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덕 장상 연보>
창원 용지역사공원에 세운 최윤덕 장상 연보는 엉터리 기록이므로 수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엉터리 역사를 만든 사람에게 그 비용을 청구해야 할 것이다.
금석문에 기록한 연보를 보면 “고려우왕 2년(1376) 5월 16일 창원부 북면 내곡리에서 양장군 최운해 장군의 장남으로 출생하다. 6세에 모친 창원이씨 별세(양수척에게 위탁)”라 기록했다.
최윤덕 장군의 출생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록을 하면서 태어난 곳은 엉터리로 적은 것은 무슨 이유일까?
<양장공 최운해의 유허지 그림>
‘최윤덕 장상 생가 터 고증 중단되나’라는 제목의 경남도민일보 2011년 3월 24일자 이일균 기자의 기사에 의하면 최씨 문중에서 제공한 목판본을 그 근거로 제시했다. 이 목판본에 의하면 ‘정열공 유지 창원북면’이라 적고 내곡리라 표기된 곳에 집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최윤덕을 낳은 아버지 최운해 장군의 집은 ‘양장공 유허도 창원 북면 무등리’라 적고, 집 앞에는 이목평(梨木坪)이 있다고 기록을 하고 있다.
<최윤덕 유허도>
최씨 문중에서 가지고 있는 이 두 개의 유허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최윤덕 장군이 태어난 생가지가 내곡리라 주장한다면 최윤덕은 태어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집을 짓고 어머니, 아버지를 최윤덕 본인이 만들어서 이미 자신이 지어 놓은 집에 살게 하여 출생해야만 가능하다. 최운해 장군이 살고 있는 집은 무동리에 있는데 세상에 없는 자식이 지어놓은 내곡리 집에 가서 아이를 낳았다는 이야기가 성립되는 말인가? 이런 논리가 성립한다고 생각하는가?
인간이 출생하는 곳은 아버지나, 어머니의 집에서 태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무등리가 생가지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맞지 어떻게 내곡리라 하는가?
그리고 고려우왕 2년(1376) 5월에는 창원 이씨가 존재한 기록이 없는데 최윤덕의 어머니가 창원 이씨라 한다면 이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최윤덕의 조부 평장공 최록(崔祿)은 양장공 최운해(崔雲海)의 부친으로 고려 말 공민왕 때 태원병마절도사와 문하성평장사를 지낸 사람이고, 양장공 최운해 역시 문하평리, 지중추원사를 지낸 분이다. 벼슬을 지낸 집안에서 이름도 존재하지 않는 창원 이씨 집안과 혼인을 한다는 것이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성립할 수 있는 이야기 일까.
따라서 최윤덕 장상 비석의 잘못된 부분은 바로 잡고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은 삭제하는 것이 미래의 세대에 옳바른 역사를 전하는 방법일 것이다.
창원시의 답변 『최윤덕장상 연보수정 필요』에 관한 강창원님의 글을 잘 읽어 보았습니다. ❍ 생가지 위치와 관련해서는 귀하께서 제출한 문화재지정 해제 신청서를 경상남도로 진달, 이미 도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현재의 위치로 유지하며, 명칭을 유허지로 변경한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13. 7. 19) ❍ 이 외에도 영조대 국가차원에서 간행된 『여지도서』(창원도호부, 인물조)에는 ‘최윤덕은 부북 내곡인’ 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 기록은 최윤덕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공신력 있은 자료이며. ‘무동리’와 관련된 문헌 자료는 19세기까지 자료에서는 현재까지 확인된 바가 없습니다. ❍ 무동리 생가지설 주장과 관련해서는 귀하께서 검증된 문헌자료를 제시하여 주시면 면밀히 검토하여 답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강창원 님의 가정에 건강과 행운이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14 . 9. 담당부서 : 문화관광과 문화재관리 담당 (T:055-225-36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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