면 5칸, 측면 2칸에 홑치마 팔작지붕이다. 지금은 칸의 구분 없이 하나의 공간으로 되어 있지만 원래는 왼쪽 1칸과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가운데 3칸은 우물마루를 깐 대청으로 추정된다.
1972년 6월 26일 “다대포 객사”라는 이름으로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그뒤 객사가 아닌 동헌이라는 주장이 대두하였고 2020년 7월 29일 부산시 문화재위원회 심의에서 “다대진 동헌”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고 기록했다.
동헌을 지나면 ‘몰운대’ 입석이 나오고 계속 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면 군사지역이 나오는데 이곳을 계속 지나면 동헌에서 약 500m 지점에 정운공순의비(鄭運公殉義碑)가 비각 안에 서 있다. 이곳의 좌표는 35°02'07"N 128°57'56"E이다.
부산광역시 기념물인 ‘충신 정운공 순의비(忠臣 鄭公運 殉義碑)’ 안내판은 아래처럼 기록하고 있다.
『정운공순의비는 임진왜란 때 부산포 해전에서 전사한 정운(鄭運: 1543~1592)장군²⁾의 공덕을 추모하기 위해, 조선 정조 22년(1798) 정운의 8대손인 정혁이 다대포 첨사로 왔을 때 세운 것이다.
정운 장군의 본관은 하동이며, 영암에서 태어나 1570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도로 출전할 것을 주장하여 옥포·당포·한산도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부산포 해전에서는 우부장(右副將)으로 출전하여 맨 앞에서 싸웠는데, 이순신 장군의 지휘 아래 일본 군함 500척과 싸워 100여 척을 격파하는 등 큰 승리를 거두었다.
비문에는 정운 장군이 수군 선봉으로 몰운대 아래에서 일본군을 만났을 때 몰운(沒雲)의 ‘운’자가 자기 이름의 ‘운(運)’과 음이 같다하여 이곳에서 죽을 것을 각오하고 싸우다가 순절하였다고 적혀 있다. <충장공실기>와 <충무공전서>에는 정운이 부산포 해전에서 순절하였다고만 기록되고 있다.
비석의 앞면에는 ‘충신정운공순의비(忠臣 鄭公運 殉義碑)’라는 8자가 적혀 있고, 뒷면에는 정운공의 순절 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은 이조판서 민종현이 짓고, 훈련대장 서유대가 글자를 썼다.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1974년 부산시에서 비각을 세워 비석을 보호하고 있다.』
【주석】
정운(鄭運: 1543~1592) 장군²⁾ : 정운(鄭運, 1543~1592) (임진 5. 1)의 자(字)는 창진(昌辰) 본관은 하동(河東). 시호(諡號)는 충장(忠壯). 훈련참군(訓鍊參軍) 정응정(鄭應禎)의 아들. 일찍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거산찰방(居山察訪)이 되었는데, 감사(監司)에게 미움을 받아 벼슬을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나가 경상도 웅천현감(熊川縣監)이 되었지만 곧 물러났고, 얼마 뒤에 해주판관(海州判官)이 되었을 때도 역시 목사(牧使)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그는 다만 어디서나 강직하고 정의를 지키기 때문에 그 같은 불행을 스스로 샀던것이다. 그러기에 해주에서 돌아올 적에도 망아지 새끼 한 마리도 같이 싣고 오는 것이 없어 모든 사람들이 그의 맑고 깨끗한 행실을 칭송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몇 해 동안 벼슬하지 아니하고 있다가 1592년(임진)에 녹도만호(鹿島萬戶)가 되었더니, 마침 큰 전쟁이 벌어지자 그는 좌수사인 이순신에게로 달려가 전라도 여러 장수들과 같이 회의하는 석상에서도 나가 싸우는 것을 극력 주장하였다. 옥포·당포·한산 해전 등에서 매양 선봉에 서서 큰 공로를 거두었으며, 부산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뒤에 조정에서는 그에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추증하고 다시 병조참판(兵曹參判)을 가증(加贈)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순의(殉義)한 정운 장군에 대한 장계는 1592년 9월 11일에 올리는데 원문에는 제목이 없고 ‘정운추배이대원사장(鄭運追配李大源祠狀)’이란 제목은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³⁾에 나온다.
아래의 원문과 해문은 「충무공 이순신 전집 3」의 내용을 옮겨 둔 것이다.
