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칠북면 검단리 지곡마을 분성배씨 단양재 丹陽齋

천부인권 2020. 1. 14. 09:42



2020.1.11. 함안 칠북면 검단리 지곡마을 단양재(丹陽齋)


함안군 칠북면 검단리 833번지는 군위현감을 지낸 정곡공(靜谷公) 배세적(裵世績)의 묘(墓) 아래에 있는 분성배씨(盆城裵氏)의 단양재(丹陽齋)가 있는 곳이다. 솟을삼문인 대문에는 봉상문(鳳翔門)이란 편액을 걸었는데 창원의 독립운동가 백당 정기헌(白堂 鄭基憲 : 1886~1956)선생의 글씨이다. 본체에는 단양재(丹陽齋)란 편액이 걸렸으며 이 역시 백당선생의 글씨이다. 마루 위에는 문소 김황(聞韶 金榥)선생이 지은 단양재기(丹陽齋記)와 한산후인 안붕언(漢山後人 安朋彦)선생이 지은 단양재이건기(丹陽齋移建記)가 걸려 있으며, 또한 소명(少溟) 배문준(裵文準)이 쓴 주련이 있다.
단양재(丹陽齋) 뒤쪽에는 묘당(廟堂)이 있는데 대문에 유당선생의 승술문(承述門) 편액이 걸렸으며 묘당에는 창원군지를 지은 유당(攸堂) 김종하(金鍾河)선생의 글씨인 소격묘(昭格廟)라는 편액이 있다.




봉상문(鳳翔門) 편액


이 묘당에 위패를 모신 배세적(裵世績)은 『칠원읍지(漆原邑誌)』 인물 편에 「裵世績 金海人司馬文科官至縣監 以淸白著名 文章行誼 爲世所推 號靜谷 入享德淵傍祠」라 기록 되어 있는데 이는 “배세적(裵世績)은 김해 사람으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문과(文科)의 벼슬에 올라 현감(縣監)에 이르고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이 분명하며, 문장은 의롭고 세상에서 추앙하며 호는 정곡(靜谷)이고, 덕연방사(德淵傍祠)에 입향(入享)했다.”라는 기록이다.




단양재(丹陽齋) 전경


또한 읍지의 비판(碑板)에 정곡배세적묘갈(靜谷裵世績墓碣)이 실려 있는데, 함안문화원( 咸安文化院)에서 1996년에 발행하고 2015년 재판한 『國譯 漆原邑誌』 p. 288.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 했다.
“지난 肅宗 二十四년 戊寅(서기 一六九八)에 漆原의 人士들이 靜谷선생 裵公을 德淵書院의 別祠에 祭享했었는데 …(중략)…세월이 百七十여년이 지내서 風氣가 날로 엷어지고 人倫의 질서가 어두워져서 賢哲을 제향하는 祠堂이 毁撤 당하여 빈터에는 풀만 벌써 무성해졌다. …(중략)…墓道에 碣銘을 새긴 비석을 세우려고 正煥군과 正祐군으로 하여금 鍾錫에게 보내어 墓碣銘을 부탁하는지라…(생략)….” 苞山 郭鍾錫이 비문을 撰하였다. 현재 분성배씨의 묘역 가장 위쪽에 배세적의 묘가 있으며, 오래된 묘비 1기가 서 있다. 그 외의 석물들은 근래에 정비된 것으로, 1975년에 세워진 “정곡선생분성배공지묘(靜谷先生盆城裵公之墓)”라는 비석이 있다.




단양재(丹陽齋) 편액



단양재(丹陽齋) 주련-전문


勇退昏朝此奠居 혼조에서 과감히 물러나 여기에 거주하니
衆多孫是德陰餘 후손들이 번창함은 넉넉한 음덕 덕분일세.
文章豈止一科第 문장은 어찌 과거에 급제하는데 그쳤으리요.
道義都涵千聖書 도의는 성인의 책을 모두 함양한 결과일세.
爲報深恩民返骨 깊은 은혜 갚으려 백성들이 유골을 되돌려오고
追思遺跡士祠墟 남긴 자취 추모하여 선비들이 옛터에서 제사하였네.
齋今移就墳前建 재실을 지금 무덤 앞에 옮겨 세우니
益覺精靈陟降如 精靈이 오르내리는듯함을 더욱 알겠구나.
*昏朝 : 여기서는 연산군을 의미하는 듯.





