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7. 미조 망운산봉수
미조 망운산봉수를 답사하기 위해 인터넷으로 지번과 위성사진을 살펴보고 ‘남해군 미조면 미조리 산 33-2번지’를 입력하여 출발을 했다. 창원에서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사천시와 창선도를 거쳐 미조에서 시작하여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을 연결하는 국도 19호도로의 출발지인 미조를 향해 달렸다. 남해도의 아름다운 19호 국도는 남해 동쪽면의 비경들을 잘 보여 준다. 유명세를 타고 있는 독일마을과 물건리방풍림도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지고, 일출사진 포인트인 항도마을도 지난다. 어느 듯 미조중학교 정문 앞을 지나 미조 망운산 등산의 출발지가 되는 산 중턱에 도착했다. 지도상에는 나오지 않으나 39사단에서 운영하는 군사시설이 있다. 주차를 할 수 있는 시설도 있고 산불감시원의 차량으로 보이는 차도 주차를 하고 있어 제대로 찾아왔음을 알게 한다.
군부대 입구에서 미조 망운산 정상이 보인다.
등산로 입구를 찾다가 군사시설을 마주하고 왼쪽의 길을 택하여 걸어가니 얼마지 않아 남해바래길 안내표지가 나타난다. 정상까지 0.8km라 적혀있어 자신하고 걸으니 등산로가 자꾸만 해안가로 내려간다. 그렇게 안내표지의 방향으로 300m지점까지 내려가니 남해바래길 표지가 이제는 정산까지 0.5km라 기록하고 있다. 이제부터는 가파른 등산로라 나무계단이 연속적으로 설치된 구간이다. 어차피 산으로 가는 길은 깔딱고개는 있기 마련이다 위안하고 막바지 길을 치달아 능선에 오르니 이제 정상까지 200m 남았다는 남해바래길 안내표지가 서있다. 그런데 처음 출발지에서 산릉선을 타고 올라오는 길이 나타난다. 이제 200m남은 등산로는 올라온 등산로처럼 험하지 않고 밋밋한 등산길이다.
내려 올 때는 이곳에서 올라왔던 길이 아니라 능선을 따라 내려가니 군부대 후문에 이르고 철망에 의지해 출발지에 도착했다. 출발지에서는 특별한 안내표식이 없어 이용하지 못했지만 출발지인 군부대 앞에서 정상을 바라보고 우측 철망을 따라 가면 능선으로 가는 등산로를 이용할 수 있다.
군부대 좌측으로 가다가 만난 남해 바래길 표지
미조면 송정리 산 311-2번지 망운산 정상에는 남해 미조 망운산봉수(南海 彌助 望雲山烽燧)가 있다. 봉수가 문화재로 등록되지도 않았고, 복구되지 않았지만 원형을 많이 간직한 모습으로 미조 망운산 정상에 위치한 미조 망운산봉수는 봉수의 돌무더기 정상에 지적측량 기준점이 되는 삼각점이 있다. 이곳에서 위치기반 고도계는 해발 261m를 기록하고, GPS고도계는 295m를 가리키며 「위도 34°42′50″N 경도 128°02′05″E」를 표시한다. 다음지도 「그곳에 오르고 싶은 산, 준·희」가 붙여둔 작은 안내판에는 ‘남해 산줄기 망운산 286.2m’라 기록해 두었다. 국토지리정보원 국토맵 지형도(50k) 2015년에는 미조 망운산의 해발고도를 287.3m라 기록하고 있다.
300m 내려가서 만난 남해 바래길 표지
남해 미조 망운산봉수에 대한 옛 기록을 찾아보니 아래의 기록들처럼 미조 망운산봉수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慶尙道地理誌(경상도지리지)는 1425年(世宗 7)에 편찬된 慶尙道(경상도)의 地理志(지리지)로 河演(朝鮮)하연(조선)이 편찬한 책으로 慶尙道地理誌(경상도지리지) 晉州道(진주도) 昆南郡(곤남군) 조(條)의 남해에 있는 봉수의 기록은 이렇게 적었다.
錦山烟臺烽火在島東 西望島中所屹山烟臺烽火 相去陸路三十里 自所屹山烽火 西望望雲山烽火 相去三十里 自望雲山烽火 北望晉州任內金陽部曲地 陽芚山烽火 相去二十六里
금산연대봉화는 섬의 동쪽에 있다. 서쪽으로 보면 섬의 중앙에 소흘산연대봉화가 있고, 서로의 거리는 30리이다. 소흘산봉화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망운산봉화¹⁾가 있고 서로의 거리는 30리이다. 망운산봉화에서 북쪽을 보면 진주 임내 금양부곡 지역의 양둔산봉화가 있고, 서로의 거리는 26리이다.
산릉선에서 만난 남해 바래길 표지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 1425)에도 진주도 남해(晉州道 南海)에는 “금산봉화(錦山烽火)와 흥선도 대방산봉화(興善島臺方山烽火) 및 소흘산봉화(所屹山烽火)와 순천 동쪽의 돌산봉화(突山烽火)”의 기록만 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1445) 경상도 진주목 곤남군(昆南郡)에도 “곤남군(昆南郡) 봉화가 3곳인 금산(錦山), 소흘산(所屹山), 망운산(望雲山)¹⁾과 진주의 금양 부곡(金陽部曲)의 양둔(陽芚)만 기록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530) 남해현(南海縣)에도 3곳의 봉수만 기록했는데, “금산봉수(錦山烽燧), 소흘산봉수(所訖山烽燧), 원산봉수(猿山烽燧)”이다. 또한 남해읍지(南海邑誌, 1899), 남해군읍지(南海郡邑誌, 1907년경)의 옛 기록에도 역시 금산(錦山), 소흘산(所屹山), 망운산봉수(望雲山烽燧)¹⁾의 기록만 전한다.