[原文]
鄭運追配李大源祠狀
承政院開坼 資憲大夫 具銜 臣 李
鹿島萬戶鄭運亦 恪謹職事 兼有膽略 可與論難 而起變以來 激發義氣 爲國忘 身 念不少弛 勤於邊事 猶倍前時 臣之所恃者 只此鄭運等二三人是白如乎 三度 戰捷 每每先登 節釜山大戰時段置 輕身忘死 先突賊巢 終日交戰 力射猶返 賊不 敢動 寔運之力 而當其回帆 中鐵丸致死爲白有臥乎所 凜氣精靈 空自泯滅 未聞 於後世爲白乎去 極爲慘痛 初亦李大源洞室 尙在其浦是白良尔 招魂同榻 設寞供 饗 一慰義魂 一警他人敎是白齊 防踏僉使李純信段 盡瘁邊備 變後愈勤 四度討 賊 必先舊擊 至於唐項浦接戰時 射斬倭將 其功超等叱分不識 只力射殺 不務斬 頭緣由 各別褒啟爲白有如乎 節褒賞之文 獨不參純信之名爲白有如乎 軍情駭怪 爲白置 諸將中如 權俊李純信魚泳潭賽興立鄭運等段 別有所恃 期與共死 而每事 同論劃計爲白如乎 權俊以下諸將 皆陞堂上 唯此純信 未蒙天恩乙仍于 伏埃朝廷 宣褒之命為白去乎 詮次以善啟向敎是事
萬曆二十年九月十一日
[해문]
정운을 이대원 사당에 배향해 주기를 청합니다
승정원(承政院)⁴⁾에서 직접 열어 보십시오. 자헌대부 전라좌도수군절도사⁵⁾ 이순신
녹도 만호 정운(鄭運)은 맡은 직책에 정성을 다하였고, 또 담략이 있어서 서로 의논할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왜란이 일어난 뒤로 줄곧 의기(義氣)를 심하게 뿜어내어 나라를 위해서 제 몸을 잊고 조금도 마음을 놓지 않고 변방을 지키는 일에 힘쓰기를 오히려 전보다 갑절이나 더하였습니다.
신이 믿는 사람은 오직 정운 등 2~3명이었습니다. 이 앞의 세 번이나 승첩했을 때에도 언제나 앞장서서 나갔으며, 이번 부산 싸움에서도 제 몸을 생각지 않고 죽음마저 잊고서 앞장서서 왜적의 소굴로 돌입하였습니다. 하루종일 교전하면서도 어찌나 힘을 다하여 활을 쏘았던지, 왜적들이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오로지 정운의 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싸움을 마치고 돌아 나올 무렵에 그는 철환에 맞아 전사하였습니다. 그 늠름한 기운과 순결한 정신이 헛되이 없어져서 뒤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못할까 하여 참으로 뼈아픈 일입니다.
이대원⁶⁾의 사당이 아직도 그 흥양 포구에 있으므로, 같은 제단에 초혼(招魂)하여 함께 제사를 지내게 한다면, 한편으로는 의로운 사람의 혼령을 위로하고, 또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을 격려하게 될 것입니다.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은 변방 수비에 온갖 힘을 다하고 사변이 일어난 뒤에는 더욱 부지런히 힘썼으며, 네 번이나 왜적을 무찌를 적에도 반드시 앞장서서 공격하였습니다. 특히 당항포에서 싸울 때에는 왜장을 활로 쏘아 목을 베었으니, 그 공로가 뛰어납니다. 다만 왜적을 활을 쏘아 죽이는 데만 전력하고, 목을 베는 일에는 힘쓰지 않았으므로, 그 연유를 별도로 이렇게 장계하는 것입니다. 이번 포상의 글월 가운데 홀로 이순신(李純信)의 이름이 들어 있지 않은 것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어이없다는 듯이 놀라고 있습니다.
여러 장수들 가운데서도 권준(權俊)·이순신(李純信)·어영담(漁泳譚)·배흥립(裵興立)·정운(鄭運) 등은 달리 믿는 바가 있어 서로 같이 죽기를 기약하고서 모든 일을 같이 의논하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권준 이하 여러 장수들은 모두 당상(堂上)⁷⁾으로 승진되었으나, 오직 이순신(李純信)만이 임금의 은혜를 입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엎드려서 조정에서 포상하는 명령을 내리시기를 기다립니다.
이에 대하여 전차(詮次:차례차례)로 잘 말씀을 올려주기 바랍니다.
1592년 9월 11일
【주석】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³⁾ : 원문에는 제목이 없으며, 〈李忠武公全書〉卷2「狀啓」52에 「請鄭運追配李大源祠狀」이란 제목이 달려있다.
