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기장 일광해수욕장 입구 삼성리 장승 당집과 비석군

천부인권 2019. 1. 22. 11:07



△ 2019.1.20. 일광해수욕장 입구의 장승 당집


기장군 일광면 삼성리 200-21번지는 옛 국도 14호도로가 지나던 곳이나 지금은 기장군 일광면의 시내도로처럼 사용되는 도로이다. 삼성리(三聖里) 지명은 1914년 3월 1일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조전동(棗田洞)과 후동리(後洞里)을 합쳐 처음 등장한다. 이곳 도로변 낮은 담장 안에는 100여년의 세월을 지켜온 우람한 곰솔 서너 그루와 그 보다 작은 곰솔 3그루가 자리를 하고 있고, 곰솔 숲 안쪽으로 화강석으로 만든 삼성리 장승 당집이 있다. 당집 앞에는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을 세긴 장승이 호위무사처럼 지키고 있다. 마을 북쪽 동해 남부선 철로 건너편 소나무 숲속에 할배 당산과 할매 당산이 있다. 이 당집에서는 매년 정월 14일 밤 자정 제를 올린다. 용왕제는 마을에서 서쪽 동해 남부선 철로 건너 약 150m 지점의 샘이골 샘에서 지낸다. 호랑이 그림이 붙어 있는 당집의 철문을 열어 보니 장승 모양의 당신(堂神)만 모시고 있다. 이 당신은 삼성리를 지키는 토속 신이기도 하며 일광해수욕장을 수호하는 당신일 것으로 추측한다.
당집 우측에는 6기의 비석군이 있다. 기록을 살펴보니 그 중 정몽주유촉비(鄭夢周遺躅碑)는 40m 떨어진 세룡암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라 한다.




△ 2019.1.20. 일광해수욕장 입구의 장승과 당집



△ 2019.1.20. 일광해수욕장 입구 당집 내부의 당신



△ 2019.1.20. 일광해수욕장 입구의 장승 당집 옆 비석군



정몽주유촉비(鄭夢周遺躅碑) 뒷면


정몽주 유촉비(鄭夢周遺躅碑)가 위치한 곳은 기장군 일광면 삼성리 200-21번지이다. 이 곳은 옛 국도 14호선 길가에 있는 것이지만 지금은 일광면의 시내도로가 되어버린 곳이다.
이 비는 1955년 고을 유생들이 삼성리가 고려 말의 유학자이며 정치가인 정몽주[1337~1392]가 머물던 곳이므로 서원을 세우자는 의논이 오랫동안 있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음을 기록으로 남겨 훗날을 기약하려는 의미로 세웠다.
석비로서 방형(方形)이고 이수(螭首)는 없다. 비문의 글씨는 해서체이다. 비의 크기는 높이 138㎝, 너비 48㎝, 두께 14㎝이다.

비의 앞면에는 ‘포은 정선생 유촉비(圃隱鄭先生遺躅碑)’라는 비제(碑題)가 적혀 있고, 뒷면에는 아래처럼 기록했다.
此先生遺躅也 建院之議久而未遑 一鄕儒紳伐石記事 以竢百世公議云 開國五百六十四年乙亥六月日立
後學承訓郞章陵參奉海州吳奉根書
이곳은 선생의 발길이 닿은 곳이다. 서원을 세우자는 의논이 오래되었지만 아직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온 고을의 유생들이 돌을 캐어 이 일을 기록해 둠으로써 백세 뒤의 공론을 기다린다. 개국 564년 을해년 6월에 세우다.
후학 승훈랑, 장릉 참봉 해주 오봉근이 쓰다.




현감함후영석구민선정비(縣監咸侯英錫捄民善政碑) 뒷면


현감함후영석구민선정비(縣監咸侯英錫捄民善政碑)는 위쪽부분이 훼손된 상태이나 많은 부분의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 후기 현감 함영석(咸英錫)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기장읍지』 읍선생안에 의하면 함영석이 1834년(순조 34) 8월에 부임하여 1836년 12월에 임기 만료로 교체 되었다. 이 비는 1836년(현종 2) 정월 함영석이 재임 중 기장 지역 아홉 구포의 과도한 부담을 덜어 주고 민생을 회복시킨 선정을 기려 백성들이 세웠다. 비의 크기는 높이 75㎝, 너비 33㎝, 두께 9㎝이다.
비의 전면에는 “□縣監咸侯英錫捄民善政□”라 적고 좌우에 찬문을 했으며 뒷면에는 세운 연도를 기록했다.
□縣監咸侯英錫捄民善政□ 현감함후영석구민선정
□貢替備 □民蘇醒 과중한 공물 줄여 다른 걸로 대체하니 고을의 백성들 죽음에서 깨어났다.
千秋不忘 片碣是銘 천추가 지난 훗날까지 잊지 않고자 한 조각 비갈에 그 이름 새겨두네.
道光丙申元月日 九浦並立 도광 병신년(1836) 정월 아홉 구포에서 함께 세우다.