다만 남해현읍지(南海縣邑誌, 1786년경)의 봉수 조(條)에는 “금산봉수(錦山烽燧), 소흘산봉수(所訖山烽燧), 원산봉수(猿山烽燧)”의 기록만 있으나, 진보(鎭堡) 조(條)의 미조항진(彌助項鎭)에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彌助項鎭 ; 成化丙午置鎭後爲倭寇所陥廢之 嘉靖壬午復設石築周二千一百四十六尺 高十二尺 僉使武從三品 軍官三人 鎭吏二十九人 知印十四人 使令八名 戰船一隻 兵船一隻 伺候船二隻 能櫓軍一百五十三名 射夫二十八名 火炮十名 砲手三十四名 烽燧軍二十名]
『남해군지』와 『남해의 관방유적 성곽과 봉수』에는 “남해현읍지(南海縣邑誌, 1786년경)”을 해석하여 미조진성(彌助鎭城)에 대해 아래와 같이 옮겨 적었다.
「미조항고성(彌助項古城)이 왜구(倭寇)에게 함락된 후 파괴되어 못쓰게 된 것을 폐지하고, 이 자리에 다시 중종 17년(1522)에 설치하였으며 돌로 쌓았고, 둘레는 2,146자(尺)이고, 높이가 11자인 큰 성이다. 첨사(僉使)는 무관(武官) 종(從) 3품이며, 군관이 3인, 진리(鎭吏) 29인, 지인(知印) 14인, 사령(使令) 8명, 전선(戰船) 1척, 병선(兵船) 1척, 사후선(伺候船) 2척, 능노군(能櫓軍) 153명, 사부(射夫) 28명, 화포(火炮) 10명, 포수(砲手) 34명, 봉수군(烽燧軍) 20명으로 구성된 중요한 군항(軍港)이였다.」
위의 기록으로 보아 미조항진은 남해안의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이며, ‘미조 망운산봉수’ 또한 간봉(間烽)의 역할보다는 남해 금산봉수에 연락하고 미조항진에 보고하는 권설봉수(權設烽燧)²⁾임을 알 수 있다.
【주석】
망운산봉화¹⁾, 망운산(望雲山)¹⁾, 망운산봉수(望雲山烽燧)¹⁾는 미조 망운산이 아니라 모두 남해도의 가장 높은 산이면서 주산인 해발 786m의 남해읍의 서쪽에 위치한 산을 말한다.
권설봉수(權設烽燧)²⁾는 조선 후기 군사적으로 중요했던 영(營), 진(鎭)에서 자체적으로 설치하여 본읍(本邑)으로만 연락하도록 운영한 봉수로서 주로 해안 연변 지역에 설치되어 있으므로 연변봉수(沿邊烽燧)와 같은 말로 통용된다. 『大東地志』의 各 道 烽燧 條에서 확인된다.
북서쪽에서 본 모습
봉수의 모양은 평면형태 말각방형으로 연대, 주거지, 방호벽(호)으로 이루어져 있다. 봉수대는 나지막한 정상부 위에 시설되었으며, 추정 건물지가 위치한 곳은 비교적 편평한 형태이다.
연대는 평면 말각방향으로 둘레 27.2m, 높이1.5m이다. 연대는 북쪽으로 치우쳐 있는 펀으로 방호벽과의 거리는 40m이고, 출입시설과의 거리는 7m이다 남동쪽 및 서쪽, 북서쪽 일부 석축이 붕괴된 것을 제외하고 연대의 석벽축은 대체로 잘 남아 있다. 북동쪽 석축벽 모서리는 다른 모서리부분보다 돌출되어 있다. 20~60cm 크기의 석재로 석축벽을 정교하게 쌓았는데 대체로 40~50cm 크기이다.
연대 상부 서쪽으로 치우쳐서 돌무지가 있다.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으나 지름이 0.4~0,5m인 원형으로 보이며 20~30cm 크기의 석재를 사용하였다. 연대의 서쪽하부에는 추정 연조 1기가 확인되었다. 추정연조는 원형으로 크기20~30cm의 석재로 축조하였다.
남쪽에서 본 모습
북쪽에서 본 모습
출처 및 참조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誌 : 1425) 진주도(晉州道) 곤남군(昆南郡)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 1425)에도 진주도 남해(晉州道 南海)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1445) 경상도 진주목 곤남군(昆南郡)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지리지-남해현읍지(南海縣邑誌 : 1786년경)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지리지-남해읍지(南海邑誌 : 1899년)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지리지-남해군읍지(南海郡邑誌 : 1907년경)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Ⅳ-고전국역총서43/재단법인 민족문화추진회-32권(1971.2.20.)
남해의 관방유적 성곽과 봉수-남해문화원(2011.12.29.)/김우영, 민부경-문성인쇄출판사.
경남지역의 봉수Ⅱ-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2013.11.30.)/강순형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Ⅳ-고전국역총서43/재단법인 민족문화추진회-32권(1971.2.20.)
조선시대의 연변봉수-김주홍(2010.11.5.)/한국학술정보(주)
남해군지-남해군지편찬위원회/남해문성인쇄사(1994.7.31.)
고서속의 남해사료-남해문화원/태우인쇄(2004.1)
미조 망운산에서 본 미조면
남해 납(원)산봉수 남해 설흘(소흘)산봉수 | ⇔ | ⇔ | ⇔ | ⇔ | ⇔ | ⇔ | |||||
진주 광제산봉수 ⇔ 단성 입암산봉수 ⇔ 삼가 금성산봉수 ⇔ 합천 소현봉수 ⇔ 거창 금귀산봉수 ⇔ 거창 거말흘산봉수 ⇔ 상주 지례현 구산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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