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봉수대

가덕도 응봉 봉화불 오르니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천부인권 2019. 5. 19. 06:44



2017.11.16 연대봉에서 바라 본 가덕도 응봉


2017년 10월 밀양 종남산을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되어 경남의 봉수를 찾게 되었다. 창원 지역의 봉수부터 찾는 것이 항상 궁금함을 푸는 방식 중 하나이다. 지금은 어쩌다가 가덕도를 부산에 빼앗기는 슬픔을 당했지만 가덕도는 창원의 한 면으로 이어져 온 창원 땅이라 그곳부터 찾아보았다. 그해 11월의 어느 날 가덕도 연대봉을 올랐고 봉수 탐방이 시작 되었다. 아직도 봉수대 탐방은 끝나지 않았지만 창원 지역의 봉수대는 모두 탐방했고 그 기록도 남겼다. 그중 松鶴(송학)님의 제보로 지금까지 찾지 못했던 장복산봉수도 찾는 쾌거도 있었다.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쓴 임진장초에 의하면 1592년 임진년 음력 4월 13일 오후 한시가 넘자 왜국에서 출발한 왜선이 부산포와 해운대로 침략을 시작했다. 이를 최초로 응봉 봉군 이등(李登)이 가덕진에 전했고, 이어 연대 봉군 서건(徐巾)이 천성보에 임진왜란의 비극이 시작됨을 보고했다. 아래는 임진장초(壬辰狀草)의 원문과 해문을 기록한다.




2019.11.16 연대봉 엄지암 꼭대기의 봉수 모습


全羅左道水軍節度使 臣李 謹
啓爲待變事 今四月十五日戌時到 付同月十四日 施行 慶尙右道水軍節度使元均關內 當日巳時到付 加德鎭僉節制使田應麟 天城堡萬戶黃珽等馳報內 鷹峯燧監考李登 烟臺監考徐巾等進告內 今四月十三日申時 倭船不知其幾十隻是喩 大槩所見九十餘隻亦 本土始出 左道杻尹島過 釜山浦了以 指向次 遠暗乙仍于 隻數詳細看望不得爲在果 連續出來是如 進告是乎等用良 僉使段置 依方略 釜山多大浦右邀擊將以軍船 整齊下海待變爲臥乎所 馳報是白有亦 必是歲遣船是白在果 唯只九十餘隻 至數多出來 莫測其由叱分不喩 連續出來是如爲白有去等 似非尋常是白乎等用良 防備瞭望等事 盡心檢勅 晝夜待變亦 所屬各官浦良中 發馬行移申勅爲白乎旀 臣段置 軍船整齊 江口待變爲白臥乎所 當日馳啓爲乎所 關是白齊 一時到付同日成貼 同水軍節度使元均關 當日申時到付 左水使關 據加德僉使馳報內 倭船一百五十餘隻 海雲臺釜山浦了以歧等如 指
向是如爲有在如中 必非歲遣船 極爲可慮爲白置 傳通內辭緣一一枚擧 則動經時刻乙仍于 擧大槩 爲先傳通爲去乎 次次傳通待變向事爲等如 關是白有亦 倭船一百五十餘隻至歧等如 指向是如爲臥乎所 此非尋常歲遣船之類是白乎等用良 臣段置 軍兵船整齊 江口待變爲白乎旀 兼觀察使兵馬節度使右道水軍節度使處 幷以發馬移文爲白遣 沿海各官浦段置 一時發馬 行移檢勅待變爲白臥乎事是良厼 謹具啓文
萬曆二十年四月十五日戌時 節度使 臣李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이순신¹⁾은 삼가 사변에 대비하는 일²⁾을 아룁니다.
경상우도³⁾ 수군절도사 원균(元均)⁴⁾의 공문이 4월 14일 발송⁵⁾되어 오늘 4월 15일 술시(戌時:19 : 00~21 : 00)에 접수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14일 사시(巳時:09:00~11:00)에 접수한 가덕진(加德鎭) 첨절제사⁶⁾ 전응린(田應麟)과 천성보(天城堡) 만호(萬戶)⁷⁾ 황정(黃珽) 등의 긴급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 내용에 의하면 응봉(鷹峯)⁸⁾봉수(燧)⁹⁾ 감고(監考)¹⁰⁾ 이등(李登)과 연대(烟臺)¹¹⁾감고 서건(徐巾)¹²⁾ 등이 와서 이렇게 보고하였습니다.
“오늘 4월 13일 신시(申時:13:00~15:00)에 왜선(倭船)이 몇 십 척인지는 알 수 없으나 대략 보이는 것만도 90여척이 왜국본토(本土)에서 나와서 경상좌도(左道)의 뉴이도(杻尹島:살이섬, 쥐섬)를 지나 부산포(釜山浦)로 향하기 때문에 너무 멀어서 그 척 수를 상세히 헤아려 볼 수 없거니와¹³⁾ 계속 해서 나오고 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첨사(僉使)¹⁴⁾로서 제승방략(方略)에 의거하여 부산과 다대포(多大浦)의 우요격장(右邀擊將)으로 하여금 군사와 전선(戰船)을 정비하여 바다로 나가 사변에 대비하게 하였습니다.“고 하였습니다.
(나 원균은 저 배들이) 아마 세견선(歲遣船)¹⁵⁾일 것으로 생각하지만 단지 90여척이나 많은 수가 오는데 그 까닭을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는 것이 심상치 않은 것 같으므로 “방비와 감시하는 일을 힘써 단속하고 경계하여 밤낮으로 사변에 대비하라”고 소속 각 고을과 포구[官浦]에 급히 지시하였으며 신(원균)도 군사와 전선을 정비하여 강어귀에서 사변에 대비하고 있는바¹⁶⁾ 그날로 장계(啓)¹⁷⁾를 올렸습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시각에 도착한 같은 날 14일에 성첩(成貼)¹⁸⁾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¹⁹⁾ 원균(元均)의 공문을 접수 하였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당일(14일) 신시(申時)에 접수한 좌수사²⁰⁾의 공문에 의하면 “가덕첨사가 긴급히 보고하기를 왜선 150여 척이 해운대(海雲臺)와 부산포로 갈라져 가고 있다고 하였는데²¹⁾ 반드시 세견선은 아닐 것이므로 극히 염려스럽습니다.”고 하였습니다.
그 공문의 내용을 일일이 쓰려고 하다가는 시간이 늦어지겠으므로 우선 대략만 전달하니 수군 진영으로서도 사변에 대비할 모든 일을 차자 통첩하겠습니다.』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왜선 150여 척이 모두 해운대와 부산포로 향하고 있다 하는바 이들 세견선의 선단(船團)으로는 심상치 아니하므로²²⁾ 신(이순신)도 군사와 전선을 정비하여 강어귀에서 사변에 대처하고 있으며 겸관찰사(兼觀察使)²³⁾·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²⁴⁾·전라우도(右道) 수군절도사 등에게도 아울러 긴급히 통고하고 연해안의 각 고을과 포구에도 급히 지시하여 “단속하고 경계하여 사변에 대비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삼가 갖추어 아룁니다.
만력(萬曆, 1592년)²⁵⁾ 4월 15일 술시(戌時) 절도사 이순신²⁶⁾


