丙子胡亂(인조 14년, 1636)의 치욕에도 불구하고 의연히 殉節한 精忠報國의 龜鑑이 된 창원 諸 將兵 追慕行事가 ‘제1회 창원정충문화대제전’이란 이름으로 10월 26일 창원용지문화공원 野外舞臺에서 奉行되었다.
이날 행사는 (사)정충문화진흥회가 주최를 하였고 제례는 昌原鄕校에서 진행하였다. 초헌관은 昌原市長 朴完洙, 아헌관에는 39師團119聯隊長 大領 孔天熙, 종헌관은 昌原市議會 議長 裵鍾天이 맡았으며, 集禮에는 창원향교 典校 金柱元, 贊唱은 창원향교 副典校 金判守, 祝에는 儒道會昌原支部長 金赫來가 각각 맡아 祭禮를 이끌었다.
누루하치가 만주 지방의 여진 부족을 통합한 후 후금을 세웠으며, 이를 이어받은 태종 홍타이지는 국호를 淸으로 고치고 스스로 皇帝라 稱하며, 朝鮮과는 지위를 君臣關係로 조정한 다음 斥和를 주장하는 신하들을 압송하라는 通牒을 보내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조선을 侵略하게 된다.
1636년 淸이 침략을 시작하자 仁祖王은 南漢山城으로 몽진하고 나라가 風前燈火의 위기에 처할 때 昌原大都護府의 부사 白善男도 병사를 모아 광주 雙嶺에 진군하였으나, 1637년 1월 3일 청나라 오랑캐의 기습을 받아 일대 격전을 치루었지만 衆寡不敵으로 관병과 義兵이 全滅에 이르렀고 부사도 장렬히 戰死를 하였다.
이때 白府使가 佩用하고 있던 창원대도호부의 印을 적이 전리품으로 취하려 함에 부사를 수행하던 府吏 黃是憲이 관인을 받아 쥐니 적이 팔을 절단하였다. 다시 남은 손으로 府印을 수습하려하자 그 팔도 잘랐다. 끝까지 인을 지키기 위해 입으로 받아 물으니 목까지 절단 당하여 殉死하였다. 이 관경을 雙嶺戰鬪에 함께 참가했던 軍奴가 보고 昌原大都護府에 고하며, 황시헌의 죽음을 再現한 모습을 보고 그의 忠節을 기리기 위해 오늘날 경상남도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된 ‘문창제놀이’가 되었다.
황시헌공의 순절은 숙종조(肅宗朝)에 이르러 공조수부정랑(工曺水府正郞)을 추증하고 정려(旌閭)를 내림으로서 충신(忠臣)의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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