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천자봉(天子峯)과 시루바위

천부인권 2009. 3. 29. 11:49

 

 

 

 

 

 

천자봉(天子峯)과 시루바위

 

창원, 진해, 웅동의 경계를 이루는 지점에 시루봉이 있다.
이 아름다운 산야에 어찌 절설하나 없겠는가?

 

천자봉의 전설 (1)

옛날 함경도 땅에 이씨(李氏)성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었다.
조상의 묘터를 찾기 위하여 팔도강산을 두루 섭렵하며 태백산맥을 따라 내려 오다 지리산을 거쳐 낙남정맥을 헤메이다,이곳 곰내(熊川)마을에 이르게 되었다. 天子峯 꼭대기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던 이씨의 눈에 광채가 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것이 팔도를 헤매이며 찾았던 명당터가 바로 이곳 이었기 때문이다.

이곳 바위에 구멍이 둘 있으니 첫째 구멍에 묘(墓)를 쓰면 자손 중에 왕이 나올 것이요, 둘째 구멍에서는 천자가 나올것이 틀림없는 천하의 명당을 찾았으니 어찌 흥분되지 않으리요.

그는 즉시로 데리고온 하인에게 자기 선대의 묘를 둘째 구멍에 이장 하도록 일렀다.
주인의 분부를 받은 하인은 이때 슬그머니 딴욕심이 생겨 둘째 구멍에 자신의 선대 묘를 이장하고, 첫째 구멍에 주인 이씨의 선대 묘를 감쪽같이 이장 하였다. 세월이 흘러 두 집안에 비범한 인물이 났으니, 이씨 문중에는 이성계(李成桂)라는 인물이 나와 조선을 개국하여 태조가 되었고,하인 주씨 집안에도 인물이 났으니 그가 바로 명(明)나라의 천자 주원장(朱元障)이라 전한다.

 

천자봉의 전설 (2)

옛날 곰내(熊川) 마을의 곰산(熊山) 기슭에 주씨(朱氏)성을 가진 늙은 부부가 살았다.
어느날 한 도승이 이 곰산을 지나다 한곳에 서기(瑞氣)가 어리는 것을 보았다.
도승은 기이한 느낌이 들어 서기가 나는 곳에 가보니 가난한 늙은 부부의 움막이 아닌가?

도승이 이들 부부에게 말하기를 "이 댁에 훗날 천하를 움켜질 귀공자가 날 것이요."
하고는 가버렸다. 해가 바뀌고 과연 도승의 말처럼 부부는 사내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워낙 가난하여 늙으막에 얻은 아이를 잘먹이지도 못하고 입힐 재간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도승이 찾아와 "이 아이는 장차 귀한 사람이 될것인즉 소승이 데려가겠습니다."
하였다. 늙은 부부는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도승에게 맞겼다. 도승을 따라간 이 아이는 열다섯으로 성장하여 세상에 나왔으며, 중원으로 건너가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 이라 전한다.

명나라는 종교을 믿는 집단이 세운 나라로서 주원장은 종교집단의 수장이었다.
따라서 주원장이 중원으로 갈때 데리고간 인물은 이러한 종교를 믿는 사람으로 추측된다.

 

천자봉의 전설 (3)

지금으로부터 1,200년전에 신라 혜공왕때 법조(法照)라는 한 도승이 있었다.
이 법조선사(法照禪師)가 밀양의 무봉사를 세울 당시의 일이다.
하루는 선사가 급한용무로 뒷간을 갔더니 호랑이가 뒷간 앞에 있는지라 다른곳에서 용무를 마쳤다. 그런데 이틑날 밤, 또 뒷간을 갔더니 이번에도 호랑이가 있는것이 아닌가. 화가치민 선사가 들고 있던 지팡이로 호랑이의 이마를 쳐버렸다. 그랬더니 호랑이의 이마에서 흰나비 한마리가 날라 나오고 호랑이의 몸은 사라져 버렸다. 선사는 하도 이상하여 흰나비를 따라 나섰다.
나비는 하늘 하늘 앞장서가더니 새벽녁에 어떤 산봉우리에 앉았다. 흰나비의 동정을 지켜 보느라니까 이번에는 날아서 산아래 어떤 집으로 들어 갔다.

그 집을 찾아들어가니 슬하에 자식이 없는 쉰살 가량의 부부가 살고 있었다. 이들 부부도 간밤에 매우 이상한 꿈을 꾸었다.
부부가 꾼꿈이  똑같은 내용인지라 기이하게 생각하고 있던차에 선사가 흰나비를 따라 이 집안으로 들어 섰던 것이다.

