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봉수대

통영 미륵산봉수를 찾아

천부인권 2018. 1. 24. 09:23



2005.12.18. 미륵산에서 본 통영시가


우리나라 남해의 리아시스식 해안의 전형을 보여 주는 통영은 아름다운 항구도시로 알려졌지만 수군통제영이 있던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역할이 큰 지역이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를 중심으로 전쟁을 치룬 역사적인 곳이다. 그 중심에 미륵산봉수대가 위치한다. 당시에는 이 미륵도가 고성군의 관할지역 이었기에 ‘미륵산봉화’는 고성현(固城縣)의 기록에서 찾아야 한다.





2005년 당시엔 케이블카 공사가 한창이던 때로 용화사로 지나는 등산로를 통해 미륵산(彌勒山 해발 461m) 정상에 올랐다. 통영 미륵산 봉수는 미륵산 제2봉(450m)에 위치하며 면적은 490㎡ 정도 이다. 지금은 케이블카를 타고 가거나 통영시 산양읍 영운리 915에 위치한 미래사까지 차량으로 올라간 후 약 1km 등산을 하면 된다.





1592년 7월 임진년 난중일기에는 임진왜란 당시는 미륵산봉수대가 사용되고 있지 않았음을 짐작하는 기록이 나온다. 이 기록은 임진난 당시에는 이곳 미륵도가 고성군에 속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당포성지가 이순신장군이 이끄는 조선수군의 주 이동로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7월 6일(양력 8월 12일)<장계에서> 동풍이 세차게 불어 향해가 어려웠다. 고성 땅 당포에 이르자 날이 저물어서 나무하고 물 긷고 있을 때, 피란하여 산으로 올랐던 그 섬의 목동 김천손이 우리 함대를 바라보고는 급히 달려 와서 말했다. “적의 대·중·소선을 합하여 일흔 여 척이 오늘 낮 두시쯤 거제 영등포 앞 바다에서 거제와 고성의 경계인 견내량(見乃梁)에 이르러 머무르고 있다.”고 함으로 다시금 여러 장수들에게 신칙했다.] 다음 날 그 유명한 학익진을 펼치고 한산대첩을 이룬 역사적인 날이다.





세종 7년(1425)에 편찬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고성현 봉수조에는 고성현의 봉수를 이렇게 기록 했다.
미륵산 봉화-현의 남쪽 49리 90보쯤에 있는데 동쪽으로 보면 거제현의 가라산 봉화가 있고 거리가 수로로 30리이다. 북쪽으로 보면 우산봉화가 있는데 거리가 육로로 50리 90보이다.
우산봉화로부터 서쪽으로 보면 좌이산 봉화가 있는데 거리가 육로로 60리 60보이고 북쪽으로 보면 천왕점 봉화가 있는데 거리가 40리 380보이다.
천왕점봉화로부터 동쪽으로 보면 곡산봉화가 있는데 거리가 30리 307보이다.
곡산봉화로부터 동쪽으로 보면 진해현 가을포봉화가 있는데 거리가 50리이다.
좌이산봉화로부터 서쪽으로 보면 진주관내 각산향 주산봉화가 있는데 거리가 53리 22보이다.
[彌勒山烽火 在縣南四十九里九十步許東望巨濟縣地加羅山烽火相去水路三十里 北望縣地牛山烽火相去陸路五十里五十步 自牛山烽火西望 佐耳山烽火相去陸路六十里六十步 北望天王岾烽火相去四十里三百八十步 自天王岾烽火東望曲山烽火相去三十里三百七步 自曲山烽火東望鎭海縣地 加乙浦烽火相去五十里 自佐耳山烽火西望晉州任內 角山鄕主山烽火相去五十三里二十二步]


세종실록 권150 지리지 경상도 진주목 고성현 기록에는 –봉화가 5곳이니, 미륵산은 현 남쪽에 있는데 동쪽으로 거제 가라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우산에 응한다. 우산은 서쪽으로 좌이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천왕점에 응한다. 천왕점은 동쪽으로 곡산에 응한다. 곡산은 동쪽으로 진해 가을포에 응한다. 좌이산은 서쪽으로 진주 각산향의 주산에 응한다.
[烽火五處, 彌勒山在縣南, 東准巨濟加羅山, 北准牛山, 牛山 西准佐耳山, 北准天王岾, 天王岾 東准曲山, 曲山 東准鎭海加乙浦 佐耳山 西准晉州角山鄕主山]