승정원(承政院)⁴⁾ : 조선 때 왕명의 출납(出納)을 맡아보던 관청. 정원(政院)·후원(喉院)·은대(銀臺)·대언사(代言司) 등으로 불렸다.
전라좌도수군절도사⁵⁾ : 원문에 “具銜(구함)”이라 하였다. “수결(手決)과 직함(職)이 나란히 적혀있다.”는 뜻이므로, 여기서는 등초한 사람이 “全羅左道水軍節度使”를 생략하였다는 말이다.
이대원⁶⁾ : 李大源(1566~1587)의 자는 호연(浩然). 1583년(선조16) 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1586년 녹도만호로 있으면서 왜구 40여 척을 손죽도에서 격퇴하는데 큰공을 세웠으나, 전사하였다.
당상(堂上)⁷⁾ : 조선 때에 관제에서 정3품으로서 동반의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상과 서반의 절충장군(折衝將軍) 이상을 말한다.
몰운대 군사지역 내에 위치한 ‘충신정공운순의비(忠臣鄭公運殉義碑)’는 약 120m의 가파른 길을 오르면 몰운대 마지막 언덕 봉우리에 위치하는데 예전에는 군사지역이라 개방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이곳까지 개방이 돼 있어 접근할 수 있다. 아래에는 그 원문과 해문을 옮겨 둔다.
[原文]
忠臣鄭公運殉義碑
東萊之沒雲臺者 故鹿島萬戶贈兵曺判書鄭公運殉義之地也 公始任鹿島 倭賊傾國來寇 先陷嶺南路 上聞警急 西幸龍灣 以避之時 李忠武公舜臣 爲湖南左道水使 會屬鎭及將佐 與計事 衆各異見 公獨奮然請于李公曰 今賊陷嶺南 而坐視不救 是行自及也 賊未至吾境 而急引兵擊之 士氣可壯 亦所以固吾守也 況今君父
蒙塵 此正主辱臣死之秋 我當以一死爲諸將先 李公壯其言而從其策 卽日下令諸軍 乘船向嶺南 遇倭船於玉浦 我師初見賊 莫敢先試 其鋒 公促櫓鳴鼓 出諸將前 擊劍勵士 士無不殊死戰 遂破其五十餘艘而焚之 進至泗川 破賊船 前後近百艘 戰必先登爲之倡 又出遇賊於固城巨濟之間 氛甚盛 公請於李公 誘賊至閑山大洋 麾旗回櫓 以與賊薄 枹鼓盪海 矢石彌空 賊氣奪 不敢戰遂奮擊大破之 盡燒其船 蓋自寇亂以後 剋捷之盛 未之有也 報聞行朝 上超授折衝將軍 將大用之 公則不有其功 益勵志滅賊 進趍釜山 未至 遇賊于沒雲臺下 公忽心動 覺沒雲之雲 方音與公名相似 因自畫必死 處置軍事曰 我死 勿令賊知而生氣 會日暮風急 將領欲退 公不肯曰 吾已與賊誓不俱生矣 遂進力戰 中流丸以歿 此爲公立功殉身之大略也 嗚呼 公之在平時 不自表見官最卑 及其臨亂奮發 辭壯而烈 義嚴而正 決計倡勇 至死不悔 用能摧賊鋒而捍國難 以基中興之偉績 雖其身先殞 而功莫與爲倫 昔唐之張巡許遠 以一睢陽而藩蔽江淮 卒以身死之 議者 以天下之不亡 爲二人之力 後之視李公及公者 必不在張與許之下 若公之微而能首事 尤可謂奇偉特絶非常之士矣 今上二十年 下敎褒公忠勇凡數百言 昭揭若日星 仍訪公之八世孫爀 超授多大鎭僉使 鎭在萊府地 臺爲其所管 旣至 懼無以發揮舊蹟以揚朝家顯忠之殊典 於是 將豎碑臺上 特書當時事 俾觀瞻咸聳 馳書至京師 徵余爲文 噫 公烈丈夫也 意其英靈毅魄 不隨死以亡 蟠結於海山之間 驅駕風霆 斬截鯨鯢 常若有蹴馬島搗江戶之氣 臺卽海上之一小阜爾 然於息兵二百年之後 過是地而想其人之偉烈 則惟此一片石 爲南極之銅柱 使蠻夷自讋 海陲永鞏 豈但爲殉義之地而已哉 遂書以記之 峕崇禎紀元後三戊午三月八日也
崇政大夫行吏曹判書兼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事弘文館提學五
衛都摠府都摠管 閔鍾顯 撰
訓練大將嘉義大夫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訓練院都正 徐有大
[해문]
동래 몰운대는 옛날 녹도만호(鹿島萬戶)⁸⁾ 증병조판서(贈兵曹判書) 정운(鄭運) 공이 순절한 곳이다. 공이 처음 녹도에 부임하였을 때 왜적이 나라의 병사를 모두 모아 침략해 와서 먼저 영남지방을 함락시키니 임금께서 급보를 듣고 놀라시고 서쪽 의주로 피해 가셨다.
