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봉수대

밀양 남산봉수 위치는 종남산 정상이 아닐 수 있다.

천부인권 2019. 11. 19. 06:29



2017.10.31 밀양 종남산 정상의 봉수 복원 모습



옛 군사 통신시설인 봉수(烽燧)의 설치는 봉수대(烽燧臺)가 서로 마주보고 대응할 수 있는 위치에 건설 됐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또한 연변봉수(緣邊烽燧)는 서로 마주보고 대응하는 봉수 외에도 그물망처럼 곳곳에서 다른 봉수대를 볼 수 있는 위치에 설치했다. 전쟁이 발생하여 최초의 봉수가 피어오르면 그물망처럼 짜여 진 봉수가 일사분란하게 대응하도록 건설되어 있다.
봉수((烽燧)가 기록상 실재로 작동 됐던 임진왜란의 경우를 보면 봉수대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다. 임진왜란 최초의 봉화불은 가덕진의 말곳망망대(응봉봉수)였고 연이어 천성연대봉수(天城煙臺烽燧)에서 봉홧불이 올랐다. 이 가덕도봉수(加德島烽燧)와 대응하는 봉수는 ‘교남지권지73(嶠南誌卷之七十三) 웅천군(熊川郡)의 기록’을 보면 김해 성화례산봉수(金海 省火禮山烽燧)와 웅천 사화랑산봉수(熊川 沙火郎山烽燧)와 대응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기록에는 대응 봉수로 나타나지 않지만 거제도 강망산봉수(巨濟島 江望山烽燧)에서 천성연대봉수가 빤히 보인다. 이처럼 봉수대는 그물망처럼 꼼꼼하게 짜여 진 전쟁에 대비했던 군사 통신시설이었다.
적과 바다를 두고 설치한 연변봉수가 그물망처럼 짜여 진 봉수라면 내륙의 내지봉수(內地烽燧)는 한양의 목멱산(남산)봉수에 전쟁의 상태를 알려주는 중간 연결 고리와 같다고 할 것이다. 전투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연변봉수에 비해 그래도 내륙의 내지봉수는 상항이 덜 급하기 때문에 그물망처럼 꼼꼼하지는 않아도 봉수가 전달되는 방향은 남에서 북으로 향해 거의 일직선상에 설치했다.
밀양부를 통과하는 4곳에 설치된 밀양의 봉수는 영남좌도연제의 제2거 소노선의 8간봉선(嶺南左道連梯 第二炬 所路線 八間烽線)에 위치하는 곳이다. 만약 이 밀양을 통과하는 4곳 중 한곳에서 서로 마주하는 대응봉수와 대응하지 못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예를 들어 김해 자암봉수의 신호를 백산봉수에서 대응하지 못했다면 다음의 위치로 전달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우려는 불식하도록 봉수대 위치를 정했으며 그 다음 봉수나 그 뒤쪽의 봉수가 신호를 받을 수 있는 장소에 봉수대를 설치했다. 즉 백산봉수의 봉홧불이 없어도 밀양 남산봉수나 추화산의 성황봉수에서 김해 자암산봉수의 봉홧불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봉수대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2019.11.17 밀양시 상남면 남산리 366-10번지의 밀양 남산봉수 추정지-시누대가 있는 곳



밀양 남산봉수 추정지 남측 출입구 쪽



밀양 남산봉수 추정지 서북쪽 담장의 무너진 모습



밀양 남산봉수 추정지 남동쪽



다음 위성사진 봉수대 위치



밀양 남산봉수 추정지 위치 다음 위성사진



이러한 봉화대(烽火臺)의 위치 선정을 볼 때 종남산 정상에 복원한 종남산봉수대에서 대응 봉수가 위치한 백산의 정상부만 보인다는 것은 종남산 정상이 봉화대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이러한 사실을 뒷밭침하는 자료들은 고지도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 사실들을 나열해 보면 해동지도(海東地圖:1750년 초), 비변사인방안지도(備邊司印方眼地圖:1745-1765년 추정), 여지도(輿地圖:1787~1795년), 광여도(廣輿圖:1800년 추정), 지승(地乘) 등에는 종남산(終南山;663.5m)과 남산봉수(南山烽燧;350.5m)를 함께 기록하여 종남산과 남산봉수는 위치가 다르다는 것을 지도의 그림으로 확실히 했다. 또한 동여도(東輿圖:1856~1861년),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1861년), 1872년지방도에는 남산봉수(南山烽燧)라 기록하여 종남산이라는 기록은 하지 않았다. 한편 조선지도(朝鮮地圖:1767∼1776년)나 청구요람(靑邱要覽:1834년)에는 종남봉수(終南烽燧)라 기록했다.
옛 지도들을 종합해 보면 남산봉수는 종남산과 무관하지 않는 위치에 있었으며 종남산 정상부가 아니라 백산봉수(栢山烽燧)나 추화산((推火山;242.4m)의 성황봉수(城隍烽燧)와 마주하는 위치에 설치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유(類)의 산 정상부가 아니라 산 허리부분에 설치한 봉수대가 존재하는데 웅천 장복산봉수와 진해 가을포봉수, 창원 성황당봉수, 고성 천왕점봉수 등 다양하게 나타난다.



