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함양 용유담은 강현의 땅이라.

천부인권 2018. 11. 11. 22:10



2018.11.03 함양 용유교 위에서 본 용유담


이번에 환경부는 우리나라에서 댐을 건설하여 물이용을 하겠다는 12개의 댐건설계획을 전면 백지화 했다. 함양 용유담(咸陽 龍㳺潭)에 건설하려던 댐 역시 계획이 취소되었다. 이곳 함양에서 댐을 반대하던 주민들이 경남의 환경운동엽합 회원들을 초대하여 조촐한 기념행사를 했다. 환경운동연합회원들이 금계마을에서 용유담까지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 동안 지나가는 자동차를 얻어 타고 용유담에 먼저 도착하여 나의 14대조 진주강씨 진천군파 강대수(姜大遂)의 이름이 적혀 있다는 바위를 찾아 나섰다. 제법 이곳 용유담을 찾아 왔지만 선조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바위를 보지 못해 항상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오롯이 이 마암비(磨巖碑)을 찾는데 시간을 다 썼다.



2018.11.3 용유교와 독조대(獨釣臺)를 바라보며


용유교 위에서 9마리의 용 중 1마리가 승천하지 못하고 아직도 용유담에 살고 있다는 전설을 간직한 용유담의 가을 풍경을 담았다. 용유담은 신선이 노니는 별천지로 예부터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으로 여름이면 각처의 행락객들이 휴식을 찾아 모여들어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화강암 암괴가 절벽을 이루고, 청아한 물빛에 비친 산 그림자는 가히 선경이라 불릴만 하다. 마적도사와 당나귀의 전설이 바위 이름으로 남아 있고 또한 선대의 마암비가 있다니 어찌 허투루 지나겠는가. 아직은 미완인 반야정사(般若精舍)를 지나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계곡 속으로 올라가니 나중에 알게 됐지만 한 지점에는 원앙의 흔적이 지천에 있다. 계곡에서 용유교와 독조대(獨釣臺)를 향해 사진을 남겼다.




강현의 땅임을 알리는 마암비


조상의 이름이 새겨진 마암비를 만나니 이곳의 주인이 누구인지 한 눈에 알게 한다. 마암비의 상부에는 지붕돌이 얹혀있어 아래쪽 글씨를 새긴 곳에는 비가 맞지 않도록 되어있다. 비로부터 보호되는 중요한 그곳에 음각으로 글씨를 새겼고 글씨 안쪽에 붉은 색칠을 하였다.
‘인묘 은사혜평강공현지지(仁廟 恩賜惠平姜公顯之地)’라는 글귀가 지붕돌 아래에 위치하는데 “인종(仁宗 재위 1544-1545)이 강현지(姜顯之 1485-1553)에게 하사한 땅"이라는 뜻이다. 진주강씨 관서대장군공파(關西大將軍公派) 시조는 강이식(姜以式)이지만 일세(一世)는 원노(元老)이다. 이 마암비의 주인공은 원노(元老)의 11세손(世孫)으로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현지(顯之), 호는 신안(新安). 산청 출신. 강흥국(姜興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강행(姜行)이고, 아버지는 강문회(姜文會)이며, 어머니는 김윤(金允)의 딸이다.
용유담을 하사 받은 이야기는 진주강씨 강지주의 문집에 나오는 얘기로 당나라 때 이태백을 한번 보고 적선인(謫仙人하늘에서 귀양 온 신선)이라 한 하지장이 낙향할 때 황제 현종이 경호(鏡湖=鑑湖) 한 굽이를 하사했다는 일화에 견주어, 강씨 문중에서는 매우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일로 여기고 있다.



진주강씨 관서대장군공파 1세 강원노 영정



용유담 마암비에 새긴 강현과 그 후손 이름 및 일두, 탁영, 남명, 한사의 이름을 새김


그 아래에는 강현의 13세 종손 순기(順基)의 이름을 적었고, 11세 손(孫) 재성(在誠), 재범(在範), 재남(在南), 재갑(在甲) 형제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 좌측에는 세로로 ‘문헌공일두정선생(文憲公一蠹鄭先生)’, ‘문민공탁영김선생(文愍公濯纓金先生)’, ‘문정공남명조선생(文貞公南冥曺先生)’가 있고 아래에는 장구소(杖屨所)라는 각자가 있어 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 탁영 김일손(濯纓 金馹孫), 남명 조식(南冥 曹植)이 놀던 곳임을 알리고 있다.
그 좌측에는 ‘한사강선생대수영귀소(寒沙姜先生大遂詠歸所)’라 적어 한사 강대수(寒沙 姜大遂)가 가장 이루고 싶은 삶의 이상향으로 생각하는 장소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영귀(詠歸)란 논어 선진편(論語 先進篇)에 나오는 「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에서 나온 말로  “늦은 봄 날씨 따뜻한 때 봄옷이 마련되면 대 여섯 명의 어른과 예닐곱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기수(沂水)에 나가 목욕하고 무우(舞雩)의 제단 터에서 바람을 쏘인 뒤 노래하며 돌아오는 삶을 살고 싶다.”고 한데서 나왔다.




