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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전면 곡안의 해사 이일장 유적비

천부인권 2018. 10. 6. 10:59



2016.10.17. 진전면 곡안마을의 해사이공유적비 모습


진전면 곡안리 61-3번지에는 1993년 11월에 성주이씨 족인들이 그들의 창원 입향조(入鄕祖) 이일장공(李日章公)의 유적을 기록한 ‘해사이공유적비(海槎李公遺蹟碑)’가 있다. 해사공은 약관의 나이에 성균관에 올랐으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충무공의 휘하에서 전란에 임했고, 기유년에 대과에 합격하고 44세에 고성현령으로 부임하여 직분을 다하고 초계로 갔다가 돌아가셨다. 그의 유지로 진전면 곡안(谷安)으로 이주한 것은 그의 아들인 모와공(慕窩公)이다. 곡안마을 뒤쪽 산기슭에는 성주이씨 재실일 해사정(海槎亭)이 있다. 이 비문은 진와(進窩) 이헌주(李憲柱 1911~2001)가 찬했다.





海槎李公遺蹟碑
鎭海之谷安里李氏之庄也 其先有海槎公 以行學志槩 聞于世旣歿 而墓碑成矣 已又亭舍建矣 掌令金麟燮恭山宋浚弼兩賢嘗爲之銘且記 而公之平生事行 旣已盡著矣 今玆諸后孫相與謀議 治一穹石將奉樹于里巷之首 丙淳徵所刻之文於憲柱 噫今世之人擧 紛紛然功利 是趍不知祖先之事爲何事 而獨李氏之用心如此 苟非篤於誠而能然乎 乃感歎 而不顧僭妄 以銘與記爲案本 而爲之敍其略曰 公諱日章字晦叔海槎其號也 公自少誠孝篤至未嘗有子弟過 稍長從參奉李春窩學旣 又就正於磊谷先生安公之門 舋舋乎曰 有令聲弱冠 升泮宮同僚皆敬重之 壬辰島夷猖獗鑾輿播遷 公扼腕憤慨曰 主辱國危豈可晏然坐視乎 從忠武公陣中 有戰捷之功 策原從勳 己酉登大科 時白沙李文忠公主試 公居第二人 以得人賀也 由正字歷成均博士典籍 司憲府監察 戶曹佐郎出 爲幽谷丞慶尙都事 四十四年陞通訓 行固城縣令 及斁倫之論起 公不與其議 爲憸小所忤遂罷敀草溪 及癸亥改玉特拜同福縣令 時則際會淸明 群賢彙征可以有爲 而公己勞倦矣 遂解紱還鄕 琴書自適怡然以沒齒焉 李氏先世星州人 鼻祖諱純由 而新羅卿相岡僕靖 累傳至諱長庚 麗朝封京山府院君 元朝追封隴西郡 公子曰兆年政堂文學 封星山候 諡文烈號梅雲堂 道德節行輝映千古 退陶李先生稱之 爲五百年一人 子曰褒侍中諡敬元 史稱循循蹈禮 子曰仁任侍中廣平府院君 諡文肅號勝巖 子曰珉佐郞於公間七世 高祖諱膣隱德不仕 曾祖諱膺有孝行 祖諱成達宣敎郎訓導 考諱信吉進士 贈左承旨號墨庵 妣淑夫人草溪卞氏 參奉仲琬女 公以宣祖壬申三月初三日生 卒年未詳 忌正月初九日 墓在草溪治西澤昇洞 後長嶝山子坐之原 配淑人陜川李氏乙參知政事 良眞后別葬于治東阿幕洞壬坐 男馣聞階通德郞號慕窩 孫男麟角麟定有德行 孫女尹尙五掌樂正金光憲必妻以下躍 公嘗愛谷安之山水絶勝欲移卜 而未果子慕窩公始踐遺志 而自後子姓繁衍盈遽 又世以孝友文學相承襲無替 爲鄕邦所艶誦可驗其里仁之美 而公一生爲善之報赤不可誣也 始后孫之請文也 其族親邁堂晋洛君來余紹介 余以病癈未卽應副則 又以書與面督之至 再三不己今文成 而君則己古不及見矣 悲夫銘以約之其辭曰 李於五東寔爲巨閥 歷麗器韓名賢輩出 有卓文烈益振厥聲流其氣津 公乃挻生孝由天植 學承師傳 早捷巍科譽聞蔚然 內歷淸要 外典州牧所在盡忠 優有聲績 西宮之變彛倫幾斁 不流不附秉 義之固用 是見忤 歸于鄕 逮夫改玉天曰 更光上眷方隆象皆屬目 未竟其用老矣 可惜 跡公一生忠孝兩備 以此令終俯仰 何愧繩繩有後勿替益 昌炎炎傳火豈云薪亡 旣竪阡碣 又治斯碑刻辭昭績以永厥垂
癸酉陽復節 星山李憲柱撰


