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민속·향토문화재 60

통영 해평열녀사당과 천서각

통영시 해평5길 13(봉평동 53)에는 해평열녀(海坪烈女) 사당(祠堂)이 있는데, 이곳 해평마을에 전해지는 해평열녀(海坪烈女) 이야기는 통영에 구전되는 대표적 열녀설화 가운데 하나로 통영지(統營志, 1890년대), 모성공회찬양문(慕聖公會讚揚文, 1922년), 고해평열녀기실비(古海坪烈女紀實碑, 1932년), 통영군지(統營郡誌, 1935년) 등의 문헌에 전해지고 있다.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아래와 같다.『옛날 용화산(龍華山, 미륵산) 아래의 해평(해핑이:통영 사람들이 부르는 마을 이름)에 열녀부인이 남편과 살았는데 성(姓)과 생몰년대를 자세히 알지 못했으므로 살았던 마을 이름을 빌려 “해평열녀”라 일컬었다. 부인이 시집 온지 수개월만에 고기잡이 나간 남편이 심한 풍랑으로 물에 빠져 실종되었다. 소식을 들은..

가덕도 대항마을 신당 神堂

가덕도 대항동 산13-27은 대항동 남동쪽 산기슭인데 이곳은 대항마을의 신당神堂이 위치한 곳으로 해발 29m를 표시하고 위도 35°00'40"N 경도 128°49'48"E을 가리킨다. 현재 신당 윗쪽으로 외양포로가 인접해 지나고 아래는 공영주차장이 들어서 있다. 신당 주위로 3그루의 팽나무와 1그루의 이팝나무가 자리했는데 대략 200년은 채 되지 않은 듯 보이고, 그 중 이팝나무는 단연 아름다움을 뽐내는 나무이다. 아마도 가덕도 유일의 이팝나무일 것으로 추측해 본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2003년 12월에 발행한 "한국의 마을제당 제7권 경상남도·부산편/2003년"에 의하면 창원군 천가면 대항리(昌原郡 天加面 大項里) 함목마을 신당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집은 샷시문이 달려 있는데 자물쇠로 잠겨져 있..

남면공립보통학교 졸업증서

卒業證書(졸업증서)金榮俶(김영숙)大正十年十二月十二日生(1921년 12월 12일생)右者普通學校[修業年限六箇年]ノ(우자는 보통학교(수업 연한 6년)의)全敎科ヲ卒業セシコトヲ證ス(전 교과 과정을 졸업하였음을 증명함.)昭和十年三月二十三日(1935년 3월 23일)南面公立普通學校長[正八位 勳八等]山中鹿衛(남면공립보통학교장[정팔위 훈팔등])산중록위=야마나카 시카에第五一八號(제518호) *‘勳八等’은 주로 지방 공무원·학교 교사·하급 군인 등에게 수여된 등급. 修業證書(수업증서)金榮叔(김영숙)大正十年十二月十二日生(1921년 12월 12일생)普通學校第三學年ノ課程ヲ(보통학교제3학년의 과정을)修了セシコトヲ證ス(수료했음을 증명한다.)昭和七年三月什二日(1932년 3월 12일)南面公立普通學校(남면공립보통학교)第三一號(제31호)

창원부의 사라진 소루 小樓

우연히 구입한 물재(勿齋) 손순효(孫舜孝) 선생의 문집에 창원부소루기(昌原府小樓記)가 실려 있어 옮겨 적어 둔다. 창원부 고지도에는 소루라는 명칭이 나오지 않는다. 昌原府小樓記上即位 十有八年于兹矣日 御經筵 潛心聖學 所以挽回 唐虞三代之治于今之世 猶慮赤子 之無告也 何以保之 風俗之澆漓也 何以化之曰 守曰 令皆吾分憂者 惟爾銓曹其愼揀之凡 賢士大夫之在六部在臺閣者 亦皆分授而列於郡縣 盖重其邦本也 吾同年 申公末舟 纍世勲閥 文武全材 上之眷待隆矣 一朝特授昌原公聞 命郎行下車之日 首除苛政宣希 德音政平 訟理 民樂爲用 顧府之館舍 經營既久 頹圮亦多 無以慰王人之鞅掌者 於是鳩材備瓦役 人吏之入番者 始工於 甲辰仲秋斷手於 乙巳季春 寝房内外 合閣前後中廳 行廊 南廳 中廊 東軒之 隅又起 高樓三間 其規模制度 皆出心匠榱題 丹艧輝暎鮮明 若夫火傘張空 流汗..

퇴촌마을 풍영대기

風咏臺記 昌之鎭山曰天柱其一枝蜿蟺起伏東走二十里爲旃檀其狀岩岩仰可以捫星斗 俯可以挹湖海山之南有庄曰退村地平衍野開豁勢寬而氣聚安氏居焉世有偉 人碩德吾友士允克趾先烈不以貧苦而自沮杜門養性務樸素厭紛華嗜泉石如 圖書之耽玩乃就所居數弓許而得東岡之陡而奧者曰壁谷幽而邃窈而廓兩面 皆蒼壁壁間有水㶁㶁而出匯而爲泓瀅澈如鑑開折而爲瀑奔放如雷轟奇岩異 石錯列左右松蘿躑躅蔭映上下窅然若與人世不相聞眞靈區也士允甚愛之刻 風咏臺三字於壁面每春秋風和景明携冠童杖枯藜逍遙於壁之顚或講質經史或 談討古今或命韻言志卽事寓興心廣神怡悠然有沂雩之趣私累淨盡義理昭融 以全吾本然之天而樂其眞樂也苟然矣則是谷也於治心養氣之助豈敢曰淺淺 乎哉士允曾有所軆認而自得焉必不以余之言爲耄而不加勉也余亦癖於山水 心竊欣慕而爲之記 商山 金相頊 記 풍영대기 해문-이현호 창원의 진산은 천주산이라 부른다. 천주산의 한 가지가 지렁..

