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들/향교와 뿌리

창원향교 임원들 성균관 봉심행사를 갖다.

천부인권 2012. 6. 15. 07:58

2012년 6월 13일 창원향교(昌原鄕校) 김주원(金柱元) 전교(典敎)를 비롯하여 장의(掌議) 43명이 서울 성균관(成均館)을 찾아가 공자(孔子)님의 뜻을 받들어 살피는 봉심(奉審)을 행했다. 장시간의 서울 나들이라 버스를 타고 가는 시간을 활용하여 진해구에서 오신 이병목 장의님이 석전대제홀기(釋奠大祭笏記)의 뜻을 이해하고 홀을 하는 방법 등을 모든 장의들에게 배워주는 의미 있는 시간도 가졌다.

 

2012/6/13 성균관 대성전

 

 창원향교 장의들은 성균관에 도착하여 대성전에서 배향을 하였고 최근덕(崔根德) 성균관장 을 대신하여 임석구 총무처장이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저희 성균관에서도 우리나라의 향교발전을 위하여 항상 노력하고 있음을 알아주시기 바라며, 여러분들의 뜻에 어긋남이 없이 잘하겠습니다.”라고  환영인사를 하였다.
창원향교 임원들의 성균관 봉심을 돕기 위해 상임전례위원이신 황의욱님이 성균관에 대한 설명과 일반 향교와의 차이점 등을 알려 주셨고 창원향교 장의들이 배향을 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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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향교 유생 성균관 대성전 봉심

 

 

성균관 신도인 외삼문

창원향교의 건물 배치가 전학후묘이며 대성전의 위치가 높은 곳에 있는 이유와 성균관이 전묘후학의 형태를 취한 이유와 모든 건물이 평면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일반적인 향교는 임금이 제례를 하지 않기 때문에 가장 높은 위치에 대성전을 두지만 임금이 제례를 행하는 성균관은 임금이 제자로서의 예를 갖추는 것이기에 앞에 제사공간을 두었고 모든 건물이 평면이 되도록 건립했다.”는 것이다. 경주향교, 나주향교, 전주향교 등에는 임금이 제례를 지내는 곳이기 때문에 전묘후학의 건물배치가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임금이 출입하는 어삼문

대성전 정면에는 두 개의 계단이 있고 좌우 옆으로 계단이 있는데 정면의 계단 중 우리가 대성전을 바라보는 방향에서 오른쪽은 임금이 다니는 길이고 왼편에 있는 계단은 신도로 즉 신이 되신 공자님이 다니는 길이라 한다. 따라서 임금이 다니는 길을 위해 어삼문을 따로 만들어 임금이 다닐 수 있게 했으며 일반 신하들은 대성전의 좌우에 있는 계단을 사용 한다.
 

 

 

 

 

예전에는 대성전(大成殿)을 성묘(聖廟)라 칭했는데 성묘라 쓴 현판도 현재까지 붙어 있으며 성균관이 단지 제사만의 공간이 아니라 학문을 하는 공간이기도 하기에 대성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다. 성균관 현판의 글씨는 조선의 명필로 알려진 한석봉의 글이라 하며 대성(大成)이란 공자님이 유학을 크게 이루었다는 뜻이다.

 

삼강오륜을 뜻하는 편백나무

 

 

우리가 바라보는 방향에서 대성전 앞 좌우에는 편백나무가 서 있는데 우측의 나무는 가지가 3개이고, 좌측은 가지가 5개를 가지고 있다. 약 400여년 된 이 편백나무 가지 수의 의미가 삼강오륜을 뜻한다고 하니 옛 선조들이 얼마나 세세한 면까지 계획하고 운영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진출처 : http://cafe.naver.com/ica56111/1253 봉천 권재종

 

 

 

2010년 9월 2일에 상륙한 태풍 곰파스로 인해 성균관 대성전 앞마당에 “장원백(壯元栢)”이라는 이름을 가진 잣나무가 뿌리째 뽑혀 서무(西廡)로 쓰러진 사건이 있었다. 장원백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이야기는 이렇게 전개된다. 격무에 점심수라를 마치신 세종대왕(1434년)이 잠깐 낮잠을 주무시는데 ‘성균관 대성전 앞 잣나무에 청룡이 꿈틀거리며 올라가는 기이한 꿈을 꾸시자 대전별감에게 특명을 내려 그곳을 조사하여 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대전별감이 대성전 앞마당에 오니 창녕에서 올라온 최항(崔恒. 1409-1474)이 잣나무 밑에서 잠을 자고 있었던바 그 사실을 고했다. 다음날 알성문과(謁聖文科)가 공지되어 있었던 터라 글공부에 피곤한 유생 최항이 낮잠을 청했을 것이라 생각했는지 알성시의 장원급제 자로 최항이 되었다. 이후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여 알성시가 있는 날이면 일부러 이 잣나무 밑에서 낮잠을 청하는 시늉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한다.
최항은 그렇게 장원급제하여 집현전부수찬이 되었고, 세종의 명을 받아 정인지(鄭麟趾)·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으며, 1444년 집현전교리로서 〈오례의주 五禮儀注〉 편찬 및 〈운회 韻會〉 번역에 참여했다. 1445년에는 집현전응교로서 〈용비어천가〉·〈동국정운〉·〈훈민정음해례〉 등을 짓는 데 참여했다. 1447년 집현전직제학이 되었으며 서연관(書筵官)으로 세자를 보도(輔導)했다. [출처 : 브리태니커]

 

묘당의 설명

 

 

 

성균관 명륜당

 

 

성균관의 건물은 오색단청을 하지 않고 오직 음양의 이치를 담은 동쪽을 상징하는 청룡을 뜻하는 푸른색과 서쪽을 상징하는 백호를 뜻하는 흰색, 남쪽을 상징하는 주작을 뜻하는 붉은색과 북쪽을 상징하는 현무를 뜻하는 검은색 등 단색을 사용할 뿐이다. 창원향교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건물에는 절처럼 예쁜 문양을 넣은 단청을 하는데 이는 건물을 짓는 업자들이 공사비를 올리기 위한 것이란 설명을 성균관을 안내해주신 황의욱 상임전례위원으로부터 들었다.

 

 

 

 

명륜당 뒤편에는 유생들이 문(文)뿐만 아니라 무(武)도 겸비하기 위해 활을 쏘는 연습을 하고 화살과 활을 보관했던 육일각(六一閣)이 있다.

 

 

 

그 옆에 가장 좋은 위치에 성균관의 근본이 되는 책을 보관하는 존경각( 尊經閣)이 있다.

 

성균관 동제 모습

 

 

성균관 유생들이 기숙을 하는 동제와 서제는 불을 때는 아궁이가 두 개씩 있는데 연기가 나오는 굴뚝이 없어 선조들의 건축술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