丹陽齋記
數漆原之姓望 裵居其一 裵之氏 散漫一鄕 數之千百 而推其始其之祖 曰靜谷先生諱世績 先生 早登小大科第 方擬追用於朝 而時値燕山昏亂 士類喪氣 儉德屛處不以爵祿 自縻 靖陵反正 甄拔遺滯 除軍威縣監 淸白爲治 闔境頌恩 居歲餘而卒于官 此其名蹟之可見 而平生藍抱 盖多鬱而未展者 古人 有言位不稱德者 必有後 其所以錫之祚胤 而競于累葉者 意必有所積而發矣乎 肅祖戊寅鄕人士 建德淵祠 以祀諸先獻 而公 與焉 物議之殷 即此可徵 而興發無常 頹垣茂草之悵 亦旣七十年于玆矣 爲公後昆者 每彷徨咨嗟於寓慕之無所 而公墓之在漆北丹邱里者 尙未有一齋 以供瞻宿 尤所慨恨 往歲丙寅 胄孫孝仟 爲是出斗穀 貯蓄長殖 積十數年之苦然後 卽其塋下堧地 爲六楹五架 而扁曰丹陽齋 經始於壬午之春 越三年而役迺竣 其始終宣力而董工者 後孫孝甲也 旣成有年 後孫相允 以其一門僉意 來屬余記實之文 余不能辭 然公之爲一鄕文獻之倡 士林之崇慕 猶夫往昔也 其履歷行治之詳 有先師郭徵君所撰碣銘 己顯揭于阡 自可垂之來百 是皆無順於余說而足也 抑獨惟夫丘墓有齋 遠有可稽 而以余所見 鄕省之間 人家之刱修先齋 大抵綦盛於近年 豈今人之誠 篤於古人哉 其諸古人之所重者 專於質慤 而聲容文物 有不甚屑屑故耶 是齋之成 在公沒後四百年之久 自公子孫言之 莫不以爲晩乎晩矣 然余則知其不然 事固有昔所未遑 而待於後日者 其所以待後而成者 亦由昔人之實有以啓之也 雖自今言之 亦豈可曰盡其所爲 而無復望於後人者乎 惟其常有未盡也 故其望於後者 益不可己 望之不可己 則其所以傳之詔之戒之飭之者 必有其道 是道也 固人家之所恃以長久者也 竊想諸裵氏之歲時修事于公墓 退而匝坐是齋 序飮燕語 必稱公之所肇基而裕後者 爲何事 後昆之所當紹述而弗墜者 何事爲急 又思前世之所以未遑 而待之今日者如何 自給之所猶有未盡 而責於後來者如何 則詩人所謂 無念爾祖 勿替引之者 豈不亦庶幾在此乎 余雖不文 尙願爲裵氏誦之
歲在丙戌良月月中 聞韶 金榥 記





丹陽齋移建記
丹陽齋者 漆原裵氏所嘗 爲靜谷先生而建之 而舊位於祠宇 小間之地 今復移之於祠前盖 爲於齋宿 蠲潔爲更也 胄孫亨鑽議諸其宗族 而請朋彦 爲其移建之記 漆原自德淵書院之發 而先生亦不得亨於其祠於是則祠之所 歸不能不專於其族 而隨之以存者 亦惟齋堂 是己夫古之置祠院於前賢過化之地 豈徒爾哉 溯嚮之殷 而崇祀享揖讓絃誦 其中陶冶以成人才 其用實與學校埒 今祠專於族 其齋堂之設 亦非書院之舊雖亨猶得繼 而所謂成才之用 則己無所擬矣 此非可 爲世道興喟者 歟朋彦仍切 惟之方先生之棄仕昏朝 歸卜雲東也 天下之貴富利榮擧不足以動 其毫髮高情逸韻爲何如也 及夫際値淸明不得於終隱也 則牛刀一試兼淸不煩 而人民大化其不果忘世 而行將翶翔朝端坐致太平之治 其端復於是焉在也 卽是之二者設捨先生 道義之全 而勿擧其族使後人得遂 其慕學舊發之願 將千百世 而無有不可也 而僻壤一祠僅止 爲鄕人士之所瞻仰 而己若夫食肉之人鮮得與聞於其風何恠乎 俗之日趨於卑汚 而莫之救也 顧是齋之役 適出於今日者 豈亦非爲偶爾者 耶嗚呼安得且廣 其當日馬箠之圖 於今之天下乎哉
辛亥秋七月 漢山後人 安朋彦 謹書