민족의 숨결 간직한 정병산 기슭의 창원 봉산리 돌제단

창원의 해안이나 강가에는 신목神木과 신당神堂이 함께하는 경우가 많은 반면 해안을 벗어나 산악지역으로 가면 돌제단石祭壇이 목신木神과 함께 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창원시 동읍 봉산리 산 46에 위치한 돌제단은 해발 100m 높이에 위도 35°16'25"N 경도 128°41'53"E에 있다. 돌제단을 2010년 찾았을 때, 마을 전체에서 한 분만이 돌제단의 위치와 제단의 역할을 설명하신 분을 만났는데 10여년이 지난 지금 이곳 사람들은 대부분 알지도 못하고 고인돌로 알고 있으니 우리 민족의 혼이 깃든 전통 신앙은 잊혀진 존재가 됐다. 봉산리 돌제단은 자여역自如驛을 책임지던 문관 종육품인 찰방察訪이 제관이 되어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산신에게 빌던 국가의 행사가 이루어지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이를 아는 이가 없다. ..

창원 합포구의 일제 잔재 군철용지 수육비석

합포구 완월동 609-75번지의 비탈사면 위에 일제강점기의 잔재로 보이는 비석이 하나 서 있다. 이 비석은 완월동 장군천 상부에 속하는 지역으로 학룡사 뒤편 절개지 위에 있다. 비석의 동쪽 방향에 『군철용지수육 軍鉄用地水六』이라는 한자로 쓴 여섯 글자가 있다. 군사용 철도부지라는 것은 알겠는데 『수육水六』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다. 지인이 알려온 인터넷에 군철용지라 검색하면 블로그가 나온다 길래 검색하니 대곡산 능선을 따라 철鐵, 군철용지軍鉄用地, 군철용지수軍鉄用地水 등 여러개의 비석들이 소개 되어 있다. 합포구 지역을 잘 아는 지인에게 이 비석에 대해 물었더니 옛 마산으로 오는 철도를 왜육군들이 건설하여 사용했는데 당시 철도에 필요한 물을 공급하기 위해 대곡산과 경남대 일대를 물 공급지로..

창원시 웅천 삼포마을 신당 神堂

웅천 명동 115번지(명제로324번길 25-9) 집 뒤쪽에 있는 삼포마을 신당神堂은 할매신을 모시고 있다. 이곳은 위치기반고도계가 해발 12m를 표시하고 위도 35°05'42"N 경도 128°43'48"E을 가리킨다. 삼포마을 신당神堂은 삼포마을 뒷산의 초입부에 위치하여 마을 속에서 보이지 않는 위치에 있다. 마을 사람들에게 묻지 않고서는 신당神堂을 찾기가 쉽지 않는 곳이다. 신당神堂을을 보려고 찾아왔다고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물으니 이장에게 허락을 받고 신당을 볼 수 있다고 하여 삼포마을 이장 집으로 찾아갔다. 이장의 안내로 신당을 찾게 됐다. 신당을 보려면 웅천 명동 115번지 집을 지나야 하는데 집주인에게 먼저 인사를 하고 마당을 지나 집 뒤쪽으로 접근하면 바로 나타난다. 신당神堂은 시멘트블록으..

창원시 웅천 우도 신단 神壇

창원시 진해구 명동 665은 웅천 벗섬(우도友島)의 북쪽 끝인 주방파제와 일직선으로 마주하는 곳으로 신단神壇이 있다. 이곳은 위치기반고도계가 해발 5m를 표시하고 구글지도는 위도 35°05'18.7"N 경도 128°43'22.3"E라 표시한다. 벗섬(우도友島)은 음지도 남쪽에 있는 섬으로 자동차 길은 없지만 음지도陰地島에서 걸어서 갈 수 있도록 보행자 다리를 건설하여 육지도 아니고 섬도 아닌 그런 섬이 된 곳이다. 아직도 명동도선장에서 배가 운행하고 있으며 주방파제까지의 거리는 876m로 주민들은 배를 이용한다. 섬의 가장 높은 곳은 55m이고 면적은 101.402m²이며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모양이고 마을은 섬의 서쪽면을 따라 길게 형성되었다. 벗섬이라 부르면서 우도友島라고 표기하는 것은 일제에 의..

창원시 웅천 수도 신당

진해구 수도동 산82에는 웅천熊川 수도水島마을의 당산으로 신당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GPS고도계가 해발 43m를 표시하고 위도 35°05'00"N 경도 128°44'52"E라 표시한다. 수도水島는 고려사 「원종4(1262)년 2월」 조항條項에는 ‘왜구가 물도勿島에 침범하였다.’고 해서 ‘물섬’의 표기를 ‘勿島’로 하고 있다. 이는 ‘물섬’를 ‘勿島’로 차자 표기되었다가 경상도속찬지리지부터 ‘수도水島’로 표기를 했다. 웅천 앞 바다의 작은 섬에 수질이 좋은 물이 많이 나서 ‘물섬’으로 불렀던 것이 섬 이름으로 되었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는 조선 수군이 이 섬에서 물을 공급 받았다고 전한다. 섬의 넓이는 46.4km², 해안선의 길이는 2.669km이다. 2015년에 섬 탐방으로 이곳 수도를 온 적이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