【주석】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이순신¹⁾:因倭警待變狀(1)에는 “全羅左道水軍節度使臣 李”는 적혀 있지 않다.
삼가 사변에 대비하는 일²⁾:초서본에는 제목이 적혀있지 않다.
경상우도³⁾:조선조 중종14(1519)년에 경상도의 행정구역을 둘로 나누어 성주·선산 등 28개 군현을 우도에 속하게 하고 울산·양산 등 37개 군현을 좌도에 속하게 하였다.<경상도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
원균(元均 1540~1597)⁴⁾:자는 평중(平仲), 본관은 원주, 무과에 급제. 선조25(1592)년 2월에 경상우수사가 되었다. 이해 4월 왜적이 침입하자 이 순신의 군원(軍援)을 얻어 적을 깨뜨렸다. 그 후 시기와 남·북인의 모함으로 이순신이 하옥되자 통제사가 되었다. 선조 30(1597)년 왜적의 재침 때 칠천량에서 패전하여 수군이 전멸 되고 육로로 도망가는데 왜적 2명이 초접근한 경우까지 기록되어 있다.
공문이 4월 14일 발송⁵⁾:因倭警待變狀(1)에는 “付同月十四日 施行”이 적혀 있지 않다.
첨절제사⁶⁾:조선조 때 각 진영에 속했던 무관직·절도사의 아래로 병영에는 병마 첨절제사, 수군에는 수군 첨절제사가 있었다. 이들은 종삼품관을 원칙으로 하였다.<國史大事典>
천성보(天城堡) 만호(萬戶)⁷⁾:천성보(天城堡)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보루(堡壘)로 가덕도 천성에 있는 성곽이다. 만호(萬戶)는 무관직의 하나, 만호·천호·백호 등은 본래 그 관령(管領)하는 민가의 호수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몽고족 군제의 근본이었다. 고려시대를 지나 차차 만호의 수와는 관계없이 진장의 품계를 나타내는 것이 되고 또 육군보다는 수군에 이 명칭이 남아 있었다. 만호는 대개 정4품관이 임명되었다. <大典會通·國史大事典>
응봉(鷹峯)⁸⁾:옛 지도의 지명에는 말곶망(末串望)이라 불렸다. 해발 300m인 이곳은 가덕진성에 딸린 봉화가 있었다. 1592년 4월 13일(음력) 대마도에서 부산포로 침략해 오는 왜군함대를 최초로 발견하여 보고한 곳이 응봉봉수대와 연대봉수대이다.
봉수(燧)⁹⁾:봉화(烽火)와 같은 뜻이다. 조망이 잘 되는 산 위에서 밤에는 불빛으로 낮에는 연기를 피워 전쟁을 대비했던 통신방법이다. 원문에는 “烽燧”의 “烽”자가 없으나 <忠武公全書>에는 기록 되어 있다.
감고(監考)¹⁰⁾:봉화군을 독려 감시하는 임무를 맡은 자를 오장(伍長), 또는 감고(監考)라 하였다.<大典會通·國史大事典>
연대(烟臺)¹¹⁾:봉화의 안전과 적의 침범에 사전 대처하기 위하여 마련된 연변봉수(沿邊烽燧)의 요새적 시설이다.<經國大典·大典會通>
서건(徐巾)¹²⁾:<忠武公全書> 卷2 「狀啓1」의 因倭警待變狀(1)에는 “徐建”이다.
때문에 너무 멀어서 그 척 수를 상세히 헤아려 볼 수 없거니와¹³⁾:<忠武公全書> 卷2 「狀啓1」의 因倭警待變狀(1)에는 “次 遠暗乙仍于 隻數詳細看望不得爲在果”가 적혀 있지 않다.
*왜군 수:왜의 기록인 『近世日本國民史』 「朝鮮役」上卷에 “秀吉이 天正 20년(壬辰年) 5月 5日附 黑田甲斐守(長政)에 하달된 문서에는 1번부터 8번까지 출정원 총계 10만 6700人으로 되어 있고 3월 13일부 毛利秀元에 하달된 문서에는 1번부터 9번까지 15만8700人으로 되어 있으나 武家事記에 기록된 「道行之次第」라는 문서에는 1번부터 16번까지 船方衆을 포함하여 20만1840人으로 되어 있다.