△ 뒤쪽 4기의 비석군 모습



행현감오공영석애민구해불망비(行縣監吳公榮錫愛民捄海不㤀碑)


이 비는 기장 현감을 역임한 오영석(吳榮錫)의 공덕을 기려 세운 비석이며 오영석은 1892년(고종 29) 10월에 부임하여 1894년 9월까지 현감을 역임했다. 비신(碑身)의 크기는 높이 102㎝, 너비 36㎝, 두께 14㎝이다.
行縣監吳公榮錫愛民捄海不㤀碑 행현감오공영석애민구해불망비
牟縣雉馴 潮州鰐退 모현 땅 꿩들이 순하게 길들 듯 조주 지방 악어들이 순순히 물러나 듯
一片貞珉 千古不晦 한 조각 곧게 뻗은 옥 같은 돌비석 오랜 세월 지나도 흐려지지 않으리.
癸巳七月日立 監役 金□才 黃大申 頭民 金 □在 계사년(1893) 7월 일 세우다. 감역 김□재, 황대신 두민 김□재




행현감홍공찬영세불망비(行縣監洪公灒永世不忘碑)


행현감홍공찬영세불망비(行縣監洪公灒永世不忘碑)는 현감 홍찬(洪灒)이 어진 정치를 베푼 공적이 있으므로 광서 8년(1882, 고종 19) 곡포의 백성들이 그를 기려 세운 것이다. 글씨는 해서체이고, 『기장읍지』 읍선생안에 의하면 고종 17년(1880) 6월에 부임하여 고종 19년 4월에 좌병영우후에 임명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신(碑身)의 크기는 높이 80.5㎝, 너비 27.5㎝, 두께 10.5㎝이다.
我使仁政 恩洽九浦 우리 사또 베푸신 어진 정치로 그 은혜 구포까지 두루 미쳤네.
一片磨石 千秋是銘 다듬은 한 조각 돌비석 위에 천추토록 전하고자 그 이름 새겨 두었네.
光緖八年壬午九月日 谷浦立 광서 8년 임오년 9월 일 곡포에 세우다.




진상색권의연구해불망비(進上色權義淵救海不㤀碑)


진상색권의연구해불망비(進上色權義淵救海不㤀碑)는 향리 권의연(權義淵)이 기아 상태에 있던 기장현의 어민들을 구한 것을 기려 홍찬()이 기장 현감으로 재직하던 1882년(고종 19, 광서 8)에 곡포의 백성들이 세운 비이다. 권의연은 자가 천줄(天茁)이고 기장 명정의숙을 세웠던 권상중의 아버지이다. 비신(碑身)의 크기는 높이 58.5㎝, 너비 33.5㎝, 두께 10㎝이다.
進上色權義淵救海不㤀碑 진상색권의연구해불망비
千金厚恩 何以報德 천금 같이 후덕한 은혜, 베푸신 큰 덕 어찌 갚으랴
九浦咸眼 省此銘石 아홉 포구 모두가 보았으니 은덕 새긴 비석 정성껏 살피세.
光緖八年壬午九月日 谷浦立碑 광서 8년(1882) 임오년 9월 일 곡포에 비를 세우다.




진상색장성규구해불망비(進上色張性珪救海不㤀碑)


진상색장성규구해불망비(進上色張性珪救海不㤀碑)는 기장현의 향리를 지낸 장성규(張性珪) 선정을 기려 1836년(현종 2, 도광 16)에 백성들이 세운 것이다. 비신(碑身)의 크기는 높이 58.5㎝, 너비 33.5㎝, 두께 10㎝이다.
進上色張性珪救海不㤀碑 진상색장성규구해불망비¹⁾
咸曰良吏 自減任況 모든 사람들이 말하기를 "선한 아전이 자신의 봉급 줄여 어민들을 도왔다."하네
始覩超俉 惠洽九浦 이제사 훌륭한 관리를 만나게 되어서 그 은혜가 구포 백성에 널리 펴졌다네.
道光丙申正月 日 九浦並立 도광 병신년(1836) 1월 구포 주민이 함께 세우다.


【주석】

진상색장성규구해불망비¹⁾ : 나라에 진상을 맡은 아전(색리) 장성규가 어민들을 도운 것을 잊지 못해 세운 비

해문 : 조여 이현호(調汝 李絃浩)


출처 및 참조
경기문화재단-경기학문화센터/정몽주유촉비
기장의 금석문-기장문화원(2017.12.22.)/송영우
부산역사문화대전-삼성리 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