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정 배중세 비문과 비 (상남동 공원)
단정 배중세지사 연보
조선 고종32년(1895년) 을미 12월 16일 경남 창원군 상남면 토월리에서 부친 본관 분성 배씨 홍기와 모친 반남 박씨 시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5세(1910년)에 김해 김씨 진사 달근의 따님과 혼인 하다.
1916년 : 소년시절부터 학문과 덕행이 뛰어났던 배지사는 기울어진 국운을 국민계몽으로 세워야 한다고 결심, 창원 용지동에 사립 숭광학교를 설립, 민족교육사업에 투신하다.(붉은 글씨는 현재 비문에서 사라짐)
1919년 3월~4월 : 상남면과 진전면에서 독립만세운동의 선봉장으로 활약하다.
1919년 5월 : 조국광복을 위해 신명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중국으로 망명하다.
1919년 11월 : 만주 길림성 파호문 밖 화성여관에서 12명 동지와 함께 무력에 의한 항일 독립투쟁을 결의하고 조선독립 의열단을 조직하다.
1920년 3월 : 중국과 일본은 물론 국내의 일제 중요 시설기관을 폭파하고 일제요인과 주구를 처단함을 활동목표로 삼은 의열단의 결의에 따라 거사에 사용할 폭탄 및 무기를 국내에 반입 및 은닉의 책임을 맡고 활약하다.
1920년 5월 : 거사에 사용할 대량의 폭탄과 무기 및 실탄을 삼엄한 일제의 감시망을 뚫고 마산역전, 밀양, 김해진영, 창원 동읍 무점리에 각각 운반 은닉에 성공하다.
1920년 8월 : 의열단에 의한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총독부기관지 경설일보와 매일 신보사, 밀양, 부산경찰서 폭사계획이 거사직전에 일본경찰에 탐지되어 체포 수감되다.
1921년 6월 : 수감 후 악독한 고문과 악형 끝에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2년을 선고 받다.
1923년 5월 : 2년 9개월(1920년 6월 수감~1923년 5월 석방까지) 간의 옥고를 치루고 석방되다.
출옥 후 대구에서 경북의열단(慶北義烈團)에 가담하여 활동하던 중 세칭 '양건호(梁建浩)사건' (양건호는 의열단원 李鍾岩의 가명)에 연루·피체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7년 12월 : 출옥 후 항일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43년 1월 대구형무소에 구금되어 1944년 1월 23일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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