그때 충무공 이순신이 호남좌도수사로 있었는데, 소속 진영의 장수와 보좌관들을 모아 일을 의논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각기 의견이 다르자, 공이 혼자 분연히 일어나 이공에게 청하기를 “지금 적들이 영남을 함락했는데 앉아서 보기만 하고 구하지 않으면 이는 적의 행군을 스스로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적이 아직 우리 지경에 이르지 않았으니 급히 병사를 끌고 가서 공격하면 우리 군사의 사기도 등등해질 것이오. 또한 우리 수비를 견고하게 하는 일도 될 것입니다. 하물며 지금 임금께서 피난가 계시니, 이는 분명 군주가 욕될 적에 신하가 목숨을 바치는 때입니다. 제 한 몸 죽음으로써 여러 장수들의 선봉이 되겠습니다.” 하였다.
이공이 그 말을 장하게 여기고 그의 계책을 따라 그날로 모든 부대에 명령을 내려 배를 타고 영남으로 향하였다. 왜선을 옥포에서 만났는데 우리 군사들이 적을 처음 보는지라 감히 누구도 나서서 그 예봉을 시험해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공이 노를 재촉하며 북을 울리게 하고, 여러 장수들의 앞에 나가 칼을 치며 사기를 돋우니 군사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다. 그리하여 50여 척을 깨뜨려 불사르고 다시 사천으로 진격하여 적선을 격파하니 모두 합쳐 거의 100여 척에 가까웠다. 싸울 때는 공이 반드시 먼저 올라 선창이 되었다.
또 고성과 거제 사이에서 적을 만났는데, 적의 사기가 매우 높았다. 공은 이공에게 청하여 적을 한산도 큰 바다로 유인한 다음 깃발을 휘둘러 노를 돌린 뒤 적에게 육박해 가니, 대포와 북소리가 바다를 들끓게 하고 화살과 돌이 공중에 가득 차 적들은 사기가 꺾여 감히 싸우지를 못하였다. 그러자 모두 일어나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그 배를 모조리 불살랐다. 대개 전쟁이 시작된 이래로 이렇게 크게 이긴 적이 없었다. 첩보가 행재소(行在所)⁹⁾에 알려지자 임금께서 절충장군(折衝將軍)¹⁰⁾으로 올려 임명하고 장차 크게 쓰려고 하였으나, 공은 그 공로를 차지하지 않고 더욱 뜻을 가다듬어 적을 섬멸하였다.
다시 부산으로 진격하였는데, 채 도달하기도 전에 몰운대 아래에서 적을 만났다. 공의 마음이 갑자기 흔들려서 알아보니 몰운대의 ‘운(雲)’ 자 발음이 공의 이름과 같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여기서 반드시 죽을 것을 각오하고, 군사 일을 부탁하며, “내가 죽더라도 적들이 그 사실을 알아 사기가 나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하였다. 마침 해가 지고 바람이 급해지자 장수들이 퇴각하려고 하였으나, 공은 “내 이미 적과 함께 같이 죽기로 맹세하였다.”고 하며 따르지 않았다. 결국 나가서 힘써 싸우다가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것이 공이 공훈을 세우고 순절한 사실의 대략이다.
그렇다! 공은 평소에도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아 벼슬이 가장 낮았으나, 난리를 당해서는 분발하여 말은 장렬하고 의리는 엄정하였으며, 계책을 결정하고 용맹을 선창하여 죽어도 후회하지 않았으니, 적의 예봉을 꺾어 국난을 막아냄으로써 중흥의 기틀을 마련한 위대한 공적은 비록 그 몸은 먼저 운명했다 할지라도 그 공로는 짝할 바 없다고 하겠다. 옛날 당나라의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이 수양(睢陽) 땅 하를 지킴으로서 강회(江淮) 지방을 보호하고 마침내 죽었는데, 사람들은 천하가 망하지 않은 것은 두 사람의 힘이라고 평가하였다. 뒷날 이공과 공에 대한 평가도 분명 장순과 허원보다 낮지 않을 것이다. 또한 공과 같이 낮은 관직의 사람으로써 일에 앞장설 수 있었으니, 공은 더욱 더 위대하고 빼어나며 비상한 사람이었다고 할 것이다.