해사이공유적비
진해 곡안리는 이씨들의 세장(世庄)이다. 그 선조에 해사공(海槎公)이 있었다. 수행(修行)과 학문(學問)을 지개(志槩)로서 세상에 알려 졌는데 돌아가신 후 묘비가 만들어졌으며 벌써 또 정사(亭舍)도 세웠다. 장령인 김인섭(金麟燮)과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 양현(兩賢)이 일찍이 그 명문(銘文)과 기문(記文)을 지어서 공의 평생의 사행(事行)을 이미 죄다 저술(著述)하였다. 금년에 여러 후손들이 함께 모의하여 큰 돌을 다듬어 마을 앞에 받들어 세우려고 후손 병순군(丙淳君)이 헌주(憲柱)에게 새길 글월을 징구(徵求)하였다. 아! 지금 세상 사람들이 모두 분분연(紛紛然)하게 공리(功利)에 치달아 조선(祖先)을 섬김이 어떠한 일인지 알지 못하는데 이씨들만이 마음씀이 이와 같으니 진실로 성효(誠孝)가 독실(篤實)함이 아니라면 그러할 수 있으랴 감탄(感歎)되어서 참망(僭妄)됨을 돌아보지 않고 묘갈명과 기문을 근거로 하여서 그 개요를 서술하니 곧 공의 휘(諱)는 일장(日章), 자(字)는 회숙(晦叔)이며 해사(海槎)는 그의 호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독실하고 지극(至極)하여 자제(子弟)로서의 잘못이 일찍이 없었다. 좀 자라서는 참봉인 이춘와(李春窩)에게 수학하고 또 뇌곡선생(磊谷先生) 안공의 문하에서 열심히 수업하여 날로 훌륭한 명성을 가져 약관(弱冠)의 나이에 성균관에 올라 동료들이 모두 존경하고 존중하였다. 임진년에 섬나라 오랑캐가 창궐(猖獗)하여 오가(五駕)가 파천(播遷)하니 공은 주먹을 불끈 쥐고 분개해서 말하기를 임금이 욕되고 나라가 위태(危殆)로운데 어찌 안연(晏然)히 좌시할 수 있으랴 하고 충무공(忠武公)의 진중에 종군(從軍)하여 전승(戰勝)의 훈공(勳功)이 있어서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기유(己酉)년에 대과에 급제하였다. 당시 백사 이문충공(李文忠公)이 과시(科試)를 주관하였는데 공이 2등을 차지하여 훌륭한 사람을 얻었음을 축하하였다. 정자(正字)로부터 성균관 박사 전적(典籍) 사헌부감찰 호조좌랑을 거쳐 외직(外職)으로 나가서 유곡승(幽谷丞)과 경상도사(慶尙都事)가 되었으며 44세에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승차(陞次)하여 행직(行職)으로 고성현령(固城縣令)이 되었다. 패륜(敗倫)의 논의(論議)가 일자 공은 그 논의에 찬동하지 아니하여 간사(姦邪)한 소인들에게 거슬리게 되어 마침내 벼슬을 그만두고 초계(草溪)로 돌아왔다. 계해년(癸亥年)에 이르러 정례(政禮)가 바뀌어 동복현령(同福縣令)에 특임(特任)되었다. 당시는 청명한 세상을 맞아 군현들이 함께 나아가 큰일을 할만하였는데 공은 이미 노권(勞倦)해져 마침내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금서(琴書)로서 자적(自適)하여 즐겁게 생애(生涯)를 마쳤다. 이씨들의 선대는 성주인(星州人)이다. 시조의 휘는 순유(純由)이며 신라(新羅)의 경상(卿相)으로써 고려에 신복(臣僕)하지 않고 자정(自靖)하였다. 누대(累代)를 전(傳)해 내려와 휘 장경(長庚)에 이른다. 고려조(高麗朝)에서 경산부원군(京山府院君)에 봉하고 원나라 조정에서 완서군공(豌西郡公)에 추봉(追封)하였다. 아들은 조년(兆年)이라 정당문학(政堂文學)이며 성산후에 봉해졌으며 시호(諡號)는 문열(文烈)이며 호는 매운당(梅雲堂)이다. 도덕절행(道德節行)이 천고에 빛나 퇴도(退陶) 이선생이 그를 고려(高麗)오백년에 제일인이라고 칭송하였다. 아들은 포(褒)이라 시중(侍中)이며 시호는 경원(敬元)이다. 사적(史籍)에 순순도례(循循蹈禮)하였다고 칭찬(稱讚)하였다. 아들은 인임(仁任)이라 시중이며 광평부원군(廣平府院君)이며 시호는 문숙(文肅), 호는 승암(勝巖)이다. 아들은 민(珉)이다. 좌랑(佐郞)이며 공에게 7대조이다. 