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민속·향토문화재 59

년령年齡과 본적本籍에 대해

"년령年齡"이라는 용어는 언제부터 사용했으며, 어떨 때 사용했을까? 년령年齡을 ‘나이’라 말하고 사전에서는 "출생出生한 날로부터 오늘까지의 경과經過 기간期間을 연年 또는 연월일年月日로 계산計算한 수數."라 기록하고 있다. 년年은 '해 년, 나이, 때'라고 의미하고 齡은 '나이 령'이라 한다. 이 둘을 합쳐 년령年齡이라 하고 나이라 칭한다. 그러면 년年과 령齡이 각각의 의미로 쓰인 적은 없을까? 조선 중기까지는 年과 齡은 각각 따로 사용했다. 그러다가 조선 말기에 年과 齡이 혼용되기 시작하고 결국 일제강점기에 이 두 글자를 합쳐 년령年齡이라는 조어造語로 탄생하게 된다. 조선 시대에는 남자의 나이를 칭할 때는 년年이라 했고, 여자의 나이를 칭할 때는 령齡이라 구별해서 사용했다. 그 흔적이 남은 용어로 여자女..

창원향교문서 향중완의 鄕中完議

鄕中完議 右完議爲削籍事鄕員朴耆造言謀 毁於朋班金錞依前  立議削籍事 崇禎肆年 八月二十八日                                      柳遇春                                      曺以復                                      文以博                                      盧  溫                                      張承福                                      李鐵堅 향중완의  오른쪽에 이어 완의는 쪼개진 문서(서적)를 위한 일로 향원 박기조(朴耆造)가 훼손하지 말라고 말하며 같은 반 김순의(金錞依) 앞으로(에게) 쪼개진 문서(서적)를 위한 일에 대..

朴月秋 박월추 시

무제 [해문-한국고전번역원]東西有東西有西 동(서)쪽에 동쪽이 있고 서쪽에 서쪽이 있으니 善程岐路一般齊 좋은 길과 갈래길 하나같이 똑같은 법 淡無若水深還黑 맑기가 물보다 더한 것이 없지만 깊어지면 도리어 검고 高莫如天遠反低 높기가 하늘 만한 것이 없지만 멀어지면 도리어 낮아진다 從古蛟龍蒼海伏(종고교룡창해복) 예로부터 교룡은 푸른 바다에 숨고 元來鸞鳳竹梧棲(원래난봉죽오서) 처음부터 난봉은 대나무와 오동나무에 깃드는 법 欲知安身保命處(욕지안신보명처) 몸을 편케하고 명을 보존할 곳을 알고자 한다면 小小山前小小溪(소소산전소소계) 변변찮은 산 앞에 자그마한 시내가라네 *난봉(鸞鳳) : 전설상의 새인 난새와 봉황 *대나무와 오동나무 :《시경》 〈대아(大雅) 권아(卷阿)〉의 전(箋)에 “봉황의 성질은 오동나무가 아니면..

창원부의 사라진 소루 小樓

우연히 구입한 물재(勿齋) 손순효(孫舜孝) 선생의 문집에 창원부소루기(昌原府小樓記)가 실려 있어 옮겨 적어 둔다. 창원부 고지도에는 소루라는 명칭이 나오지 않는다. 昌原府小樓記上即位 十有八年于兹矣日 御經筵 潛心聖學 所以挽回 唐虞三代之治于今之世 猶慮赤子 之無告也 何以保之 風俗之澆漓也 何以化之曰 守曰 令皆吾分憂者 惟爾銓曹其愼揀之凡 賢士大夫之在六部在臺閣者 亦皆分授而列於郡縣 盖重其邦本也 吾同年 申公末舟 纍世勲閥 文武全材 上之眷待隆矣 一朝特授昌原公聞 命郎行下車之日 首除苛政宣希 德音政平 訟理 民樂爲用 顧府之館舍 經營既久 頹圮亦多 無以慰王人之鞅掌者 於是鳩材備瓦役 人吏之入番者 始工於 甲辰仲秋斷手於 乙巳季春 寝房内外 合閣前後中廳 行廊 南廳 中廊 東軒之 隅又起 高樓三間 其規模制度 皆出心匠榱題 丹艧輝暎鮮明 若夫火傘張空 流汗..

