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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씨 삼형제의 효심이 만든 구산면 내포리 삼효각

천부인권 2015. 1. 5. 07:00

2014/12/31  백령재에서 바라본 삼효각

반동리를 나와 창원 합포구 내포리 삼효각(昌原 合浦區 內浦里 三孝閣)을 찾아가기 위해 내포리 마을로 가보니 내포리에는 제실들은 많으나 비석이나 정려각은 보이지 않았다. 삼효각은 마을과는 꽤 떨어진 백령재로 향하는 도랑 옆 논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었다. 위치적으로 볼 때 예전에 사람들이 걸어서 다니던 시절에는 구산면에서 합포구로 넘어 오기 위해서는 삼효각 앞을 거쳐서 가야하는 길이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진입로에서 바라본 삼효각 모습

삼효각의 주소는 합포구 구산면 구산로 109-45(내포리 16-1)이며 2010129일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24호로 등록이 된 문화재이다. 마을이 없는 논 가운데에 위치해서 그런지 담장은 꽤 높은 편이고, 삼효각으로 들어가는 문의 자물쇠는 굳게 잠겨 있다. 그래서 논 언덕에 올라 다음을 기약하며 밖에서 삼효각의 모습 찍고 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삼효각을 지키는 소나무

돌아오는 길에 창원시 문화관광과에 연락을 하여 관리를 하고 있는 마산에 사시는 종손과 연락이 되어 다음에 약속을 하고 방문을 하기로 했다. 이 건물을 문화재로 등록을 하기 전에 보수를 하는 바람에 문화재로 등록을 하기가 상당히 힘이 들었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3형제의 정려는 효자 장사랑 행충훈부도사 진양 강태형지려(孝子將仕郞行忠勳府都事晋陽姜泰馨之閭)’, ‘효자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진양 강내형지려(孝子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晋陽姜乃馨之閭)’, ‘효자 증가의대부 겸 장례원경 진양 강재형지려(孝子贈嘉義大夫兼掌禮院卿晋陽姜載馨之閭)’이다.

 

건물 뒤에서 촬영한 삼효각 풍경

삼효각은 강태형(姜泰馨, 1843~1911), 강내형(姜乃馨, 1853~ 1919), 강재형(姜載馨, 1863~1897) 삼형제의 지극한 효성을 향리와 유림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널리 알려 삼형제 모두가 조정으로부터 정려를 받은 사실을 기리기 위해 1916년에 건립되었으며 당호를 삼효각(三孝閣)이라 했다.

 

삼효각 모습

삼효각은 강태형(姜泰馨, 1843~1911), 강내형(姜乃馨, 1853~ 1919), 강재형(姜載馨, 1863~1897) 삼형제의 지극한 효성을 향리와 유림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널리 알려 삼형제 모두가 조정으로부터 정려를 받은 사실을 기리기 위해 1916년에 건립되었으며 당호를 삼효각(三孝閣)이라 했다.

 

이 내포리(內浦里) 마을 사람들은 자식들에게 효도가 무엇인지를 가르칠 때 전설처럼 전해오는 삼형제의 효성이야기를 한다는데 삼형제는 양친을 섬김에 있어 살아생전 혼정신성(昏定晨省)을 다하였다. 부친이 종기병을 앓자 삼형제가 번갈아가면서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어 등창을 완치시켰다. 부친상을 당하여 묘소를 5리밖 지대가 높고 험한 곳임에도 아침 저녁으로 성묘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지냈다. 3형제가 묘소 앞에서 엎드려 절한 자리에는 풀이 말라 죽었고 땅도 움푹 패였다 한다. 또 이들이 성묘를 다니던 길목에 있던 바위가 벌어져 새로 길이 하나 생겼으니 뒷날 목동과 초부들이 '효자의 길'이라 이름 지었다. 한번은 삼형제가 큰 산짐승을 만났으나 산짐승도 이들을 알아보고 피해 갔다하며, 당시 남의 묘혈을 뒤져서 부장품을 훔쳐가는 일이 성행했는데 3형제의 선영에는 범접조차 하지 않았다 한다.

 

정면 3, 측면 1칸으로 구성되어져 있으며, 전통양식을 살린 다포식 건축물로 기둥하부 초석은 화강석을 원형으로 다듬은 둥근 모양을 하고 있다. 다포식 건축물은 기둥 위는 물론 기둥과 기둥사이에도 공포를 놓아 처마의 하중을 받도록 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목조 건축 양식이다.

 

출입문의 현판인 백원문

구재 또한 잘 보존되어 있으며, 구조의 변형도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양식적으로도 의령 일대에서 발견되는 화려한 장식수법과 궤를 같이 하고 있고, 조선후기 경남지역의 유교문화재를 알게 해준다는 점에서 학술적,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 할 수 있다. [출처 : 문화재청-안내판]

 

姜氏三孝子旌閭閣記
國朝五百年、崇儒右文亶本於孝理、烏頭旌典、相望於閭里。而乃若兄弟三人幷列一閭、特檜原龜山之旌是也。晉山之姜自勝國著、至本朝屢世蟬聯。至嘉善德永三子 曰泰馨。乃馨。載馨。是三人者、自齠齔已知、事親之節未嘗 有子弟過及。就里塾、夜則軰流皆鼾睡、三人必往定父母、 晨省亦如之、迅雷甚雨不廢朝夕在視寒煖。父病疽吮之、 已及丁憂年不毁泣血、三年墓在三里遠山高巖截鮮有人跡、朝暮往省如生事時。有大蟲當路、見孝子俛首逝。蓋 自葬之日至沒身、未嘗一日廢墓前當膝、窪山蹊成坦道、 至今樵牧之過是路者、道是孝子路。時則蓼賊群起、發人塜墓、要人財弊、富人無得全者。賊自相戒曰 愼勿犯姜孝子先墓。歲壬辰間、鄕人以其事屢聞於官。乙已道儒趙貞 奎等申于禮部、掌禮卿李載現據實上奏、上允之命。旌其閭子錫熙等、因朝命建閣于所居、侯道三孝扁其閣、歲太上丙辰也。嗚呼。今天下三綱絶矣。爲子而不知孝其違禽獸奚遠哉。韓文公作蕫生行歎、時之人兄弟爲讐、令 父母愁。余於姜氏三孝閣有以勸夫天下之爲人子。爲人 兄弟、者使之興起其孝弟之心也。是爲記。
株聯詩山君猶避路誰求盡人子
羣 亦知名三孝此有旌
丁巳冬至節玉山張錫英記
『晦堂先生文集』  卷二十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