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창원 천주교 신앙의 고향 밀양 명례성지

천부인권 2014. 3. 13. 19:03

 

 

<2014/3/9 마을에서 바라본 명례성지>

 

낙동강의 범람이 하남평야를 이루고 너른 들판의 한 자락에 언덕이 있어 마을이 형성되니, 낙동강을 따라 나라의 조운과 숱한 고깃배들이 드나들고 물류 이동의 요충지 구실을 하게 된 곳이 명례리(明禮里)이다. 밀주지(密州誌)의 기록에 의하면 용진(龍津)은 멱례촌(覓禮村) 앞에 있다.”고 한다.

 

 

 

 

<언덕 위 명례성지>

 

 

밀양시 하남읍 명례리 1122번지에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26호로 지정된 창원시 마산교구의 영적 고향이며, 신앙의 원천인 명례성지가 있는 곳이다. 명례리(明禮里)는 하남읍에서 마을로 갈 때 들머리에 있는 도암(道岩), 본동을 이루고 있는 상촌(上村), 평편한 지형에 마을을 이루고 있다하여 이름 붙여진 평지(平地)부락이 합해서 만들어진 마을이다.

 

 

 

 

물류의 이동만큼이나 문화의 이동도 많았던 이곳에는 경남지역에서 가장 일찍 설립된 천주교회 본당(1897)이 세워졌는데 순교자 신석복(申錫福, 1828~1866) 마르코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명례리 1209번지는 현 명례성지 바로 뒤쪽 언덕으로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순교한 신석복의 출생지이다. 병인박해(丙寅迫害)는 고종 3년이던 1866년에 벌어진 일로 당시 6천명을 처형한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신석복은 소금과 누룩을 판매하는 상인으로 카톨릭 신자였는데 창원 마포로 장사를 나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김해 가산에서 기다리고 있던 대구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밀양으로 압송 되었다. 밀양에 하루를 머무르면서 무수한 형벌을 받았으며, 이 소식을 들은 형제들이 석방을 위해 포졸들을 포섭하려고 하자 한 푼도 포졸들에게 주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대구감형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저를 놓아주신다 해도 다시 천주교를 신봉할 것입니다.”라 말을 하여 그의 나이 39세가 되던 1866331(음력 215)에 교수형을 당했다.

 

 

 

 

그의 가족이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에 안장하려 했지만 동네 유지들이 후환이 두려워 반대를 하자 강건너 한림정 뒤산 노루목에 안장했다. 그리고 110여 년이 지난 1975121일 진영 본당 신자들은 순교자의 묘가 야산에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본당 공원묘역(현 김해시 진영읍 여래리)으로 이장했다.

 

 

 

 

<내부 정면 모습>

 

명례 본당의 초대 신부는 김대건, 최양업 신부에 이어 한국에서 세 번째 신부가 된 강성삼(1866~1903) 신부이다. 그 후 1926년 명례에 부임한 권영조 신부는 1928년 기와지붕의 성전을 봉헌하였는데 안타깝게도 19368월에 있었던 태풍 3693호로 인해 천파되어 주춧돌만 남아있다. 현재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등록된 건물은 당시 파괴된 성당의 잔해를 사용하여 원형을 축소하여 1938년에 복원한 것이다.

 

 

 

<남녀의 자리 배치를 분리하기 위해 중앙에 세개의 기둥을 세우고 가로로 나무를 질러 두었다. 처음에는 판자로 가려두었다 한다.>

 

성전의 내부는 45.59평방미터로 전국에 몇 개뿐인 오래된 구조이며, 남녀가 따로 앉도록 구분되어 있는 구조인데 초기 한국천주교회의 전통양식을 보존하고 있다. 지금은 성당 주위 땅을 매입하여 정리를 하여 제법 성지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몇 년 전에만 해도 마르코 순교자 신석복의 생가지엔 소 축사로 사용하고 있었다.

 

 

 

 

19368월에 있었던 태풍 3693호로 인해 남아 있는 주춧돌은 사각의 마름모 꼴이며 시멘트로 만들었다.

 

 

<낙동강에서 바라 본 명례성지>

 

 

 

신석복 순교자의 생가 터엔 자연 암석에 글을 새겨 놓아 두었다.

 

 

 

앞으로 성역화 작업을 계속하기 위하여 조감도를 그려 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