지금 임금께서 재위 20년에 교지를 내려 공의 충성과 용맹을 포상하신 것이 수백 마디이니, 이제 해와 별처럼 밝게 드러났다. 아울러 공의 8대손 혁(爀)을 찾아 다대진 첨사로 임명하였다. 다대진은 동래부에 속한 땅이오, 몰운대는 그 곳 관할이다. 그가 부임하자 옛 사적을 발굴하여 충신을 현양하는 조정의 특별한 은전을 드러내지 못할까 걱정하였다. 이에 몰운대 위에 비석을 세우고 당시의 사실을 특서(特書)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우러러보며 공경토록 하려고 하여 서울로 편지를 보내어 나에게 비문을 요청하였다.
아! 공은 장렬한 사람이다. 그 영걸찬 혼령과 굳센 혼백이 죽음을 따라 사라지지않고 바다와 산 사이에 서려 바람과 천둥을 몰아 못된 고래를 베어버리고 항상 대마도를 걷어차고 강호(江戶)를 짓부수는 기상이 있는 듯이 여겨진다. 몰운대는 바다위의 자그만 언덕일 뿐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200년 뒤에 이 곳을 지나가며 그 사람의 위대한 의열을 생각하면, 오직 이 한 조각 비석이 남쪽 끝의 구리기둥¹¹⁾이 되어 오랑캐로 하여금 스스로 두려워하여 바닷가를 길이 굳건하게 할 것이니, 어찌이 곳이 다만 의열로 순절한 땅에 그치고 말겠는가! 이 일들을 써서 기록하노라.
숭정 기원 후 세 번째 무오년(1798) 3월 8일.
숭정대부 행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사 홍문관제학 오위도총부 도총관 민종현¹²⁾ 지음.
훈련대장 가의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훈련원도정 서유대¹³⁾ 씀
【주석】
녹도만호(鹿島萬戶)⁸⁾ : 조선시대 각 도에 속한 여러 진(鎭)에 두었던 서반 종4품의 외관직이다.
행재소(行在所)⁹⁾ : 임금이 행차하여 머무는 임시 거처. 여기서는 선조가 피난가 있던 의주를 가리킨다.
절충장군(折衝將軍)¹⁰⁾ : 무관(武官) 정3품의 관계(官階)
구리기둥¹¹⁾ : 후한(後漢)의 장군 마원(馬援)이 중국 남방을 평정한 뒤, 교지(交趾) 땅에 이르러 구리기둥을 세워서 한나라의 남쪽 끝 경계로 삼았다는 고사가 있다.
민종현¹²⁾ : 閔鍾顯(1735~ 1798)은 백겸의 아들, 1756(영조 32)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768년 문학이 되었다. 이어 부교리로 있다가 한때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어 교리·겸사복·부수찬·필선·응교를 거쳐, 1781년(정조 5) 우부승지로서 국조보감찬집당상(國朝寶監纂輯堂上)으로 <국조보감>을 찬집하였으며, 성균관대사성·형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숭원부사로 있으면서 총융청마병도시(摠戎廳馬兵都試)를 늦게 행하였다 하여 탄핵 받았으나 <제도진하전문(諸道陳賀箋文)>과 <정조전문(正朝箋文)>을 명할 때 민폐를 제거할 방책을 올려 강의대부로 승진되었다.
1783년 대사성으로서 영재교육의 방책을 올렸으며, 곧 동지의금부사가 되었으나 아래 율관의 잘못으로 삭직당하였다. 이듬해 대사헌을 거쳐 1786년 동지경연사·홍문관부제학·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795년 예조판서로서 왕으로부터 상을 받았으나 향례연길(享禮涓吉)을 살피지 않아 다시 파직당하고, 1798년 다시 이조판서를 거쳐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하다가 죽었다. 의례에 매우 밝아 국가의 예식에 대한 많은 상소를 올렸다. 시호는 문목이다.
서유대¹³⁾ : 1732~1802. 무신. 자 자겸(子謙), 본관은 달성, 시호는 무익(武翼)
출처 및 참조
충무공 이순신 전집 1-도서출판 우석/최두환(1999.4.28.)
충무공 이순신 전집 3-도서출판 우석/최두환(1999.4.28.)
부산 뿌리찾기2 부산금석문-세한종합인쇄사/경성대학교 부설(2002.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