퇴촌마을 풍영대기

風咏臺記 昌之鎭山曰天柱其一枝蜿蟺起伏東走二十里爲旃檀其狀岩岩仰可以捫星斗 俯可以挹湖海山之南有庄曰退村地平衍野開豁勢寬而氣聚安氏居焉世有偉 人碩德吾友士允克趾先烈不以貧苦而自沮杜門養性務樸素厭紛華嗜泉石如 圖書之耽玩乃就所居數弓許而得東岡之陡而奧者曰壁谷幽而邃窈而廓兩面 皆蒼壁壁間有水㶁㶁而出匯而爲泓瀅澈如鑑開折而爲瀑奔放如雷轟奇岩異 石錯列左右松蘿躑躅蔭映上下窅然若與人世不相聞眞靈區也士允甚愛之刻 風咏臺三字於壁面每春秋風和景明携冠童杖枯藜逍遙於壁之顚或講質經史或 談討古今或命韻言志卽事寓興心廣神怡悠然有沂雩之趣私累淨盡義理昭融 以全吾本然之天而樂其眞樂也苟然矣則是谷也於治心養氣之助豈敢曰淺淺 乎哉士允曾有所軆認而自得焉必不以余之言爲耄而不加勉也余亦癖於山水 心竊欣慕而爲之記 商山 金相頊 記 풍영대기 해문-이현호 창원의 진산은 천주산이라 부른다. 천주산의 한 가지가 지렁..

민족의 숨결 간직한 정병산 기슭의 창원 봉산리 돌제단

창원의 해안이나 강가에는 신목神木과 신당神堂이 함께하는 경우가 많은 반면 해안을 벗어나 산악지역으로 가면 돌제단石祭壇이 목신木神과 함께 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창원시 동읍 봉산리 산 46에 위치한 돌제단은 해발 100m 높이에 위도 35°16'25"N 경도 128°41'53"E에 있다. 돌제단을 2010년 찾았을 때, 마을 전체에서 한 분만이 돌제단의 위치와 제단의 역할을 설명하신 분을 만났는데 10여년이 지난 지금 이곳 사람들은 대부분 알지도 못하고 고인돌로 알고 있으니 우리 민족의 혼이 깃든 전통 신앙은 잊혀진 존재가 됐다. 봉산리 돌제단은 자여역自如驛을 책임지던 문관 종육품인 찰방察訪이 제관이 되어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산신에게 빌던 국가의 행사가 이루어지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이를 아는 이가 없다. ..

창원 합포구의 일제 잔재 군철용지 수육비석

합포구 완월동 609-75번지의 비탈사면 위에 일제강점기의 잔재로 보이는 비석이 하나 서 있다. 이 비석은 완월동 장군천 상부에 속하는 지역으로 학룡사 뒤편 절개지 위에 있다. 비석의 동쪽 방향에 『군철용지수육 軍鉄用地水六』이라는 한자로 쓴 여섯 글자가 있다. 군사용 철도부지라는 것은 알겠는데 『수육水六』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다. 지인이 알려온 인터넷에 군철용지라 검색하면 블로그가 나온다 길래 검색하니 대곡산 능선을 따라 철鐵, 군철용지軍鉄用地, 군철용지수軍鉄用地水 등 여러개의 비석들이 소개 되어 있다. 합포구 지역을 잘 아는 지인에게 이 비석에 대해 물었더니 옛 마산으로 오는 철도를 왜육군들이 건설하여 사용했는데 당시 철도에 필요한 물을 공급하기 위해 대곡산과 경남대 일대를 물 공급지로..

창원시 웅천 삼포마을 신당 神堂

웅천 명동 115번지(명제로324번길 25-9) 집 뒤쪽에 있는 삼포마을 신당神堂은 할매신을 모시고 있다. 이곳은 위치기반고도계가 해발 12m를 표시하고 위도 35°05'42"N 경도 128°43'48"E을 가리킨다. 삼포마을 신당神堂은 삼포마을 뒷산의 초입부에 위치하여 마을 속에서 보이지 않는 위치에 있다. 마을 사람들에게 묻지 않고서는 신당神堂을 찾기가 쉽지 않는 곳이다. 신당神堂을을 보려고 찾아왔다고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물으니 이장에게 허락을 받고 신당을 볼 수 있다고 하여 삼포마을 이장 집으로 찾아갔다. 이장의 안내로 신당을 찾게 됐다. 신당을 보려면 웅천 명동 115번지 집을 지나야 하는데 집주인에게 먼저 인사를 하고 마당을 지나 집 뒤쪽으로 접근하면 바로 나타난다. 신당神堂은 시멘트블록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