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寒食 날이라 모든 것 놓고 아직 가보지 못한 14대조 구주공鷗洲公의 묘소를 찾아보았다. 묘소가 있는 합천군 율곡면 노양리 산 242의 위성사진을 보고 뚜렷이 나타나는 묘지가 있어 그나마 쉽게 갈 수 있었다.
만대산(688.4m) 지맥이 구불구불 내려 오다 장봉산 봉우리를 맺고 다시 꿈틀거리며 내려오다 멈춘 구릉에 묘소를 두었다. 아랫마을은 노양 언양골로 백씨들이 많이 사는 산골 마을이다.
묘지의 진입로를 몰라 차를 언양골경로당 앞 공터에 주차를 하고 마을 쪽으로 오르다 좌측의 언덕길로 오르니 백씨의 산제당이 나왔는데 산길은 여기서 끝났다. 곧장 구릉의 정상으로 오르막을 오르니 100m 남짓 구릉의 정상부에 묘소가 보였다. 도착하여 절을 하고 묘표명墓表銘을 읽어보니 14대조 구주鷗洲 강대적공姜大適公(1594~1678)의 묘소임을 알게 됐다.
이곳의 해발 높이를 GPS고도계는 127m, 좌표는 35°37'30"N 128°11'16"E를 가리킨다.
묘는 숙부인 오천정씨烏川鄭氏와 쌍분이며 중앙 앞에 묘표를 세웠고 좌우에 망주석을 세웠다. 망주석望柱石에 새긴 세호細虎는 둘다 하늘로 오르는 모양이었다. 묘소 앞에는 할미꽃 몇 송이가 피어있어 삭막한 산중에서 잠시 긴장을 놓을 수 있었다.
구주강공鷗洲姜公은 진주강씨晋州姜氏 은열공파殷烈公派 파조派祖 1세 민첨民瞻(963~1021), 2세 태자태전太子太傳 단旦, 3세 예빈경禮賓卿 보輔, 4세 상서성좌승尙書省左承 정협貞叶, 5세 판삼사추성익재공신判三司推誠翊載功臣 여익呂翼, 6세 첨사공詹事公 원감元鑑, 7세 삼중대광三中大匡 문하시중門下侍中 시호諡號 충경공忠敬公 강정姜靖, 8세 비서좌사秘書佐事 숭문관학사崇文舘學士 상주목사尙州牧使 강순姜珣, 9세 조정대부행예빈경朝靖大夫行禮賓卿 강적姜𥛚, 10세 부제학副提學 강검姜釖, 11세 진천군파조晋川君派祖 위상渭詳, 12세 인선仁先, 13세 거호居好, 14세 승전承顓, 15세 진사進士 희필姬弼, 16세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화재和齋 인수仁壽, 17세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 세탁世卓, 18세 당암戇庵 익문翼文(1568~1648), 19세 구주鷗洲 대적大適(1594~1678)으로 가계를 잇는다.
鷗洲晋陽姜公碑銘
公諱大適 字學中 號鷗洲 姓姜氏 本晉州人 始祖諱民瞻 諡殷烈 曾祖諱仁壽 贈執義 號和齋 祖諱世悼 贈同副承旨 考諱翼文 司諫陞禮曹判書 號戇庵 妣貞夫人陝川李氏 奉事得男之女 公氣像溫雅言動 有法當時名士大夫 皆見司諫公賀 其有賢子 時伯兄承旨公 登第時望藉甚 而公又薦學行 亦官宣陵參奉軍資監直長 濟源道察訪 以親老即棄歸 後召洗馬辭不就 丙子翟亂倡義赴難 七耊遭艱三年蔬食 以忠孝之人 世皆感歎焉 子孫蕃衆福祿全備 終老丘園 自樂無求 遠近望若山斗 顯廟癸丑 以耊老陞資通政授護軍 享年八十五而終 墓在郡東宜陽洞 向卯之原 配烏川鄭氏 五衛將思恕之女 圃隱先生七代孫 有三男二女 長徽敏務功郎 次微重通德郎 次徽望進士 長女適趙㻶 次適吳善基 繼配彦陽金氏士人錫柱女 有三男一女 長徽俊 次徽傑 皆通德郎 次徽伋 女適李時馣 孫會多不盡錄
嘉善大夫 前行兵曹參判 安東 權相一 撰
구주 진양강공비명
공의 이름은 대적大適이요. 자는 학중學中이며 호는 구주鷗洲이고, 성은 강씨이니 진주 사람이다. 시조의 이름은 민첨民瞻이요 시호諡號는 은열殷烈이다. 증조의 이름은 인수仁壽이며, 집의執義에 증직 되었고 호는 화재和齋이다.
