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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목에 묻혀버린 현감 강응환 청덕비

천부인권 2015. 1. 3. 07:00

 

 

 

<2014/12/31 현감 강응환 청덕신명만고불망비>

 

합포구 우산동(牛山洞) 491-10번지는 밤밭고개에서 수정동으로 가는 현동사거리의 좌측 산 초입이다. 이곳은 도로를 확장하면서 산을 절개하다보니 안전철망을 건설한 곳으로 縣監姜侯膺煥淸德神明萬古不忘碑(현감강후응환청덕신명만고불망비)는 그 철망이 끝나는 지점 산에 세워져 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길옆에 서있었겠지만 이곳이 자동차 도로로 개발이 되어 비()를 둘 곳이 마땅찮으니 산 절개지 철망 뒤에 세웠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관리를 하지 않아 우거진 잡목 속에 갇힌 꼴이다. 한때는 뭍사람들의 귀감이 되었겠지만 지금은 돌보는 이 없이 폐허에 팽겨 쳐진 신세로 전락한 현감 강응환 청덕신명만고불망비를 보면서 옛 정신을 쉽게 버리는 우리 세대들의 얼굴을 보는 듯하다.

 

 

 

 

 

縣監姜侯膺煥淸德神明萬古不忘碑(현감강후응환청덕신명만고불망비)는 현동사거리의 교통섬에 설치한 안전시설이 엉터리가 아니었더라면 차를 세워 보지도 못하고 지나쳤을 것이다. 사실 이 두 장의 사진도 찍을지 말지 고민하다 이 처럼 버려진 것에도 어떤 사연이 있지 않을까 하여 증거 사진으로 촬영을 하였다.

 

옛 선인들이 좋은 지도자의 귀감이 되어 세운 비갈을 구석에 처박아 둘 것이 아니라 도로를 만든 화단으로 내려서 오늘 날에도 그 공덕이 귀감이 될 수 있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강응환은 청백리 가선대부 동래수사(姜膺煥淸白吏嘉善大夫東萊水使)이며, ()는 명서(命瑞),()는 물기재(勿欺齋)로 증영의정 희맹(希孟)9세손이다. 전라도 무송(茂松:지금의 高敞)에서 1735년 영조 을묘년에 태어났고, 179510.7일 향수 60세에 졸()하였다.

경과정시(慶科庭試)에 합격하여, 부장(部長사헌부감찰·칠원현감(漆原縣監초계군수(草溪郡守대구영장(大丘營將고령진첨사(高嶺鎭僉使창성부사(昌城府使동래부사 등을 지냈다. 창성부사가 되어서는 부근의 지도를 작성하여 불의의 변에 대비한 바도 있다.

문집으로 족종손(族從孫) 우만(宇萬)이 엮은, 물기재집21책이 전한다.

이 문집에 그가 남긴 시조 창성감고가 昌城感古歌1수와 가사 무호가 武豪歌1, 고령진의 백성들이 지은 가사 고령진민선정가 高嶺鎭民善政歌1편이 실려 있다.

<창성감고가>는 그가 창성에 이배(移配)되었을 때 지은 작품으로, 요동의 옛땅을 되찾지 못하는 통분함과 애국정신을 표현하였다.

그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의 퇴폐한 시대상에 비통해하였으며, 이러한 의식 때문에 그의 작품은 애국애족을 주제로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고, 임금의 특별 배려로 영정(影禎)을 하사 받았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요동을 수복하지 못한 한을 담고 있는 그의 시 한편을 소개하면

 

백두산 나린 물이 압록강이 되얏도다.

크고 큰 천지에 分界분계는 무삼 닐고,

슬푸다 遼東요동 옛 따흘 뉘라서 차질쇼냐

姜膺煥강응환 - 勿欺齋集물기재집


칠원읍지에 의하면 강응환(姜膺煥)은 칠원현감으로 정조 3년(기해년 1779년 8월)에 부임해서 정조 7년(계묘년 1783년 3월)에 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