예종 원년(1469)에 편찬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 고성현 연대봉화(煙臺烽火)에 따르면
현의 동쪽에 있는 미륵산 봉화는 남쪽으로 거제 가라산 봉화와 서로 마주 보고, 서쪽으로는 현 동쪽의 우산봉화와 마주본다. [縣東彌勒山烽火 南與巨濟加羅山烽火相准 西與縣東牛山烽火相准]
우산봉화는 서쪽으로 좌이산 봉화와 서로 마주본다. [牛山烽火 西與佐耳山烽火相准]
좌이산 봉화는 서쪽으로 진주 각산봉화와 마주 보고, 북쪽으로는 천왕점 봉화와 마주 보고, 동쪽으로는 곡산 봉화와 마주 보고, 또 진해 가을포 봉화와 마주 본다. [佐耳山烽火 西與晉州角山烽火相准 北與天王岾烽火相准 東與曲山烽火相准 又與鎭海加乙浦烽火相准]





성종 12년(1481) 50권으로 편찬하고, 중종 25년(1530)에 55권 25책으로 간행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고성현 봉수조에는 이렇게 기록 했다.
미륵산봉수 동쪽으로 거제현 계룡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우산에 응한다. [彌勒山烽燧 東應巨濟縣鷄龍山 北應牛山]
우산봉수 남쪽으로 미륵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좌이산에 응하며 북쪽으로 천왕점에 응한다. [牛山烽燧 南應彌勒山 西應佐耳山 北應天王岾]
천왕점봉수 동쪽으로 곡산에 응하고 남쪽으로 우산에 응한다. [天王岾烽燧 東應曲山 南應牛山]
곡산봉수 동쪽으로 진해현 가을포에 응하고 서쪽으로 천왕점에 응한다. [曲山烽燧 東應鎭海縣加乙浦 西應天王岾]
좌이산봉수 동쪽으로 우산에 응한다. [佐耳山烽燧 東應牛山]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 신증 된지 130년이 지난 현종 때 편찬 된 지리지로 임진왜란 후의 상항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이 자료의 고성현 봉수조에는 이렇게 기록했다.
미륵산봉수 동쪽으로 거제현 계룡산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우산에 응한다. [彌勒山烽燧 東應巨濟縣鷄龍山 北應牛山]
우산봉수 남쪽으로는 미륵산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좌이산에 응하며 북쪽으로는 천왕점에 응한다. [牛山烽燧 南應彌勒山 西應佐耳山 北應天王岾]
천왕점봉수 동쪽으로는 곡산에 응하고 남쪽으로는 우산에 응한다. [天王岾烽燧 東應曲山 南應牛山]
곡산봉수 동쪽으로 진해현 가을포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천왕점에 응한다. [曲山烽燧 東應鎭海縣加乙浦 西應天王岾]
좌이산봉수 동쪽으로 우산에 응하고 있다. [佐耳山烽燧 東應牛山]





