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민속·향토문화재 52

퇴촌마을 풍영대기

風咏臺記 昌之鎭山曰天柱其一枝蜿蟺起伏東走二十里爲旃檀其狀岩岩仰可以捫星斗 俯可以挹湖海山之南有庄曰退村地平衍野開豁勢寬而氣聚安氏居焉世有偉 人碩德吾友士允克趾先烈不以貧苦而自沮杜門養性務樸素厭紛華嗜泉石如 圖書之耽玩乃就所居數弓許而得東岡之陡而奧者曰壁谷幽而邃窈而廓兩面 皆蒼壁壁間有水㶁㶁而出匯而爲泓瀅澈如鑑開折而爲瀑奔放如雷轟奇岩異 石錯列左右松蘿躑躅蔭映上下窅然若與人世不相聞眞靈區也士允甚愛之刻 風咏臺三字於壁面每春秋風和景明携冠童杖枯藜逍遙於壁之顚或講質經史或 談討古今或命韻言志卽事寓興心廣神怡悠然有沂雩之趣私累淨盡義理昭融 以全吾本然之天而樂其眞樂也苟然矣則是谷也於治心養氣之助豈敢曰淺淺 乎哉士允曾有所軆認而自得焉必不以余之言爲耄而不加勉也余亦癖於山水 心竊欣慕而爲之記 商山 金相頊 記 풍영대기 해문-이현호 창원의 진산은 천주산이라 부른다. 천주산의 한 가지가 지렁..

민족의 숨결 간직한 정병산 기슭의 창원 봉산리 돌제단

창원의 해안이나 강가에는 신목神木과 신당神堂이 함께하는 경우가 많은 반면 해안을 벗어나 산악지역으로 가면 돌제단石祭壇이 목신木神과 함께 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창원시 동읍 봉산리 산 46에 위치한 돌제단은 해발 100m 높이에 위도 35°16'25"N 경도 128°41'53"E에 있다. 돌제단을 2010년 찾았을 때, 마을 전체에서 한 분만이 돌제단의 위치와 제단의 역할을 설명하신 분을 만났는데 10여년이 지난 지금 이곳 사람들은 대부분 알지도 못하고 고인돌로 알고 있으니 우리 민족의 혼이 깃든 전통 신앙은 잊혀진 존재가 됐다. 봉산리 돌제단은 자여역自如驛을 책임지던 문관 종육품인 찰방察訪이 제관이 되어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산신에게 빌던 국가의 행사가 이루어지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이를 아는 이가 없다. ..

창원 합포구의 일제 잔재 군철용지 수육비석

합포구 완월동 609-75번지의 비탈사면 위에 일제강점기의 잔재로 보이는 비석이 하나 서 있다. 이 비석은 완월동 장군천 상부에 속하는 지역으로 학룡사 뒤편 절개지 위에 있다. 비석의 동쪽 방향에 『군철용지수육 軍鉄用地水六』이라는 한자로 쓴 여섯 글자가 있다. 군사용 철도부지라는 것은 알겠는데 『수육水六』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다. 지인이 알려온 인터넷에 군철용지라 검색하면 블로그가 나온다 길래 검색하니 대곡산 능선을 따라 철鐵, 군철용지軍鉄用地, 군철용지수軍鉄用地水 등 여러개의 비석들이 소개 되어 있다. 합포구 지역을 잘 아는 지인에게 이 비석에 대해 물었더니 옛 마산으로 오는 철도를 왜육군들이 건설하여 사용했는데 당시 철도에 필요한 물을 공급하기 위해 대곡산과 경남대 일대를 물 공급지로..

창원시 웅천 삼포마을 신당 神堂

웅천 명동 115번지(명제로324번길 25-9) 집 뒤쪽에 있는 삼포마을 신당神堂은 할매신을 모시고 있다. 이곳은 위치기반고도계가 해발 12m를 표시하고 위도 35°05'42"N 경도 128°43'48"E을 가리킨다. 삼포마을 신당神堂은 삼포마을 뒷산의 초입부에 위치하여 마을 속에서 보이지 않는 위치에 있다. 마을 사람들에게 묻지 않고서는 신당神堂을 찾기가 쉽지 않는 곳이다. 신당神堂을을 보려고 찾아왔다고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물으니 이장에게 허락을 받고 신당을 볼 수 있다고 하여 삼포마을 이장 집으로 찾아갔다. 이장의 안내로 신당을 찾게 됐다. 신당을 보려면 웅천 명동 115번지 집을 지나야 하는데 집주인에게 먼저 인사를 하고 마당을 지나 집 뒤쪽으로 접근하면 바로 나타난다. 신당神堂은 시멘트블록으..