조부의 이름은 세탁世悼이며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추증 되었고, 아버지 이름은 익문翼文이며, 사간司諫으로서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올랐으며 호는 당암戇庵이다. 어머니는 정부인 합천이씨陝川李氏로 봉사 득남得男의 따님이다.
공公은 기상이 온아溫雅하고 말과 행동이 법도가 있으니 당시의 이름 있는 사대부들이 모두 사간공司諫公을 보고 그 어진 아들을 두었다고 하례했다. 이때 큰형 한사공이 과거에 올라 당시의 명망이 몹시 자자했다. 공이 또 학행으로 천거되어 역시 벼슬이 선릉참봉宣陵參奉 군자감직장軍資監直長, 제원도찰방濟源道察訪에 임명되었으나 아버지가 늙어서 즉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으며, 뒤에 세마洗馬로 불렸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병자년(1636) 오랑케의 난리에 의병을 일으켜 싸움에 나갔다.
70세에 부모님의 상사를 당하여 삼년 동안 나물밥을 먹으니 충성과 효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세상에서 모두 감탄했다. 자손이 번창하여 많았었고 복福과 녹祿이 온전히 갖추어져 고향에서 삶을 마치도록 스스로 즐기고 탐함이 없으니 멀고 가까운 데에서 바라보기를 태산북두 같이했다.
현종顯廟 계축년(1673)에 80세의 늙은 나이로 계급이 통정通政에 오르고 호군護軍¹⁾에 제수除授²⁾ 됐다. 향년 85세로 생을 마치니 묘는 고을 동쪽 의양동宜陽洞 묘향向卯 언덕에 있다.
부인은 오천정씨烏川鄭氏³⁾로 오위장五衛將 사서思恕의 따님이니 포은圃隱 선생의 7대손이다. 3남 2녀을 두었으니 맏아들 휘민徽敏은 무공랑務功郎이요. 둘째아들 휘중微重은 통덕랑通德郎이며, 셋째아들 휘망徽望은 진사進士이다. 두 딸 중 맏이는 조필趙㻶에게 출가했고 다음은 오선기吳善基에게 출가했다.
계배繼配는 언양김씨彦陽金氏 사인 석주錫柱의 따님이다. 3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휘준徽俊과 휘걸徽傑은 모두 통덕랑이고 다음은 휘급徽伋이고, 딸은 이시암李時馣에게 출가했다. 손자와 증손은 많아서 다 기록하지 못한다.
가선대부 병조참판 안동 권상일權相一⁴⁾ 지음
【주석】
호군護軍¹⁾ : 조선시대 오위五衛에 속하는 무관.
제수除授²⁾ : 추천의 절차 없이 임금에 의해 직접 벼슬이 내려지는 것.
오천정씨烏川鄭氏³⁾ : 지명의 변천에 따라 붙어진 것으로 오천烏川, 연일延日, 영일迎日로 지명이 바뀜에 따라 관향貫鄕이 바뀌었다.
권상일權相一⁴⁾ : 1679~1760,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경북 상주 출신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태중台中, 호는 청대淸臺이다. 만경헌령萬頃憲令, 장령掌令, 울산부사蔚山府使, 동부승지, 형조참의 등을 역임하였고 우부승지에 올랐다. 학문은 이황에 좇았으며, 이황이 수정하기 전의 사칠설四七說을 저술하였다.
