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 백호전서 白湖全書』는 조선 후기, 대사헌, 우찬성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인 윤휴尹鑴(1617~1680) 선생의 글을 모은 『白湖尹先生文集』을 한국고전번역원의 양홍렬이 번역하고, 1995년 7월 민족문화추진회를 발행처로 하여, 교열은 김철희, 기획은 박헌순·김은정·이기찬, 교정은 강여진·김경희·김태건·김미엽·김주미·박연희·송은경·이원배·최은진이하고, 편집위원회장 한우근과 위원 이가원·이동환·이지형·이춘희·천혜봉·한영우·박소동·송기채·신승운·정태헌 등이 참여하고, 동국전산주식회사가 인쇄해 정부의 지원으로 발간했다.
Ⅰ권의 권두에 ‘일러두기’를 붙이고 목차를 실었으며, 풍산 유석우柳奭佑의 서문을 부쳤으며, Ⅺ권의 말미에 8대손 윤신환尹臣煥의 발跋과 9대손 윤수경尹壽慶의 후지後識를 붙여 발행했다.
책은 양장본으로 크기는 가로 167cm, 세로 244cm이며, 총 Ⅰ~Ⅺ권으로 이루어졌으며 Ⅰ권은 324p이고 책의 뒤에 원문 188p가 붙어있다.
이 책은 2020년 모 마을도서관에서 폐기 처분한 책을 수집해 소장하게 됐다.
윤휴尹鑴(1617~1680) 선생의 호는 백호白湖, 하헌夏軒이고, 본관은 남원南原. 초명은 윤갱尹鍞. 자는 희중希仲이며, 이조참판 윤호尹虎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희손尹喜孫이다. 아버지는 대사헌 윤효전尹孝全이며, 어머니는 첨지중추부사 김덕민金德民의 딸이다.
아버지의 임지인 경주부의 관사에서 만득자晩得子(늦게 낳은 자식)로 태어났으며, 6년 위의 서형庶兄 윤영尹鍈이 있었다. 두 돌 못 미쳐 아버지를 여의고 서울로 돌아와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여주의 옛집으로, 두 차례의 정묘·병자호란 때에는 보은 삼산三山의 외가로 가서 피란하였다. 어린 시절의 학업은 외할아버지의 훈도가 있었을 뿐 거의 독학하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윤휴의 학문은 1635년(인조 13) 19세 때에 이미 10년 연장자로 당대의 석학이던 송시열宋時烈과 속리산 복천사福泉寺에서 만나, 3일간의 토론 끝에 송시열이 “30년 간의 나의 독서가 참으로 가소롭다.”고 자탄할 정도로 높은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본래 당색에 구애됨이 적었으나, 예송으로 서인 측과 틈이 생겨 출사 뒤에는 남인으로 활약하였다. 기해예송 때 포의布衣로서 송시열의 주장의 오류를 가장 먼저 지적했으며, 1674년 갑인예송 때에도 같은 기준에서 서인측 견해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남인으로서 허적許積을 중심으로 한 탁남濁南과는 입장을 달리해 허목許穆과 함께 청남淸南을 이루었다.
윤휴의 저술들은 문집 간행을 위해 윤하제尹夏濟·윤경제尹景濟 두 아들이 이미 정리했으나, 18세기 이후 정치적 적대 세력인 서인과 노론 계열이 계속 집권함에 따라 햇빛을 보지 못하고, 1927년에야 진주 용강서당龍江書堂에서 처음으로 『백호문집白湖文集』을 석판본으로 간행하였다.
이 문집은 중요 저술인 『독서기』가 빠진 것을 비롯해 결함이 많았다. 그러다가 1974년에 직계손 윤용진尹容鎭이 비밀히 전해오던 원고들을 모두 망라해 『백호전서白湖全書』를 출판하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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