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산감씨(檜山甘氏) 유래
시조 감계의 자는 양원(養元), 호는 연강(延岡)이다.
시조 감계는 원나라 사람으로 1351년(충정왕 3년) 공민왕(恭愍王)과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 : 원나라 황족 위왕의 딸, 공민왕비)를 따라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고려에 들어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올랐으며, 후에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졌다.
15세손 감수화(甘受和) 때 까지 본관을 연릉(延陵)으로 삼아오다가, 16세손 감철(甘喆)이 북벌을 간(諫)하여 중지하게 한 공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오르고 회산군(檜山君)에 봉해진 이후로 본관을 회산으로 하고 있다.
묘소는 충청도 공모산에 있었고 어제(御題)한 신도비가 무덕곡에 있었다고 하나 없어져 후손들이 세거지인 창원시 내리동에 제단과 신도비를 설치하고 매년 음력 4월15일 향사 한다.
[계 파]
남계공파(南溪公派)
둔엄공파(遯奄公派)
삼열공파(三烈公派)
퇴은공파(退隱公派)
현감공파(縣監公派)
합포감씨(合浦甘氏) 유래
시조 감성조(甘成朝)는 고려 시대에 사복사정(司僕寺正)을 지냈다.
문헌이 전해오지 않아 유래 등은 알 수 없다.
[가문의번영]
조선 성종 때 감상중(甘尙中)이 부사(府使)인데 문과에 급제하여 군위현감을 지냈다고 한다.
[본관지]
경상남도 창원시에 있던 지명
곡부 공씨 시조
공씨는 중국의 곡부(산동성)를 본관으로 삼고 공자 탄생이래 그를 시조로 하고 단일본으로 하여 계승해 왔다. 공자의 53세손 공완의 첫째 아들 공사회는 중국에 살았고 둘째아들 공소(孔紹)는 원나라 순제때 한림학자로 노국공주를 수행하여 고려에 와서 귀화하였고 문하시랑 평장사로 회원군에 봉해지고 창원 공씨로하여 우리나라 공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그후 노국의 공씨와 같은 조상이다 하여 1794년에 다시 곡부를 본관으로 하였다.
한편 "임자시월정원일기"에 의하면 1792년10월27일(임자년 정조16년) 좌의정 이하 여러 신하가 입시한 자리에서 정조가 전교하기를, 고려 말기에 공자의 54세손 공소가 원나라의 노국공주를 수행하여 고려에 와서 귀화하였고, 그 후손인 공서린(孔瑞麟)이 태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태학사가 된 후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기묘명현(己卯名賢)이 되었는데, 그의 9대손 공윤항
(孔胤恒)이 경기도 용인군에 살고 있으니, 그들 자손에게는 세습제로 하여 녹용(祿用)하는 것이 어떠냐고 의논하여 주달하게 하였다. 여러 신하의 신중한 논의를 거쳐 왕의 전교대로 결정하고 공윤항의 맏아들 공영수(孔營洙)에게 녹과 벼슬을 주는 한편, 공씨의 본관을 곡부로 정하라고 명령한 사실 등의 기록이 있다. 공소의 묘소는 경남 창원군 서면 두능리 두척산에 있으며 음력 10월 1일에 제사 지낸다.(무학산=두척산)(두능리=밤밭고개근처)
본 관
진주는 본래 백제의 거열성인데 신라 문무왕이 빼앗아 주를 설치했다. 명칭의 변천을 보면 신문왕 때 거주를 분할해서 진주총관을 설치했고, 고려조 성종 2년 목을 설치했다가 절도사를 두었다. 또, 현종때는 안무사로 개칭했으며 뒤에 8목의 하나로 정하였다. 조선조 태조가 현비의 내향이라 하여 진양 대도호부로 승격시켰는데, 태종때에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목으로 만들었다.
주요 성씨로는 강, 정, 하, 유, 임, 강, 임, 주씨 등이 있다.