선사가 두사람의 꿈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 꿈의 내용은 간밤에 선사가 격은 흰나비와도 관련이 있는 꿈이었다. 이윽고 선사가 "오늘부터 열달 후에 소승이 다시 찾아 주인장에게 청을 하나 드리겠으니 절대로 청을 거절하지 마시길 미리 약조해 주십시오."하고 다짐하여 주인 남자에게 허락을 얻고 떠났다. 열달후 이집의 부인이 해산하여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날 아침 약속대로 선사가 찾아와서 말하길 "이 아이는 액이 있어 이집에 있어면 머지않아 죽게 될것이니 소승이 데려가 길러야 하겠으니 맡겨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주인 부부는 열달전 약속도 있고 아이가 죽는다는 말에 선사에게 아이를 주고 말았다. 선사를 따라간 아이는 절에서 공부와 무예를 닦았다. 이 아이는 비범하여 보통의 아이들과는 달랐으며 사람이 보는 앞에서는 항상 왼쪽 주먹을 꼭 쥐고있는 버릇이 있었다.
이 버릇은 놀적에도 그러하고 잠잘때에도 왼쪽 주먹은 펴지않았다.

어느날 밤 선사는 아이가 잠든 틈을 타서 왼쪽 주먹을 펴보고 그만 깜짝 놀라 물러 앉았다.
아이의 손금에 三자와 1자가 뚜렷한 王자의 손금이 선명한게 아닌가 그런데 선사가 미쳐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아이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절간이 떠나갈듯 일갈을 하였다. "에잇! 요사스러운 중놈아!" 그와 동시에 아이의 손이 선사의 따귀를 한대 쳐버렸다. 이어서 아이는 "내 여태 감추고 있던 비밀을 어는새 네놈이 눈치를 챘구나, 그렇다면 내가 이곳을 떠날수 밖에 없다."  그말을 남기고 절간을 나간 아이의 행방은 묘연 했으며, 뒷날 이아이가 중국으로 건너가 천자가 되었다하고 그런 연유로 천자봉이 생겼다고 전하는바, 천자봉 아래에 있는 마을 이름을 지금도 백일부락 이라 부른다.


시리(시루)바위(甑岩) (1)

옛날 대마도(對馬島)의 한 역관(譯官)이 이 웅천에 와서 오랫동안 머물고 있었다.
그 역관은 당시 이 고을에서도 이름난 기생과 꿀같은 사랑에 빠져 세월가는 줄 모르고 지냈다.
그 기생의 이름을 아천자(雅天子)라 하였다.

그러다가 역관은 떠나고 홀로 남은 아천자는 돌아오지 않는 역관을 기다리며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기약없이 떠난 님을 기다리며 날마다 천자봉 꼭대기에 앉아서 멀리 대마도를 바라보며 눈물짓던 기생 아천자는 그대로 망부석이 되어 버렸다. 훗날 일본 사람들이 이 바위를 히메이와(姬岩)라 불럿으니 이는 아천자의 애닮픈 사랑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조선말 명성황후는 순종(純宗) 임금을 낳고 명산마다 세자의 수명장수를 비는 백일기도를 하였는데,
이곳 천자봉에서도 백일기도를 올렸다고 전하며 산아래 마을을 백일부락이라고 부르는 연유도 그때문이라고 전하여 온다.


시리(시루)바위(甑岩) (2)

지금의 녹산 일대에는 도자기의 원료인 백토가 많이 나온다. 따라서 이 고장에는 옛날부터 도공이 많이 있었다고 전한다. 조선조 선조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이 나라를 침략한 왜적들은 이곳의 도공들을 많이 포로로 잡아 갔다.
고국산천을 떠나 낯은 이국땅에 포로 신세가된 도공들은 망향의 시름을 달래기 위하여 천자봉에 있는 시루바위를 모형으로 만들어 놓고 위안을 삼았다고 한다.

지금도 이들이 잡혀갔던 일본의 이와데(岩手)현의 어떤 도기촌에는 시루바위의 모양이 남아있다고 한다.

 

*시루바위 또는 증암甑岩이란 말은 그 어원을 알 수가 없고 어느 때부터 사용했는지도 알지 못한다. 아마도 일제의 침략 이후에 생긴 듯하다, 웅천현읍지 등 우리의 역사서에는 웅암熊岩 또는 천자봉이라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