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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천 북부동 비석군 – 현감 서명빈 사적비

천부인권 2017. 1. 2. 18:30



<2016.11.9. 현감 서명빈 사적비>

 

옛 국도 2호선변(웅천로)인 진해구 북부동 595-1에는 11기의 비석군이 도로를 따라 일렬로 서있다. 비석군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좌측에서 일곱 번째 비석은 螭首(이수 : 용이나 교룡이 있는 것) 모양이며 재질은 사암을 다듬어 세웠다. 이수의 높이는 60cm, 73cm, 두께 96cm이고, 비신의 높이는 167cm, 68.5cm,, 두께 16.5cm이다.





비의 전면에는 가로로 嘉善大夫行縣監徐公事蹟碑(가선대부행현감서공사적비)라 새기고 사적의 내용은 세로로 음각했다.


가선대부 전 현감 서명빈 사적비

공의 이름은 명빈이고 자는 질보, 본관은 달성이니 서울 사람이다. 여러 대에 걸쳐 관계에 진출하였으나 청렴결백함을 가문의 전통으로 이어왔는데 공은 어려서부터 이러한 가문의 가르침을 받아 일찍이 과거에 올랐다.

차차 벼슬이 높아져 홍문관의 교리인 박사와 사인으로 제수 되었으니 공의 됨됨이와 뛰어난 인품을 높이 평가하신 조태감에 의해서였다.

임금의 특명으로 개성유수의 요직을 맡았으며 기미년(1739) 봄에 부제학으로 불러 들이셨으나 공에 대해서 연이어 상소를 올려 하므로 내침을 당하시어 그 해 오월에 웅천()현감의 보직을 받아 오시게 되었다.

공은 항상 공적인 업무를 먼저 보시고 학문을 숭상하시며 효제를 신령하시며 민폐를 총합하여 일에 따라서 혁거하시니 민정에 임하신 지 1년 만에 공의 은혜는 백리태고까지 미쳤다.

다음 해 이른 봄에 조정의 부름으로 다시 부제학에 제수되어 공께서는 서울로 가시게 되었으니 공이 가신 후 고을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공에 대한 생각이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으니 공에 대한 시를 남겨 동향으로 삼는다면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있으리라고 하며 그 것이 없어지지 않도록 우리 고장의 돌을 구해서 비에 새겨 고갯마루에 세우면 누구나 사모할 수 있지 않겠는가하니 모두가 찬성하므로 이에 공이 섣달 그믐밤에 읊은 백운시와 간편 같은 것을 다시 적어 정미에 기록되길 기다리며 이 비가 천고에 남기를 바란다.

영조16(1740) 경신년 시월 하순



 



 

徐明彬(서명빈; 1692~1763)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달성이며 자는 질보이고, 시호는 靖文(정문)이다. 1723년 정시문과에 급제한 후 파직과 복직을 거듭하며 여러 벼슬을 두루 거쳐 대사헌, 의금부사, 한성부판윤, 좌참잔 등을 역임하였으며 17395월에 부제학이 되었으나 여러 유신들의 곡인소혐에 의해 웅천현감으로 좌천 되었다. 1748(영조 24) 7월 이조 판서가 되었다. 같은 해 12월 누차 소명을 어겼다는 대간의 탄핵으로 경주 부윤으로 나아갔다가 이듬해 대사헌이 되었다. 1756(영조 32) 4월에 영재(營財)[재물에 탐을 냄]를 이유로 파직되기도 했으나, 다시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웅천현감으로 재직할 때 섣달 그믐밤에 읊은 시가 웅천읍지에 전해 오는데 그 내용은 임금을 칭송하는 글이다.





출처 및 참조

진해의 비문(1996)-진해시

디지털창원문화대전

웅천현읍지(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