通訓大夫、翊衛司洗馬、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鷗洲 姜公墓碣銘 【丙辰】
姜寒沙先生以淸名直節,爲光海朝完人。厥有同德之弟,曰鷗洲公,諱大適,字學仲,戇菴諱翼文之中子也。
以萬曆二十二年甲午生,年十九中壬子司馬。旋除宣陵參奉,遷軍資監直長,旣而出爲濟源丞。當是時,寒沙公以疏救鄭桐溪竄淮陽,而戇菴公亦以忤權姦,褫職繫王獄。公上書鳴寃不見省,而王父承旨公卒于家,公獨紀喪事,致無悔。癸亥反正,父兄俱蒙釋還。公自是益養親讀書,從事士友以爲樂。丙子冬,南漢受圍,從寒沙公勤王,中道聞和議罷歸。孝廟庚寅,除內侍敎官,明年以洗馬召,皆不就。是年冬,金自點叛誅,而先朝後宮趙氏以與謀賜死,二王子澂、潚幷置絶島。明年夏,上以大旱求言,公陳疏請寬二王子,以爲“今日應天之實,無過於此。”
蓋自光海以後,大獄屢興,而必以諸王子爲嚆矢。如寒岡、漢陰、桐溪諸賢,遞主全恩,而皆以護逆見斥,公之是疏亦岌岌乎殆矣。逮至丙申,上特赦二弟還京第,未幾復爵賜賚,恩顧無替。此雖聖王因心之友,非法律所能閑,而亦安知非若是疏者,開發歆動之力居多哉?以此而論,公之所立,于其父兄,實無愧焉。其他疏節皆可略也。
姜氏系出晉陽。上祖民瞻,高麗功臣,官至兵部尙書,諡殷烈公。入李朝,有諱渭祥,太常卿,封晉川君。曾祖仁壽,司憲府監察,贈執義;祖世倬,贈同副承旨。戇菴公官至濟用監正,追爵禮曹判書。妣陜川 李氏,奉事得男之女。
公以肅廟戊午三月十九日卒,享年八十五。後以孝命旌閭,贈承政院左承旨。葬在郡東宜陽洞 佩金山酉坐之原。
元配延日 鄭氏,五衛將思恕女,圃隱 文忠公后也。生三男二女:男徽敏、徽重、徽望進士;女壻別坐趙㻶、士人吳善基。繼配彥陽 金氏,都事鍾女。生三男一女:男徽俊贈戶曹參判、徽傑、徽伋;女壻李時馣。徽敏男五人。徽重男三人。徽望、徽俊男各五人。徽傑、徽伋男各一人。以下不能悉書。來請銘者,後孫斗錫、聖祚也。
銘曰:
人孰恒言,不曰孝忠。
固根于性,匪習焉充。
而父而昆,能爲子弟。
後年廿紀,顯銘是繫。
통훈대부 익위사 세마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 구주 강공 묘갈명 병진년(1916)
강한사(姜寒沙) 선생은 깨끗한 이름과 곧은 절개로 광해조(光海朝)의 완인(完人)이 되었다. 그 분과 동덕(同德)의 동생으로 구주공(鷗洲公)이 있는데, 휘가 대적(大適), 자가 학중(學仲), 당암(戇菴) 휘 익문(翼文)의 둘째 아들이다.
만력(萬曆) 22년 갑오년(1594, 선조27)에 태어나서 19세 임자년(1612, 광해군4)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곧이어 선릉 참봉(宣陵參奉)에 제수되었다가 군자감 직장(軍資監直長)으로 자리를 옮겼고, 얼마 뒤 외직으로 나가서 제원 승(濟源丞)이 되었다. 이 때 한사공(寒沙公)은 상소해서 정동계(鄭桐溪)를 구하다가 회양(淮陽)으로 귀양을 갔고, 당암공(戇菴公)도 또한 권간(權奸)을 거슬려서 벼슬을 빼앗기고 왕옥(王獄)에 갇히게 되었다. 공은 상서(上書)해서 원통함을 호소했지만 살펴주지 않았고, 조부 승지공(承旨公)이 집에서 돌아가시자 공은 혼자 후회함이 없도록 상사(喪事)를 치렀다. 계해년(1623, 인조1)의 반정(反正)으로 부형(父兄)이 모두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공은 이로부터 더욱 어버이를 봉양하고 글을 읽으면서 사우(士友)들에게 마음과 힘을 쏟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병자년(1636)에 남한산성(南漢山城)이 포위가 되자, 한사공을 따라 임금을 위해 나섰다가 중도에 화의(和議)를 했다는 말을 듣고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효종(孝宗) 경인년(1650, 효종1)에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되고, 이듬해에 세마(洗馬)로 부름을 받았지만,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이 해 겨울에 김자점(金自點)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임을 당했고, 광해군(光海君)의 후궁(後宮) 조씨(趙氏)가 김자점과 함께 도모하다가 사사(賜死)되었으며, 징(澂)ㆍ숙(潚) 두 왕자도 모두 절도(絶島)에 안치되었다. 