항렬표
1세 2세 3세 4세 5세 6세 7세 8세
재(在) 석(錫) 영(泳) 식(植) 희(熙) 배(培) 종(鍾) 호(浩)
9세 10세 11세 12세 13세 14세 15세
권(權) 섭(燮) 규(圭) 용(鎔) 락(洛) 동(東) 열(烈)
파 명
파로는 어촌공파, 고산공파가 있다.
인 물
공종주 : 세종때 사헌부 감찰, 호조참판, 이조판서.
공인주 : 세조 11년에 감찰, 예조판서.
개 요
전남 고흥군 풍양면 상림리 고흥반도의 중간 지점인 고흥읍을 지나 녹동항으로 달리는 길목에 천등산을 마주보고 곡부공씨들이 처마를 맞댔다. 4백여 년 전의 입향조는 경남 하동에서 벼슬을 지낸 공덕종으로 임진왜란 때 왜적을 피해 고흥의 영산 팔경산으로 피신 왔다가 이곳에 터를 잡았다. 그의 10세손 공인두가 1807년 중국에 들어가 공자의 성상을 모셔와 지금까지 마을 뒤 대성사 재각에 모시고 있다.
중시조 소의 아들 여는 고려 때 집현전 태학사로 평장사를 지냈다. 그는 부, 의 두 아들을 두었는데 부는 집현전태학사, 평장사 등을 지내고 조선 왕조가 개국한 뒤 한성판윤, 보문각 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시문과 서예에 일가를 이루던 그는 조선조 최초의 순직 외교 사절이 됐다. 은 우왕6년 문과에 올라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냈다. 형과는 달리 사문동에 은거하면서 그는 이성계의 쿠데타를 불의로 규정하고 끝까지 절의를 지키다 유배지인 전남 여천군 삼일읍 낙포리에서 별세했다. 68,951명이 있다.(1985년)
창원 구씨 씨족(氏族)의 연원(淵源)
시조(始祖)는 구성길(仇成吉)이니 자(字)는 완지(完之)요 고려(高麗) 혜종초(惠宗朝)에 찬성사(贊成事)를 지냈으며 서경(西京)에서 공(功)을 세우고 의창군(義昌君)에 봉해졌다.
그런데 구씨(具氏)로 개성(改姓)하게 된 것은 조선(朝鮮) 정조(正祖) 때다. 정조(正祖) 15년 7월. 구시창(仇始昌)이 초관(哨官)의 후보자로 왕에게 천거되었는데 왕이 보시고 “仇姓은 예부터 있었지만 具字로 하느니만 못하니 具字로 고쳐서 올려라”하는 사성연교문(賜姓筵敎文)을 내렸다. 이 교시(敎示)에 따라 정조(正祖) 22년 6월부터 모든 공사문서(公私文書)에 具氏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始祖 仇成吉 이후 4代와 공민왕조(恭愍王朝)의 구설(仇雪)까지의 世系(세계)가 확실하지 않아 “임오보(壬午譜)”와 “정사보(丁巳譜)”가 서로 부합(符合)하지 않게 되었으므로 부득이 임오보(壬午譜)에 따라 仇雪로부터 일세(一世)로 세계(計世)하게 되었다.
본관지(本貫地) 연혁
의창현(義昌縣). 신라의 굴자군(屈自郡)인데 경순왕(敬順王)이 의안(義安)이라 고치고 회원현(檜原縣)에 예속(隸屬)시켰다.
고려에 와서는 현종(顯宗)때 의안(義安)과 합포(合浦)를 합쳐서 금주(金州)에 예속(隸屬)시켰다가 충열왕(忠烈王)때 현(縣)으로 승격하였다. 조선(朝鮮) 태종조(太宗朝)에 이르러 두 현(縣)을 합쳐 창원(昌原)으로 이름을 바꾸고 도호부(都護府)를 두었으니 이로부터 관향을 昌原이라 통칭(通稱)하게 되었다.
씨족사(氏族史)의 개요(槪要)
始祖 仇成吉. 公은 고려(高麗) 혜종(惠宗)때 찬성사(贊成事)를 지냈으며 서경(西京)에서 공(功)을 세워 의창군(義昌君)에 봉해진 것이다.