고조(高祖)는 휘(諱) 질(膣)이며 덕(德)을 감추어 벼슬하지 아니하였다. 증조(曾祖)는 휘(諱) 응(膺)이며 효행이 있었다. 조(祖)는 휘(諱) 성달(成達)이며 선교랑(宣敎郎) 훈도(訓導)다. 고(考)는 휘(諱) 신길(信吉)이라 진사이며 증좌승지(贈左承旨)이며 호는묵암(墨庵)이다. 비(妣)는 숙부인 초계변씨이며 참봉 중완(仲琬)의 따님이다. 공은 선조 임신(壬申) 3월 초3일에 출생했다. 돌아가신 해는 알 수 없으며 기일(忌日)은 1월 초9일이다. 묘(墓)는 초계현 소재지 서쪽인 택승동(澤昇洞) 뒤 장등산(長嶝山) 자좌(子坐)에 있다. 배우자는 숙인(淑人) 합천이씨(陜川李氏)이며 참지정사(參知政事) 양진(良眞)의 후손이다. 현소재지 동쪽인 아막동(阿幕洞)에 별장(別葬)하였으며 임좌(壬坐)이다. 남(男)은 암문(馣聞)이며 품계(品階)는 통덕랑(通德郞) 호는 모와(慕窩)이다. 손남(孫男)은 인각(麟角) 인정(麟定)이며 덕행이 있다. 손녀(孫女)는 윤상오(尹尙五)와 장악원정(掌樂院正)인 김광헌필(金光憲必)에게 출가(出嫁)하였다. 이하는 생약(省躍)한다. 공은 늘 곡안(谷安)의 산수가 절승(絶勝)함을 좋아하여 이거(移居)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아들인 모와공(慕窩公)이 비로소 유지(遺志)를 실천하였다. 그리해서부터 뒤로 자손들이 번연(繁衍)하여 마을에 가득하고 또한 대대로 효우(孝友)와 문학을 이어받아 폐(廢)하지 않하여 향방(鄕邦)에서 염송(艶誦)되어 그 이인(里仁)의 아름다움을 징험(徵驗)할 수 있다. 그리고 공이 일생에 선행을 한 갚음있음을 또한 속이지 못한다. 당초 후손들이 글월을 청할 때 그들의 족친(族親)인 매당(邁堂) 진락군(晋洛君)이 나에게와서 소개하였다. 내가 병들어 곧바로 부응(副應)하지 못하자 또 서신과 면대(面對)로서 독촉(督促)함이 재삼(再三)에 이르러 마지 아니하였다. 이제 글월을 완성하였는데 군은 이미 죽어 볼 수 없으니 슬퍼구려. 요약(要約)해서 명문을 짓거늘 그 문사(文辭)는 곧 다음과 같나니 이씨는 우리 동방(東方)에서 참으로 거벌(巨閥)이다. 고려조를 거쳐 한국에 이르기까지 명현(名賢)이 배출(輩出)하였도다. 탁탁(卓卓)한 문열공(文烈公)은 더욱 더 그 명성을 떨쳐 그 진기(津氣)를 내리사 공께서 이어 빼어 나셨도다. 이성(李誠)은 하늘에서 심겨졌으며 학문은 스승의 전수를 이어 받아 일찍이 대과급제(大科及第)하여 명성이 성대(盛大)하였도다. 내직(內職)으로 청요직(淸要職)을 거치고 외직으로 주목(州牧)을 맡아 재임하는 곳에 충성(忠誠)을 다하여 명성과 공적(功績)이 많도다. 서궁(西宮)의 변괴는 이륜(彛倫)의 패(敗)함이라 패거리가 되지 아니하고 붙들고 쫓지 아니하여 의(義)로움을 잡기에 굳건하였도다. 이로써 거슬러서 벼슬을 그만 두고 귀향하였네 전례(正禮)가 바뀜에 이르러서 해는 다시 빛나 임금의 돌보심이 바야흐로 두터워져 중인(衆人)들이 모두 주시(注視)하였는데 그 소용(所用)을 다하지 못하고 늙어버렸으니 가석(可惜)하도다. 공의 일생을 추적하니 충과 효를 겸비(兼備)하였도다. 이것으로써 훌륭하게 끝마침 하였으니 굽어보고 우러러보아 어찌 부끄러울소냐 많고 많은 후손(后孫)들 쇠(衰)하지 않고 더욱 더 번창하며 활활 타올라 전해오는 신화(薪火)는 어찌 섶이 없어졌다고 하랴. 묘갈(墓碣)을 이미 세웠는데 또 이 비를 다듬어 글월을 새겨 행적(行績)을 밝혀서 후세에 전하노라.
계유(癸酉 1993) 11월 성산 이헌주(李憲柱) 찬하다.


참망(僭妄) : 제 분수에 넘쳐 망령 됨

이헌주(李憲柱 1911~2001)공의 호는 진와(進窩)이고, 한학자로 문필이 뛰어났고 문집 6권이 있다. 근대 영남의 큰 유학자이며, 경북 고령읍 내 관동에 사셨고 성산인(星山人)이다.





출처 및 참고
성주이씨대종회-인물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2004.1)-삼덕정판인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