영조 때(1757)각 읍지를 수취하여 성책한 여지도서(輿地圖書)의 김해진관 고성현 봉수조에는 이렇게 기록 했다.
미륵산봉수 현 남쪽 67리에 있다. 동쪽으로 거제 계룡산에 응하여 북쪽으로 우산에 알리며 서로의 거리는 수로로 25리이다. [彌勒山烽燧 在縣南六十七里 東應巨濟鷄龍山 北報牛山相距水路二十五里]
우산봉수 현 남쪽 30리에 있다. 남으로 미륵산에 응하여 서로 좌이산에 알리며 서로의 거리는 북으로 수로로 30리이고 북으로 천왕점에 알리며 서로의 거리는 육로로 30리이다. [牛山烽燧 在縣南三十里 南應彌勒山 西報佐耳山相距水路三十里 北報天王岾相距陸路三十里]
천왕점봉수 현 북쪽 15리에 있다. 남으로 우산봉수에 응하여 동으로 곡산에 알리는데 서로의 거리는 육로로 30리이다. [天王岾烽燧 在縣南十五里 南應牛山 東報曲山相距陸路三十里]
곡산봉수 현 동쪽 20리에 있다. 서쪽으로 천왕점에 응하여 동으로 진해 가을포봉수에 알리는데 서로의 거리는 수로로 30리이다. [曲山烽燧 在縣東二十里 西應天王岾 東報鎭海加乙浦烽相距水路三十里]
좌이산봉수 현 서쪽 30리에 있다. 동쪽으로 우산에 응하고 남으로 사량진 주봉에 응하며 별도로 북으로 진주 각산을 바라보며 알리는데 서로의 거리는 육로로 30리 이다. [佐耳山烽燧 在縣西三十里東應牛山 南應蛇梁鎭主峰別望北報晉州角山相距陸路三十里]
순조 32년(1832)에 편찬한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의 고성읍지 봉수조에는 이렇게 기록 한다.
미륵산 동쪽으로는 거제 가라산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본부의 우산에 응한다. [彌勒山 東應巨濟府加羅山 北應本府牛山]
우산 남쪽으로 미륵산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천왕산에 응한다. [牛山 南應彌勒山 北應天王山]
천왕산 남으로는 우산에 응하고 동쪽으로는 곡산에 응한다. [天王山 南應牛山 東應曲山]
곡산 동으로 진해 갈포봉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천왕산에 응한다. [曲山 東應鎭海乫浦峰 西應天王山]
좌이산 남쪽으로 사량주봉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진주 각산에 응한다. 별장 5인이 있다. [佐耳山 南應蛇梁主峰 西應晉州角山 別將五人]





1940년 간행한 교남지(嶠南誌) 고성군 봉수조에는 이처럼 기록 했다.
미조산봉수 남쪽으로 거제 가라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우산에 알리는데 서로의 거리가 수로 25리이다. [彌助山烽燧 南應巨濟加羅山 北報牛山相距水路二十五里]
우산봉수 남쪽으로 미조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천왕산에 알리는데 서로의 거리가 육로로 30리이다. [牛山烽燧 南應彌助山 北報天王山相距陸路三十里]
천왕점봉수 남쪽으로 우산에 응하고 동족으로는 곡산에 알리는데 서로의 거리가 육로로 30리이다. [天王岾烽燧 南應牛山 東報曲山相距陸路三十里]
곡산봉수 서쪽으로 천왕점에 응하고 동쪽으로는 진해 가을포에 알리는데 서로 거리가 30리 이다. [曲山烽燧 西應天王岾 東報鎭海加乙浦相距三十里]
좌이산봉수 남쪽으로 사량진에 응하고 북족으로는 진주 각산에 알린다. [佐耳山烽燧 南應蛇梁鎭 北報晉州角山]





경상남도 기념물 제210호로 지정 된 통영시 산양읍 영운리 산 189에 위치한 통영 미륵산봉수대(統營 彌勒山烽燧臺) 안내판 기록에 의하면 『봉수는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횃불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전통시대의 통신제도이다. 봉수는 기록상으로 고려 중시(12,3세기)에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이 체계적으로 정비된 때는 왜구의 침입이 극심해진 고려 말 이후부터 조선 초기에 들어서였다. 봉수대는 각각 일정한 거리를 두고 시야가 확 트인 산에 설치하였다. 평상시에는 하나의 불꽃이나 연기, 적이 바다에 나타나면 둘, 적이 해안에 접근해오면 셋, 바다에서 접전이 이루어지면 넷, 육지에 상륙했을 경우 다섯 개의 불꽃이나 연기를 피워 올렸다.
남해안 일대와 대마도가 한눈에 들어오는 아주 좋은 장소에 위치한 이곳 봉수대가 언제 설치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곳은 조선시대 다섯 곳의 중심 봉수로 가운데 제2봉수로에 속하는 곳으로 남쪽으로 거제의 가라산 봉수대와 연결 되고 북쪽으로 도산면에 있는 우산(牛山 해발305m)봉수와 연결 되었다.』


* 거제 강망산봉수 거제 옥녀봉봉수거제 가라산봉한산도 한배곶봉수 통영 미륵산봉수 통영 우산봉수 고성 천왕점봉수고성 곡산봉수 ⇔  창원 가을포봉수 ⇔ 함안 파산봉수 ⇔ 의령 가막산봉수 ⇔ 초계 미타산봉수 합천군 미숭산봉수[봉수노선은 제2거 간봉(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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