公의 아들 구휘(仇喜)도 찬성사(贊成事)를 지냈고 손자인 구경(仇景)은 수안현감(遂安縣監)을 하였으며 증손(曾孫) 구렴(仇廉)은 참봉(參奉)을 지냈다. 그러나 이후의 세계(世系)를 실전(失傳)함으로 부득이 공민왕조(恭愍王朝)의 구설(仇雪)로서 일세(一世)로 세계(計代)하게 되었다.
一世 仇雪의 아들 종길(宗吉)은 창원구씨(昌原具氏)의 중조(中祖)로 숭앙을 받는 인물이다. 자(字)는 자안(子安). 호(號)는 유곡(川谷)으로, 조선(朝鮮) 세종조(世宗朝)에 문과(文科)에 합격하여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을 하였는데 천성(天性)이 정직하고 엄격하며 재능도 뛰어나서 세종(世宗)의 은총을 입어 강론(講論)도 하였으며 역학(易學)에도 밝아 왕이 향주(香酒)와 주역(周易)을 하사(下賜)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향사(享祀)는 음력 10월 첫째 일요일에 거행한다.
公의 큰아들 복한(復漢-부사공파조)은 충청도사(忠淸都事),강릉부사(江界府使),전라병마절도사(全羅兵馬節度使)를 지냈으며 둘째 동설(東薛-진사공파조)은 진사(進士), 셋째 동직(東直-승지공파조)은 승지(承旨)를 지냈다.
復漢公은 성품이 정직 방엄(方嚴)하였으며 재행(才行)이 일찍부터 성취되었다. 그 장자(長子) 석종(碩從)은 의성훈도(義城訓導)를 지냈고 둘째 이종(理從)과 셋째 순종(順從)은 모두 진사(進士)에 올랐으며, 석종공(碩從公)의 아들 유온(有溫)은 창원교수(昌原敎授)로서 문장이 뛰어나 당세(當世)에 추종(推重)되었다.
집성촌
경남 의창군 동면 일원
부산직할시 동래구 복천동
경남 함안군 함안면 강명리
충남 서천군 시초면 일원
경남 고성군 거류면 송산리
전북 김제군 금구면 대화리
항열표(行列表)
世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항렬자
동(東), 환(煥), 재·재(在·載), 진·옥(鎭·鈺), 영(永), 근(根), 병(炳), 효(孝), 종(鍾), 수(洙), 상(相), 렬(烈)
창원 김씨 (昌原金氏) 시조 : 김을진[金乙軫]
창원김씨(昌原金氏)의 시조 김을진(金乙軫)은 경순왕의 셋째아들 영분공 김명종의 18세손이다. 그는 고려조에서 금자광록대부와 태자첨사를 역임하였고, 공민왕 때 홍건적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회원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창원으로 하게 되었다.
가문을 빛낸 인물을 살펴보면 시조 을진(乙珍)의 아들 왈원(曰元)이 고려 충혜왕 때 참지정사를 지내고 상호군에 올라 피난가는 왕을 호종하여 일등공신를 받았으며, 충정왕 때 삼사의 으뜸벼슬인 판삼사사로 나라에 공을 세워 의창부원군에 봉군되어 크게 명성을 떨쳤다.
왈원의 손자로 참판을 역임한 갱의 아들 3형제 중 장남 맹창(孟昌)이 군수를 지내고, 의 후손에서 부안파(扶安派)와 연천파(連川派)를 이루었으며, 차남 중창(仲昌)은 현감을 역임하고 그의 후대에서 금천파(金川派)로 갈리었다. 막내 계창(季昌)은 예종때 부제학을 거쳐 이조참판을 지냈으며 후대에서 파주파(破州派)·상주파(尙州派),·창원파(昌原派) 등으로 나누어졌다.
1985년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창원김씨(昌原金氏)는 남한에 총 889가구, 33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집성촌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동리동
경북 상주군 외남면 흔평리
전북 부안군 부안읍 행중리
황해도 금천군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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