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함안군 칠북면 가연리 분성배씨 동원정 東園亭

천부인권 2020. 1. 12. 10:39



2020.1.11. 함안 칠북면 가연리 동원전 전경


오후에 칠북면 일대의 마을을 둘러 본 것은 지인이 회원구 국회의원후보로 등록한 하귀남의 책선전(book-concert)에 참석했다가 잠시 시간이 나서 뜻 맞는 선배와 함께 3사람이 바람을 쇠일 겸 옛 풍경을 간직한 함안 칠북면의 마을을 둘러보자는 제안으로 가게 됐다. 그곳 중 한 마을 이름이 아름다운 연못마을이란 뜻이 담긴 가연리(佳淵里)이었다.
이 마을은 분성배씨의 세거지로 함안군 칠북면 가연리 551-1에는 분성배씨(盆城裵氏) 동원처사(東園處士) 영휘(永徽)공의 소요지에 후손들이 지은 재실 동원정(東園亭)이 있다. 대문에는 편액이 없고 본채에 동원정(東園亭)이라 편액하고 대문의 입구에 ‘죽포수식쌍행(竹圃手植雙杏)’이라 새긴 비가 있는데 비의 좌측에는 ‘종차사오세음하강시서 계묘년음이월일(從此四五歲陰下講詩書 癸卯년陰二月日)’이라 적고 우측에는 ‘거년식일본 금년우일지(去年植一本 今年又一枝)’라 새겼다. 그러나 지금은 은행나무 쌍수가 없었다. 동원정의 기문은 하산 성순영(成純永)이 지었다.




2020.1.11 동원정 입구



2020.1.11 동원정 전면



동원정(東園亭) 편액



동원정(東園亭) 주련




東園亭記
漆原縣北有山曰 武陵其下有村曰 嘉遯裵氏之世莊也 裵氏自靜谷先生胥宇于 此世以文學儒素相傳蔚 爲南州之名閥 近代有東園處士公諱永徽 亦以質行世其家爲範稽於鄕里 有子男三人 諸孫之爲其後者相與設五從稧 爲之滋殖以有資聚 則諸曾孫 又謹守而張大之築 四架五楹之亭 於所居傍公杖屨逍遙之地 以爲公墓 歲一瞻掃齋宿之所 亦以爲聚宗族敦睦 延賓友講學 以成公平日志 旣訖工額以東園 曾孫基哲訪余于達府之寓 而囑所以記其事者 盖君嘗與余有舊也 則余豈得陋拙辭乃 以公所嘗自號者名之曰 東園亭盖聚 古人詩不辨 仙源何處尋之句之意 而謂源未嘗有東西也 公之自號以東園者 亦以武陵源之東 而成園也 則其旨淵乎園矣 哉仍復之曰 自昔武陵桃源 避秦民之說 有謂之荒唐無稽者 然不惟古人之有記有行 以明證也 世間自有種種奇異事 則固不可遂諉 以荒唐 而況士生 於衰亂之世 占一區好 山水樂天 守分繩祖 武胎孫謨 耕稼以爲業詩禮 以垂訓不知山外 有塵事若處士公之生平 則雖直謂 是爲仙源 亦可不可之有哉 余將待桃花春浪棹小舟 以溯 而登斯亭想慕處士公之風猷 而與其諸後承把酒舒嘯 則此亦或有當於公垂訓之意也 耶亭經始於戊戌三月三日 而竣役於己亥七月七日 是爲之記
癸卯 淸明節 夏山 成純永 記


동원정기(東園亭記)
칠원 고을의 북녘 무릉산(武陵山) 아래 기슭에 가둔(嘉遯)이라는 마을이 있으니 배씨(裵氏)가 대대로 살아 온 곳이다. 배씨(裵氏)는 정곡선생(靜谷先生)이 칠원에 살 곳을 정한 후로 대대로 문학(文學)과 선비의 소행을 서로 전수하여 남쪽 고을(南州)에서 명벌(名閥)이 되었으며 근대에 동원처사(東園處士) 휘 영휘(永徽)공이 몸과 마음으로 학문을 닦으니 가문의 명예를 이어 향리에 법도가 되었다. 아들은 3형제를 두었으며 모든 자손과 후손들이 서로 간에 오종계(五從稧)를 설치하여 재산을 불리고 재물을 모아 증손의 모범이 되었다. 또 조심하고 정성껏 지켜 장대한 4칸의 정자(亭子)를 공(公)이 살면서 유식(遊息)하시던 곳에 창건을 했으니 공의 묘소에 묘제올리고, 무덤을 돌보며 제사를 지내고, 숙식을 하는 곳이 되고, 종족(宗族) 간에 정이 두텁고 화목하고, 손님과 친구를 모아 강학(講學)으로 공의 평소 높은 뜻을 이루었으니 역사(役事)를 완공하여 ‘동원정(東園亭)’이라 편액하고 증손 기철(基哲)이 달성에 있는 집에 나를 찾아와 기문(記文)을 요청(要請)하니 군(君)은 일찍이 나와 친분이 두터운지라 어찌 사양하리요. ‘동원정(東園亭)’은 공의 자호(自號)였음을 따르는 것인데 대개 고인의 시(詩)에 선원(仙源)을 어디에서 찾을까하는 뜻이다.
선원(仙源)이 동에 있느냐 서에 있느냐를 취(取)함이고, 또 무릉원(武陵源)의 동녘에 안식처(安息處)를 세운 즉 그 뜻이 깊고 멀었구나.
다시 말해 옛 무릉도원(武陵桃源)은 진(秦)나라를 피(避)한 곳이란 말이 황당하다 하였지만 고인(古人)의 기행(記行)의 명등(明證)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세간(世間)에 종종 괴이한 일이 있으니 진실로 황당하다고 말하지 못할 뿐 선비가 난세(亂世)를 만나면 좋은 곳을 찾아가 분수를 지키고 자락(自樂)하여 선대(先代)를 이으려고 자손(子孫)을 경계하여 가경(耕稼)과 시예(詩禮)로 세상일을 모르나니 처사공(處士公)의 이 마을이 선원(仙源)이라 한들 무엇이 불가하겠는가. 내 장차 복숭아꽃 핀 봄 물결이 편주(片舟)로 거슬러와 이 정자(亭子)에 올라 처사공(處士公)의 풍범(風範)을 사모하고 그 후손(後孫)들과 술을 마시며 옛날 일을 의논하면 이 또한 공(公)의 수훈(垂訓)의 뜻이 아닐까 하노라. 무술 3월 3일 비로소 정자 짓기를 처음 시작하고 기해 7월 7일에 준공하니 이것으로 기문(記文)으로 한다.
계묘 청명절에 하산 성순영(成純永) 짓다.






출처 및 참조

함안누정록-함안문화원/대보사(2017.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