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밀양 명례리의 전설과 낙주재의 이방중 묘 출토명기 및 지석

천부인권 2014. 3. 16. 06:16

 

 

<둑길이 끝나는 곳이 도암이고, 둑위에 있는 건물은 오토캠핑장의 관리동이다.>

 

밀양 명례리(明禮里)는 낙동강의 용진(龍津)나루로 인해 물류이동이 많았고 너른 하남평야에서 곡식과 싱싱한 채소를 생산하니 다른 고을에 비해 부유했을 것이다. 따라서 다른 지역보다 빠르게 문화가 발전한 마을로 창원 천주교 신앙의 고향인 밀양 명례성지가 자리를 하고 있다.

 

 

 

<상촌마을 입구에 있는 광명사라는 절의 모습>

 

 

<명례성지 주차장>

 

 

<낙동강을 바라보는 당집>

 

이곳 명례리는 낙동강의 은혜를 입은 반면 강물로 인한 시련도 많았을 것이다. 낙동강의 둑을 따라 가다보면 도암(道岩)부락 앞에서부터 낙동강 둑 안쪽으로 길이 나있다. 이 길을 따라 가면 상촌부락의 명례성지주차장에 도착하게 되는데 동쪽으로 15m떨어진 길 좌측 언덕에 허름한 당집이 하나 덩그러니 서있다. 을축년 대홍수와 이 당집은 관계가 있는데 을축년 대홍수는 19254차례에 걸쳐 일어난 홍수 인데 한강과 낙동강 유역의 피해가 특히 심했다. 위키백과사전에는 ‘4차례의 홍수로 전국에서 사망자 647, 6천여 호의 가옥이 유실되고 17천여 호의 가옥이 붕괴되고 46천호의 가옥은 침수되었다. 32천단보의 논과 67천 단보의 밭이 유실되었다. 홍수로 인한 피해액만 1300만원에 달하였는데 이는 당시 조선총독부의 1년 예산의 58%에 달하는 금액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집 정면>

 

이 당집에 얽힌 설화는 다음과 같다. 을축년(乙丑年)에 대홍수가 나서 온 천지가 물바다로 변하자 그 피해를 알기 위해 낙동강의 나루인 이곳 명례리에 풍헌이 파견되었다. 피해조사를 하고 있던 풍헌이 어느 날 밤에 꿈을 꾸니 한 처녀가 나타나서 하는 말이 "이번 홍수(洪水)에 목숨을 잃었는데, 둑 밑에 있는 저의 시체를 거두어 주시면 은혜를 갚겠다."고 하고 사라졌다. 잠을 깬 풍헌은 그 꿈이 이상하여 둑 밑에 가 보니, 과연 홍수(洪水)에 목숨을 잃은 처녀의 시체가 있었다. 다음 날 마을 사람들과 의논을 하여 시신을 거두어 주기로 하고 장례 준비를 하였다. 그날 밤에도 또 꿈에 나타나서 하는 말이 "나의 고향은 합천(陜川) 모처인데 시누이, 올케간에 나물캐러 갔다가 홍수(洪水)를 만나 표류(漂流)를 했는데, 오빠가 올케만 구출해 가고 나를 돌보지 않고 가버렸습니다. 한많은 시체이오니 어느 산봉우리이든지 만리풍(萬里風)이 스쳐가는 곳에 묻어 달라"고 하고는 사라졌다. 그래서 풍헌은 처녀의 요구대로 이 마을에서 마주 보이는 상남면 어은동 뒷 산봉우리에 자리 잡아 묻어 주었다. 그 후부터 이 마을에서는 아이들의 천연두나 모든 질병이 없어지고 온 마을이 평화롭게 살게 되었다고 전한다. 또 이 처녀무덤에 벌초를 하면 운()이 좋아진다고 해서 서로 다투어 벌초를 했다고 한다. 그 후에 마을에서는 처녀의 원혼을 달려 주는 당집을 세우고, 매년 음력 정월 보름날이면 지금도 고사를 지내고 있다. [출처 : 다음카페 명례초등학교 34]

 

 

 

<당집 내부 모습>

 

 

당집이 바라보는 방향은 동쪽으로 내부를 열어보니 촛대와 향로가 있을 뿐 휑하니 빈 공간이었다. 명례성지가 확장을 거듭하여 언덕의 경사면까지 사들였는데 이곳에 있는 작은 당집 역시 명례성지의 소유물이 되었지 싶다. 따라서 이 당집의 운명은 지켜봐야 할 것이다.