단양재이건기(丹陽齋移建記)
단양재(丹陽齋)는 칠원(漆原)에 살고 있는 배씨(裵氏)들이 일찍 정곡선생(靜谷先生)을 위하여 세웠던 사우(祠宇)¹⁾에서 조금 떨어져 있던 것을 이제 다시 사우(祠宇) 앞에 옮긴 것은 재숙(齋宿)²⁾하기에 깨끗한 곳에 편의함을 위한 것이다. 증손(曾孫) 형찬(亨鑽)이 종중(宗中)에 의논하고 이건기(移建記)을 붕언(朋彦)에게 청하는 지라 칠원에 있던 덕연서원(德淵書院)이 폐하였으므로 선생 또한 사우(祠宇)에 봉향(奉享)치 못하게 되어 사우를 부득불 그 자손(子孫)에 전속되고 함께 보존되어 온 것이 재실(齋室) 뿐이다.
옛 사원(祠院)은 선현(先賢)의 교화(敎化) 입은 곳에 세우는 것이 어찌 유의함이 아니리요. 추모하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높이 향사하고 그곳에서 예절을 닦고 글을 가르쳐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오늘의 학교와 같았거늘 이제 사우에 자손만이 제향하고 재실(齋室) 또한 옛 서원(書院)과 다르므로 향사(享祀)는 계속 지속한다 해도 인재를 양성함에는 이제는 어긋난 것인지라 가(可)히 세도(世道)를 위해 한심한 일들 같은지라. 붕언(朋彦)이 누차 절박하게 생각건대 선생이 혼조(昏朝)³⁾에 벼슬을 버리고 운동(雲東)에 복거(卜居)⁴⁾하실 때는 천하의 부귀영리(富貴榮利)에 마음이 동요되지 아니한 그 청취(淸趣)⁵⁾가 어떠했겠는가. 또한 정치가 바르게 시정되니 끝내 감추지 못한 일은 탄환(彈丸)의 고을에 청백(淸白)한 정치(政治)가 인민(人民)을 문화(文化)시키니 만일 조단(朝端)⁶⁾에 고상(翶翔)⁷⁾하였던들 태평(太平)의 치화(治化)⁸⁾를 이룰 것을 이에 알 수 있겠거늘. 숨은 한 사우(祠宇)가 고을 인사(人士)의 첨앙(瞻仰)⁹⁾에 그치고 말아 어찌 한 사람도 그 풍운(風韻)¹⁰⁾을 듣지 못하거늘 풍속이 날로 비하(卑下)된 것을 어찌 괴이(恠異)하리오. 그러던 중 이때에 재당(齋堂)의 역사(役事)가 또한 우이(偶爾)¹¹⁾하다 하오리오 당일 마추(馬箠)¹²⁾의 그림을 이 세상에 볼 수 있을까? 하였다.
신해(1971)년 7월 한산후인 안붕언(安朋彦) 삼가 쓰다.


【주석】¹⁾
사우(祠宇)¹⁾ : 조상의 신주를 모셔 놓은 집
재숙(齋宿)²⁾ : 제관(祭官)이 재소(齋所)에서 밤을 지내는 일을 이르던 말.
혼조(昏朝)³⁾ : 임금이 혼미(昏迷)하여 국사를 잘 다스리지 못하는 조정. 조선의 연산군(燕山君)이나 광해군(光海君) 때의 조정을 이른다.
복거(卜居)⁴⁾ : 살 만한 곳을 가려서 정함
청취(淸趣)⁵⁾ : 맑고 깨끗한 흥취
조단(朝端)⁶⁾ : 조정에서 일하는 신하 중에서 첫째가는 지위
고상(翶翔)⁷⁾ : 하는 일 없이 돌아다니다.
치화(治化)⁸⁾ : 잘 다스려 교화함
첨앙(瞻仰)⁹⁾ : 우러러 사모함
풍운(風韻)¹⁰⁾ : 풍류와 운치를 아울러 이르는 말
우이(偶爾)¹¹⁾ : 어떤 일이 아무런 인과 관계 없이 뜻하지 않게 일어남
마추(馬箠)¹²⁾ : 말채찍
배문준(裵文準) : 자(字) 원부(元부) 호(號) 소명(少溟),경남 함안(칠원)출신의 근세 유학자로 눌재(訥齋) 김병린(金柄璘)의 문인(門人)으로 학행(學行)이 뛰어나며 행실(行實)이 아름답고 조행(操行)이 있다.





승술문(承述門)



승술문(承述門) 편액



소격묘(昭格廟) 전경



소격묘(昭格廟) 편액


출처 및 참조
함안누정록-함안문화원/대보사(2017.12.10.)
함안누정록-함안문화원/대보사(1986.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