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내서읍 상곡리 김씨 열부각

천부인권 2015. 4. 4. 08:00

 

 

 

<2015/4/3 상곡리 회화나무 노거수>

 

창원향교지의 보호수 기록만 보고 찾아간 내서읍 상곡리(上谷里) 회화나무 노거수는 창원향교지의 주소 기록이 잘못되어 옛 기억을 떠올리며 느낌으로 찾아 갔다. 내서읍 상곡리 190-19번지에 도착하여 주차를 하니 공원 안에는 景節門(경절문)이라는 현판을 단 烈婦閣(열부각)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정려각으로 들어가는 출입구의 문이 잠겨 있어 문틈사이로 살펴보니 烈婦士人李時祿妻金海金氏之閣(열부사인이시록처김해김씨지각)’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현판의 끝에는 丙寅 三月日(병인 삼월일)’이라 적고 있어 1926년에 세운 것임을 알게 한다.

 

 

 

<경절문>

 


붉은벽돌로 기둥을 대신한 경절문 편액을 단 출입문은 철재문을 달아 자물쇠를 채워 두어 내부로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사방에 붉은 벽돌로 담장을 쌓고 담장 위에 알루미늄 담장을 또 설치하여 방문객이 접근할 수 없도록 하였다.

 

 


이 열부각의 주인공은 내서읍 호계리 金聖培(김성배)의 여식이며 이름은 金奉先(김봉선 1889~1919)으로 李時祿(이시록)의 처 이다. 남편이 병으로 드러눕자 고통스러워 하는 남편을 위해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치료하며 매일 목욕재계하고, 남편의 병을 대신하기를 하늘에 기도하였으나 끝내 남편이 숨을 거두니 김부인은 '女必從夫(여필종부)'란 말을 남기며 순열하였다. 그때 나이가 30세였다.

고을 사람들이 열행을 기리기 위하여 정려각을 건립하였으나 도시개발 조성으로 지금의 장소에 이건하였다.

정려각 기문은 巴山 趙昺奎(파산 조병규)가 짓고, 눌재 김병린이 烈婦傳(열부전)을 썼다.



 

 

<2015/4/3 상곡리 烈婦閣(열부각)>

참조

디지털창원문화대전

창원향교지-정려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