강현의 초상과 신도비


진주강씨 관서대장군공파(關西大將軍公派) 족보에는 강현(姜顯)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字 顯之, 號 新安, 諡號 惠平公 成宗乙巳一四八五年十二月二十八日生 中宗丁丑一五一七年許寬榜文科 官 翰林待敎檢閱舍人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五道觀察位至 正憲大夫吏曹判書兼同知中樞府事 知經筵春秋館 成均館事世子左賓客五衛都總管 贈諡號 惠平公恩賜三郡田民 有文集 明宗癸丑一五五三年十一月十日卒
墓 京畿道華城市正南面德節里山一0三∽七番地 乾坐 有碑石 床石文人石長明燈神道碑 配貞夫人丹陽禹氏 父 敵愾功臣僉樞奠山 忌正月十二日 墓 先舅逍遙公兆案山 癸坐 配貞夫人和順崔氏 父 訓導世轍 祖 司諫漢候 曾祖 左贊成 諡文靖公善門 外祖 縣監載寧李昇 忌四月二十八日 生二男三女 墓 乾位雙墳


강현(姜顯)의 자(字)는 현지(顯之)이고, 호는 신안(新安)이며, 시호(諡號)는 혜평공(惠平公)이다. 성종 을사(成宗 乙巳)1485년 12월 18일 생이고 중종 정축(中宗 丁丑)1517년 문과에 급제했다. 벼슬은 한림 대교 검열 사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오도관찰위에 이르렀으며, 정헌대부이조판서 겸 동지중추부사 지경연춘추관 성균관사 세자좌빈객 오위도총관을 지냈다. 시호는 혜평공에 증직되고 3군의 전민을 하사받았다. 문집이 있다. 명종 계축 1553년 11월 10일에 돌아가셨다. 
묘는 경기도 화성시 정남면 덕절리 산 103~7번지 건좌이며, 비석이 있다. 상석 문인석 장명등 신도비가 갖추어져있다. 배우자는 정부인 단양우씨이고, 아버지는 적개공신「조선 세조(世祖) 13년(1467)에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한 공신」 첨추(僉知中樞府事) 우전산(禹奠山)이다. 제삿날은 1월 12일이다. 묘는 돌아가신 시아버지 소요공은 조안산의 계좌이고, 배우자는 정부인 화순최씨이다. 아버지는 훈도 세철이고, 조부는 사간 한후(漢候)이며, 증조부는 좌찬성 시호는 문정공 선문(善門)이다. 외조부는 현감 재령 이승(李昇)이고, 제삿날은 4월 28일이며, 2남 3녀를 두었다. 묘는 건위이며, 쌍분이다.






인묘 은사혜평강공현지지(仁廟 恩賜惠平姜公顯之地)의 우측에는 ‘문충공점필재김선생(文忠公佔畢齋金先生)’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다.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 1431~1492) 역시 이곳 용유담에서 그 흔적을 남겼다. 이처럼 용유담은 영남학파의 거유들이 놀던 장소이다. 김종직은 1472년 지리산을 산행하면서 쓴 '유두류록(遊頭流錄)'은 훗날 문인들이 산행기를 쓸 때 기준이 되는 훌륭한 책이다.




용유담(龍㳺潭) 각자



곳곳의 바위에는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자연이 갈아 만든 멋진 곡선을 이루는 지리산 범돌에도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지금도 기우제를 지내는 이곳은 용이 강을 건너가는 모양을 하고 있다.



용유담(龍㳺潭)의 돌개구멍


바위 흠집에 모래와 자갈이 물살의 힘에 의해 돌고돌아 바위에 구멍을 낸 것으로 억겁의 세월이 만든 예술이다.




용유담 마암비와 독조대 용유교가 있는 풍경


출처 및 참조
진주강씨 관서대장군공파 족보-관서대장군공파 대종회(2007.3)/가문닷컴
산,산줄기 그리고...-현오 권태화/지리산 벽송사에서 용유담까지(다음 블로그)
한국민족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