창원시 웅천 우도 신단 神壇

창원시 진해구 명동 665은 웅천 벗섬(우도友島)의 북쪽 끝인 주방파제와 일직선으로 마주하는 곳으로 신단神壇이 있다. 이곳은 위치기반고도계가 해발 5m를 표시하고 구글지도는 위도 35°05'18.7"N 경도 128°43'22.3"E라 표시한다. 벗섬(우도友島)은 음지도 남쪽에 있는 섬으로 자동차 길은 없지만 음지도陰地島에서 걸어서 갈 수 있도록 보행자 다리를 건설하여 육지도 아니고 섬도 아닌 그런 섬이 된 곳이다. 아직도 명동도선장에서 배가 운행하고 있으며 주방파제까지의 거리는 876m로 주민들은 배를 이용한다. 섬의 가장 높은 곳은 55m이고 면적은 101.402m²이며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모양이고 마을은 섬의 서쪽면을 따라 길게 형성되었다. 벗섬이라 부르면서 우도友島라고 표기하는 것은 일제에 의..

창원시 웅천 수도 신당

진해구 수도동 산82에는 웅천熊川 수도水島마을의 당산으로 신당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GPS고도계가 해발 43m를 표시하고 위도 35°05'00"N 경도 128°44'52"E라 표시한다. 수도水島는 고려사 「원종4(1262)년 2월」 조항條項에는 ‘왜구가 물도勿島에 침범하였다.’고 해서 ‘물섬’의 표기를 ‘勿島’로 하고 있다. 이는 ‘물섬’를 ‘勿島’로 차자 표기되었다가 경상도속찬지리지부터 ‘수도水島’로 표기를 했다. 웅천 앞 바다의 작은 섬에 수질이 좋은 물이 많이 나서 ‘물섬’으로 불렀던 것이 섬 이름으로 되었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는 조선 수군이 이 섬에서 물을 공급 받았다고 전한다. 섬의 넓이는 46.4km², 해안선의 길이는 2.669km이다. 2015년에 섬 탐방으로 이곳 수도를 온 적이 있는..

창원시 웅천 영길마을 신당

창원시 진해구 남양동 208-1은 월남천月南川이 휘돌아 영길만永吉灣으로 흘러가는 곳에 바다를 만나 영길마을을 지키는 독메이다. 이 독메는 당메堂山라 하고 정상에는 영길마을 신당神堂과 신목神木이 있는데 신목은 2그루의 상수리나무 였지만 지금은 신당 옆에 1그루만 남아 있다. 이곳은 위치기반고도계가 해발 36m를 표시하고 구글지도는 위도 35°06'49"N 경도 128°47'00"E라 표시한다. 지금 이곳의 주소는 1914년 일제에 의해 명명된 남양동南陽洞인데 월남리月南里의 ‘南’과 사라진 마을 산양리山陽里의 ‘陽’을 따서 남양동이 되었다. 아마도 산양리는 마천공단馬川工團을 만들면서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웅천熊川 영길만永吉灣은 이미자가 부른 노래 ‘황포돛대’의 가사을 쓴 웅천 대장동에서 자란 이일윤 작가의..

창원시 웅천 안골진성 신당

창원시 웅천 안골동 692에는 『1872년지방지도(규10512)-안골진지도』에도 나타나 있는 안골동安骨洞 신당神堂이 위치한 곳이다. 이곳은 위치기반고도계가 해발 67m를 표시하고 위도 35°05'19"N 경도 128°47'45"E라 표시한다. 안골진安骨鎭은 1490년(성종 21)에 세워진 성이 있었으나 『1872년지방지도』를 그릴 당시에는 훼손이 심해 지도에서도 보이지 않고 있다. 안골동安骨洞 신당神堂은 안골진성安骨鎭城의 일부였음을 『1872년지방지도(규10512)-안골진지도』에서 잘 보여 준다. 이는 제포진성薺浦鎭城에도 신당神堂이 위치하는 것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안골포나 제포는 바다를 이용하는 출입통제가 주된 임무을 맡은 수군만호진水軍萬戶鎭이다. 당시의 전선戰船이나 항해의 기술로는 수많은 어려움이 ..

창원시 웅천 연도 신당

창원시 웅천 연도동 211은 창원의 동남쪽 끝인 연도椽島라는 섬에 있는 신당의 위치이다. 이곳은 위치기반고도계가 해발 50m를 표시하고 위도 35°03'50"N 경도 128°46'02"E라 표시한다. 2021년 첫날 창원의 남동쪽 끝을 지키는 연도라는 섬을 찾기로 하고 연도 원주민이었던 친구에게 신당의 위치와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물어 두었다. 창원시청에서 직선거리로 19.79km 떨어진 연도는 뭍에서 4km 떨어진 섬이었으나 지금은 바다를 매립하여 완전한 육지가 되었다. 섬이었을 당시 어업으로 소득이 높아 주민들은 돈섬, 쇠섬으로 불렀으나 한자로 표기하면서 ‘ㅅ’음과 비슷한 ‘섯가래 연椽’자를 써서 연도椽島가 되었다 전한다. 면적은 768,000m²이며, 해안선은 1,264m이다. 현재 연도에는 웅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