이듬해 여름에 주상이 큰 가뭄으로 구언(求言)을 하자, 공은 상소해서 두 왕자를 관대하게 처리해 주기를 청하면서 “금일 하늘에 응답하는 실상으로는 이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대개 광해군 이후로 큰 옥사가 여러 차례 일어났는데, 반드시 여러 왕자가 시발이 되었다. 한강(寒岡)ㆍ한음(漢陰)ㆍ동계(桐溪) 제현(諸賢)은 번갈아 전은(全恩)을 주장했지만 모두 역적을 돌본다고 배척을 당했으니, 공의 이 상소도 또한 몹시 위태로운 것이었다. 병신년(1656, 효종7)에 주상이 특별히 동생인 두 왕자를 사면해서 서울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고, 곧이어 관작을 회복시키고 물품을 내리면서 은총이 변함이 없었다. 이것은 비록 성왕(聖王)께서 마음에서 우러난 형제간의 우애이기 때문에 법률로 막을 수는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상소가 또 주상을 일깨우고 움직인 힘이 많은 부분을 차지했을지 어찌 알겠는가? 이로써 논하건대, 공이 세운 것은 그 부형에게 실로 부끄러움이 없다고 하겠다. 기타 자잘한 일은 모두 줄일 수 있다.
강씨(姜氏)의 선계(先系)는 진양(晉陽)에서 나왔다. 상조(上祖) 민첨(民瞻)은 고려의 공신(功臣)이고, 벼슬이 병부 상서(兵部尙書)이며, 시호는 은렬공(殷烈公)이다. 이조에 들어와서 휘 위상(渭祥)이 있으니, 태상경(太常卿)이고, 진천군(晉川君)에 봉해졌다. 증조 인수(仁壽)는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이고, 증(贈) 집의(執義)이다. 조부 세탁(世倬)은 증(贈) 동부승지(同副承旨)이다. 당암공은 벼슬이 제용감 정(濟用監正)에 이르고, 증 예조 판서(禮曹判書)이다. 모친은 합천 이씨(陜川李氏)이니, 봉사(奉事) 득남(得男)의 따님이다.
공은 숙종(肅宗) 무오년(1678, 숙종4) 3월 19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85세이다. 뒤에 효성으로 정려(旌閭)를 내리라는 명이 내려지고,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다. 군(郡) 동쪽 의양동(宜陽洞) 패금산(佩金山) 유좌(酉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원배(元配)는 연일 정씨(延日鄭氏)이니, 오위장(五衛將) 사서(思恕)의 따님이고, 포은(圃隱) 문충공(文忠公)의 후손이다. 3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휘민(徽敏)ㆍ휘중(徽重)ㆍ진사(進士) 휘망(徽望)이고, 사위는 별좌(別坐) 조필(趙㻶)과 사인(士人) 오선기(吳善基)이다. 계배(繼配)는 언양 김씨(彥陽金氏)이니, 도사(都事) 종(鍾)의 따님이다. 3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증(贈) 호조 참판(戶曹參判) 휘준(徽俊)ㆍ휘걸(徽傑)ㆍ휘급(徽伋)이고, 사위는 이시암(李時馣)이다. 휘민은 아들이 다섯이다. 휘중은 아들이 셋이다. 휘망과 휘준은 아들이 각각 다섯이다. 휘걸과 휘급은 아들이 각각 하나이다. 이하는 다 적을 수가 없다. 찾아와서 묘갈명(墓碣銘)을 지어달라고 부탁한 사람은 후손 두석(斗錫)과 성조(聖祚)이다.
명(銘)을 붙인다.
사람들은 누구나 항상 / 人孰恒言
충효를 말하고 있지 않은가 / 不曰孝忠
진실로 본성에 뿌리를 두고 있건만 / 固根于性
익히지 않으면 어찌 확충할 수 있겠는가 / 匪習焉充
그 아버지 그 형님에 / 而父而昆
능히 아들이 되었구려 / 能爲子弟
이백 사십 년이 지난 뒤에 / 後年廿紀
명을 이렇게 붙이네 / 顯銘是繫
출처 및 참조
국역 주구선생문집-진주강씨진천군파종회/대보사(2012.12.30.)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1873~1933) 『암서집(巖棲集)』 卷二十九 / 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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