해동지도(海東地圖:1750년 초)-규장각한국학연구원 캡쳐



해동지도 –  밀양 봉수대 주기
○ 盆項烽燧 北距淸道南山峰三十里去應 南距城隍峰十五里來應
○ 城隍烽燧 北距盆項峰十五里去應 南距南山峰二十里來應
○ 南山烽燧 北距城隍峰二十里去應 南距栢山二十里來應
○ 栢山烽燧 應北距南山峰二十里去應 南距金海自菴峰二十里來

○ 분항봉수는 북쪽으로 청도 남산봉과 20리 떨어졌으며 신호를 보내서 응한다. 남쪽으로 성황봉(추화산)과 15리 떨어졌으며 신호를 받아서 응한다.
○ 성황봉수(추화산)는 북쪽으로 분항봉과 15리 떨어졌으며 신호를 보내서 응한다. 남쪽으로 남산봉과 20리 떨어졌으며 신호를 받아서 응한다.
○ 남산봉수는 북쪽으로 성황봉과 20리 떨어졌으며 신호를 보내서 응한다. 남쪽으로 백산과 20리 떨어졌으며 신호를 받아서 응한다.
○ 백산봉수는 북쪽으로 남산봉과 20리 떨어졌으며 신호를 보내서 응한다. 남쪽으로 김해 자암봉과 20리 떨어졌으며 신호를 받는다.



해동지도-「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2015년 『경남지역 봉수Ⅲ』캡쳐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2015년 『경남지역 봉수Ⅲ』에서 밀양 남산봉수대을 기록했는데 그 내용을 보면 1997년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조사한 것을 인용했다. 여기에는 종남산 정상에 봉수대 추정 석렬의 확인과 고려·조선시대 자기편, 기와편, 마형토우 등의 출토를 그 근거로 삼았다.
그 때 그들도 고지도들을 참고 했으며 해동지도의 종남산표시와 남산봉수의 표시를 보고 남산봉수를 지금의 팔봉산 정상에서 찾으려 했으나 실패 했다고 기록 한다. 그러면서 해동지도 속의 남산봉수를 추정지로 기록하고 복원을 종남산 정상에 하면서 종남산 정상에서 발굴했다는 평면도를 제시했다. 이때부터 모든 자료는 종남산 정상이 남산봉수라 확신하며 봉수의 연조를 1개 만들고 복원했다. 이 책의 기록에는 기초조사 과정 때 나온 근거들은 대부분은 군부대가 헬기장을 조성하면서 만든 구조물들이며 정상부 바깥에는 약 7m 길이의 석렬이 남아 있는데, 이것을 봉수대의 석렬로 추정하였다고 한다.
이런 정도의 유적으로 봉수대라 주장했다는 것은 종남산 정상이 봉수대가 아니라 해도 봉수대라고 주장해야 하는 근거를 마련한 정도에 불과하다. 발굴도면을 보면 이곳이 봉수대의 돌이라고 주장할 만 한 형태의 석렬은 보이지 않고 헬기장을 만든 형태의 석렬 등만 나타난다.




발굴당시의 평면도



해동지도(海東地圖:1750년 초), 비변사인방안지도(備邊司印方眼地圖:1745-1765년 추정), 여지도(輿地圖:1787~1795년), 광여도(廣輿圖:1800년 추정) 등 4개의 고지도에서 종남산과 남산봉수의 위치가 다르다고 표시하고 있음에도 이를 추정이라 하면서 무시했다. 동아대학교 박물관 관계자들은 아마도 옛 선인들이 지도를 만들면서 지명까지 엉터리로 만들었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학자라 주장하는 이런 사람들의 아집 때문에 장복산봉수가 이제야 장복산의 정상부가 아니라 장복산 정상에서 마야령 방향으로 내려온 6부 능선에 위치했음을 알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덕분에 내가 장복산봉수 위치를 관에 알린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밀양시 상남면 남산리 366-10번지가 남산봉수대 터라 주장하는 필명이 ‘레나’라는 밀양의 향토사학자가 있다. 그는 다양한 방법으로 남산봉수의 위치를 밝히려 노력했으나 남산봉수를 복원할 당시 이미 공사를 진행하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은 굳어졌기 때문에 소귀에 경 읽기가 되었으리라 본다.