 

 

 

<낙동강에서 바라본 낙주재>

 

당집에서 모퉁이를 돌면 밀양시 하남읍 명례리 1118번지에 위치한 낙주재(洛州齋)가 화려하게 나타난다. 낙주재(洛州齋)는 최근에 대규모로 중건(重建)을 하여 웅장하게 지었다. 다듬은 화강암으로 담을 둘렀고 외삼문을 비롯하여 4동의 한옥이 언덕의 경사면에 배치가 되어있다. 낙동강(洛東江)을 굽어보는 낙주재에 오르면 변화무상한 강물처럼 이른 봄에는 남녘의 초록(草綠) 물결과 어울리고, 여름엔 시원한 강바람이 나그네를 위로하며, 가을엔 낙조가 아름다움을 전하고, 겨울엔 낙동강의 은빛 물결이 너무나 아름답다.

 

 

 

 

낙주재(洛洲齋)는 태종의 둘째왕자인 효령대군의 7대손인 이번(李番1575~1633)에게 16대 임금 인조가 내린 사액(賜額) ()이다. 인조가 내린 어필(御筆) 사액 호인 낙주재(洛洲齋)라는 글은 정당에 걸려 있다. 이곳 낙동강가 마을인 명례리에 낙주재가 들어선 이유는 광해군(光海君)이 부왕의 계비인 인목대비를 적장자 영창대군의 생모라는 죄로 서궁(西宮)에 유폐한 사건인 서궁(西宮)의 변()에 이번(李番1575~1633)이 항절(抗節)하여 이거(移居)한 후 지금까지 전주(全州) 이씨(李氏) 일파가 세거해 오고 있는 곳이다.

 

 

 

 

 

<사진출처 문화재청>

 

낙주재에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58호인 이방중 묘 출토명기 및 지석(李芳仲墓出土明器誌石)이 있다.

이 유물은 전주(全州) 이씨(李氏)의 선산(先山)이 있는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원흥리일대가 개발로 인해 19753월에 통훈대부(通訓大夫) 이방중(李芳仲) 평택현감과 병조참판(兵曹參判)이사재(李思齋)의 묘를 이장(李葬)하기 위해서 작업을 하던 중 발굴된 것으로 19966월경에 밀양시 하남읍 명례리에 있는 종가(宗家) 재실(齋室)인 낙주재(洛州齋)에 옮겨온 것이다.

이방중의 묘에서는 지석(誌石:가로20CM, 세로25CM, 두께1.2CM)7점과 백자명기(白磁明器: 최대높이7.5CM, 최소크기1.5-2CM, 최대구경7.3CM, 최소구경2CM)13점이 나왔고, 이사재의 묘에서는 명기 30점이 나왔는데, 지석에는 이방중의 생몰(生沒)년월일, 행적(行蹟),묘의 좌향(坐向)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문장의 말미에는 선조 22(1589)을 나타내는(만력 178(萬曆十七年八月))이라 새겨져 있다.

명기는 조선시대의 계세사상(繼世思想)과 경조사상(慶弔思想)및 묘지 매장문화(埋葬文化)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지석은 일부 균열로 인한 접합의 흔적이 있고 주사(朱砂)로 쓴 문구(文句)일부가 퇴색(退色)되어 있지만 명기는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출처 : 다음카페 내 고향 밀양]

 

 

 

 

낙주재를 둘러 낙동강의 둑이 있는 상촌마을 방향으로 오면 길가에 김절부유인제주고씨지려(金節婦孺人濟州高氏之閭)라 세긴 비석(碑石)을 만난다. 고씨(高氏) 절부(節婦)가 병든 남편을 간호하고 죽게된 애절한 사연이 비문(碑文)에 기록되었는데 도주(道州) 김재화(金在華)가 찬()하고, 창산(昌山) 조원환(曺元煥)이 글씨를 썼다고 기록해 두었다.

 

 

<김절부유인제주고씨지려(金節婦孺人濟州高氏之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