첨사(僉使)¹⁴⁾:첨절제사(僉節制使, 종3품)의 줄인 말이다.
세견선(歲遣船)¹⁵⁾: 조선 때 쓰시마(對馬島) 도주에게 내왕을 허락한 무역선을 말한다.<國史大事典>
사변에 대비하고 있는바¹⁶⁾:<忠武公全書> 卷2 「狀啓1」의 因倭警待變狀(1)에는 “之由”이며, 초서본에는 “爲臥乎所(위와호소)”가 적혀있지 않다.
장계(啓)¹⁷⁾:狀啓는 왕명으로 지방에 파견된 관원이 왕에게 보고하는 보고서.
성첩(成貼)¹⁸⁾:문서에 관청의 도장 즉 관인을 찍거나 봉함한 것을 이름 한다.<大漢韓辭典> <忠武公全書> 卷2 「狀啓1」의 因倭警待變狀(1)에는 “成帖同”이 적혀 있지 않다.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¹⁹⁾:조선조 때 수군을 통제하기 위하여 둔 정3품 당상관(堂上官) 무관 직이다. 이순신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된 시기는 선조 24(1592)년 2월 13일로써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4개월 전이었다. <經國大典 兵典·李忠武公全書 卷9>
좌수사²⁰⁾:좌도 수군절도사의 약칭이다. 여기서는 경상좌수사가 박홍(朴弘)이다.
갈라져 가고 있다고 하였는데²¹⁾:<忠武公全書> 卷2 「狀啓1」의 因倭警待變狀(1)에는 “指向”이며, 초서본에는 “了以歧等如 指”로 적혀있고 “指” 뒤로 넓은 공간에 글이 적혀 있지 않다. “向”은 페이지를 달리하여 첫글자로 나오며 “是如爲有在如中(시여위유재여중)”이 적혀 있다.
심상치 아니하므로²²⁾:<忠武公全書> 卷2 「狀啓1」의 因倭警待變狀(1)에는 “云”이며, 초서본에는 그 대신에 “向事爲等如 關是白有亦 倭船一百五十餘隻至歧等如 指向是如爲臥乎所 此非尋常歲遣船之類是白乎等用良”이 더 적혀 있다.
겸관찰사(兼觀察使)²³⁾:조선조 때 있었던 지방 장관으로 종2품의 문관직이며, 『감사』라고도 하였다.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兵使 또는 兵馬使)가 모두 16명 이었는데 경상도에는 3명이 있었으며 좌·우병사와 관찰사가 병마사의 책임을 겸임 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겸관찰사』라고 한다.<國史大辭典·文獻備考 卷234 職官考> 여기서는 전라관찰사가 이광(李洸)이다.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²⁴⁾:조선조 때의 무관직 속칭 『병사 또는 병마사』라고 한다. 각 지방의 군대를 통솔하고 경비를 담당하던 종2품의 벼슬로서 모두 15명을 두었다. 여기서는 전라병사가 최원(崔遠)이다.
만력(萬曆, 1592년)²⁵⁾: 明나라 신종(神宗) 때의 연호이며, 만력20년은 우리나라 선조 25년이다. <韓國史年表>
이순신²⁶⁾:<忠武公全書> 卷2 「狀啓1」의 因倭警待變狀(1)에는 “檢勅”으로 문장이 끝나지만 초서본에는 그 뒤에 이어서 “待變爲白臥乎事是良厼 謹具啓文 萬曆二十年四月十五日戌時 節度使 臣李”가 더 적혀 있다.


출처 및 참고
충무공이순신전집3-최두환/도서출판우석(1999.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