밀양시 상남면 남산리 366-10번지는 종남산(664m)에서 동쪽으로 1.17km 아래쪽이며 해발고도는 360m 높이이다. 옛날 상남면 남산리 사람들이 이 봉화고개를 통해 밀양의 장터로 오갔던 이동로이기도 했던 곳이며 이곳 원주민들은 지금도 이곳이 봉수대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곳에는 봉수대의 표식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느티나무 노거수가 있었는데 주민의 말에 의하면 대구 사람이 몰래 베어갔다고 했다.
봉수군의 집터는 임도개설로 파괴된 듯 보였고 채소를 길렀던 밭은 평삭된 형태로 임도 아래쪽에 남아 있다. 봉수지로 추정되는 터는 남쪽 방향에 입구가 있으나 동쪽방향에서 오르도록 되어있다. 짐승들이 해를 입히지 못하도록 방어막 구실을 했을 돌담장은 조금씩 무너지긴 했으나 직사각형의 형태로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 있다. 돌담장의 폭은 일반 개인집의 담장보다 두꺼워 이곳이 원주민들이 주장했던 밀양 남산봉수 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남산봉수지로 추정 되는 이곳은 돌담장 내부와 밖의 일부는 시누대로 꽉 차있어 접근이 불가하다.
남산봉수 유지라 추정되는 이곳 종남산 6부 능선의 돌담장은 누가 보더라도 사람이 쌓은 흔적이며 담장의 규모나 축성방식을 볼 때 밀양의 분항봉수 유지와 많이 닮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신호를 받는 백산봉수 터와 추화산의 성황봉수로 신호를 보내는 두 곳이 보이는 지점이란 것이다.


문화재청에 전화를 했더니 055-359-5640 전화번호를 안내해 주어 전화를 했는데 통화자가 자료를 달라한다. 이 전화를 인터넷으로 알아보니 밀양시청 문화관광과이다.



비변사인방안지도(備邊司印方眼地圖:1745-1765년 추정)-규장각한국학연구원 캡쳐



비변사인방안지도 – 밀양 봉수대 주기
○ 栢山烽臺距官門四十里 南距金海自菴峰三十里陸路來應 北距南山峰二十里陸路去應
○ 南山烽臺距官門二十里 南距栢山峰二十里陸路來應 北距城隍峰二十里陸路去應
○ 城隍烽臺距官門五里 南距南山峰二十里陸路來應 北距盆項峰十五里陸路去應
○ 盆項烽臺距官門二十里 南距城隍峰十五里陸路來應 北距淸道南山峰三十里陸路去應

○ 백산봉대는 현의 관문과 40리 떨어졌다. 남쪽으로 김해 자암봉과 육로로 30리 떨어졌으며 신호를 받아서 응한다. 북쪽으로 남산봉과 육로로 20리 떨어졌으며 신호를 보내서 응한다.
○ 남산봉대는 현의 관문과 20리 떨어졌다. 남쪽으로 백산봉과 육로로 20리 떨어졌으며 신호를 받아서 응한다. 북쪽으로 성황봉과 육로로 20리 떨어졌으며 신호를 보내서 응한다.
○ 성황봉대는 현의 관문과 5리 떨어졌다. 남쪽으로 남산봉과 육로로 20리 떨어졌으며 신호를 받아서 응한다. 북쪽으로 분항봉과 육로로 15리 떨어졌으며 신호를 보내서 응한다.
○ 분항봉대는 현의 관문과 20리 떨어졌다. 남쪽으로 성황봉과 육로로 15리 떨어졌으며 신호를 받아서 응한다. 북쪽으로 청도 남산봉과 육로로 30리 떨어졌으며 신호를 보내서 응한다.




여지도(輿地圖:1787~1795년)-규장각한국학연구원 캡쳐



광여도(廣輿圖:1800년 추정)-규장각한국학연구원 캡쳐



지승(地乘)-밀양부 주기-규장각한국학연구원 캡쳐


烽臺四處 烽軍一百名 봉수대는 4곳이고 봉수군인은 100명이다.




동여도(東輿圖:1856~1861년)-규장각한국학연구원 캡쳐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1861년)-규장각한국학연구원 캡쳐



1872년지방도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캡쳐



조선지도(朝鮮地圖:1767∼1776년)-규장각한국학연구원 캡쳐



청구요람(靑邱要覽:1834년)-규장각한국학연구원 캡쳐


출처

경남지역 봉수Ⅲ-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2015)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