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책과 기록

구주 강대적(鷗洲 姜大適)은 14대조이다.

천부인권 2012. 9. 13. 16:28

 


강대적 [姜大適 : 1594~1678]

자 학중(學仲), 호 구주(鷗洲)
본관 : 진주(晉州)
관련사건 : 병자호란
저서(작품) ; 구주집
대표관직(경력) : 동부승지, 의병장
정의 :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학중(學仲), 호는 구주(鷗洲). 아버지는 제용감정 익문(翼文)의 둘째이다. 1612년 임자(壬子)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고, 학행(學行)과 효도로 여러 번 참봉ㆍ세마(洗馬)ㆍ사부(師傅)ㆍ찰방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의병(義兵)을 일으켜 적과 싸웠다. 이듬해인 1637년 충효겸전(忠孝兼全)으로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추증(追贈)되었다. 1652년 한재(旱災) 대책에 대한 상소(上疏)를 올린 바 있다.
저서로는 『구주집』이 있다.

 

영남문집(嶺南文集)

 

구주집(驅洲集) 강대적(姜大適) (1594, 선조 27-1678, 숙종 4)
자(字) 학중(學仲), 호(號) 구주(驅洲), 본(本) 진주(晋州), 부(父) 익문(翼文), 거(居) 합천(陝川)

 

4권2책

 

행장(行狀); 조호래(趙鎬來) 찬(撰). 공(公)은 1612년(광해군 4) 진사시(進士試)에 합격(合格)하여 태학(太學)에 유학(遊學)할 때 조용주(趙龍洲), 이백헌(李白軒), 정양파(鄭陽坡), 조포저(趙浦渚) 등과 도의교(道義交)를 맺었다. 이듬해 산릉참봉(宣陵參奉), 군자감직장(軍資監直長)이 되었으나 광해난정(光海亂政)에 즈음하여 김제남(金悌男)의 척사(척死), 영창대군(永昌大軍)의 우해(遇害), 대비(大妃)의 서궁유폐(西宮幽閉) 등 대옥사(大獄事)와 패륜행위(悖倫行爲)가 계속돼매 부(父) 익문(翼文)과 형(兄) 대수(大遂)가 이에 항소(抗疏)하다가 유배(流配) 당하므로, 공(公)이 부형(父兄)을 신구(伸救)하려다가 도리어 흉당(凶黨)의 미움을 받아 제원찰방(濟源察訪)으로 좌천(左遷)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인조반정(仁祖反正)(1623)후 부(父)와 형(兄)이 석방되고 병자호난(丙子胡亂)(1636)에 형(兄) 한사공(寒沙公) 대수(大遂)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오령(烏嶺)까지 갔다가 남한산성(南漢山城)의 보(報)를 듣고 통곡(痛哭)하고 돌아왔다. 1650년 내시교관(內侍敎官)이 되고 이듬해 세마(洗馬)가 되었으나 모두 사임하였다.


합천읍지

* 묘(墓) : 경남(慶南) 합천군 율곡면 노양리 (신촌 마을)
* 부(父) : 익문(翼文)
* 자(子) : 휘민(徽敏), 휘중(徽重), 휘망(徽望), 휘계(徽係), 휘걸(徽傑), 휘급(徽급)


自新箴 자신잠
人苟得新 사람이 진실로 새로울 수 있다면
雖老猶新 비록 늙더라도 오히려 새롭다네
改過則新 허물을 고친다면 새로울 것이요
遷善則新 착한 데로 옮겨가면 새로우리라
舍舊就新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데로 가면
是謂一新 이를 일러 일신이라 이른다네
聖賢道新 성인과 현인의 도리는 새롭나니
亙古長新 영원토록 길이길이 새로우리라


鷗洲亭 구주정
小築才新就 조그만 집을 겨우 새로 마련하니
殘生也合休 남은 목숨이 쉬기에 합당하네
靑鬟軒外揷 푸른 산은 마루 밖에 솟아있고
碧玉枕邊流 푸른 물은 베개 가에 흐르네
沙月明如晝 모래 위 달은 밝기가 납과 같고
松風爽作秋 솔바람은 서늘하기가 가을과 같네
從今伸睡脚 이제는 마음껏 잠잘 수 있으니
此外更何求 이 밖에 다시 무엇을 구하랴


鷗洲亭月夜 구주정 달밤
獨坐茅茨夜 한밤중 초가집에 홀로 앉아서
開牕浩氣生 창문 여니 호연지기 생기네
白雲千萬里 흰 구름은 천만리요
明月二三更 밝은 달은 이, 삼경이네
野闊天猶近 들이 넓으니 하늘이 오히려 가깝고
亭高地自平 정자가 높으니 땅이 저절로 평탄하네
朗吟淸不寐 낭랑한 읊조림에 정신 맑아 잠 못 드니,
塵世更無情 티끌 같은 세상에는 더 이상 생각이 없다네


麥秋到淮陽 戊午 맥추¹⁾에 회양²⁾에 이르러(1618년)
麥秋分野色 보리 익을 무렵 온 들판이 누렇고
梅雨養頑陰 매우³⁾가 짙은 그늘을 만드네
廢郭千年地 폐허가 된 성곽은 천년의 땅이요
他鄕萬里心 타향에 온 나그네 만리의 마음일세
郊暄啼土鴨 들녘이 시끄러우니 오리 우는 소리요
村麗熟來禽 마을이 고우니 새들이 모여드네
錯莫天低樹 어수선한 하늘 밑의 나무들은
終南隔幾岑 종남산⁴⁾에서 몇 봉우리나 떨어져 있는가?


1) 맥추(麥秋)-보리가 익어 거두어 들이게 될만한 계절(음력 4월)
2) 회양(淮陽)-강원도 북쪽에 있는 고을 이름, 당시 백형 한사가 이곳에 유배되어 있었다.
3) 매우(梅雨)-매실이 익을 무렵 오는 긴 장맛비.
4) 종남산(終南山)-서울의 남산


遊龍游潭 용유담¹⁾을 유람하고
適意由來貴 뜻에 맞는 일이 본래 귀한데
尋山不必花 산을 찾음이 꽃 때문만은 아니네
村居春爛熳 시골에 사니 봄기운이 무르익고
靈洞雪橫斜 신령스런 마을에 눈이 가로 비꼈네
萬象看來別 만물은 보다 보니 구별되고
三淸路未賖 삼청²⁾은 길이 멀지 않구나
悠然動詩興 유연하게 시의 흥취 일어나는데
吟能酌流霞 읊기를 마치며 신선의 술을 마시네


1)용유담(龍游潭)-지리산 북쪽 자락 함양군 마천면 지역의 엄청강에 있다.
2)삼청(三淸)-도교(道敎)에서 옥청, 상청, 태청을 말함.


三郞浦乘船 삼랑포¹⁾에서 배를 타고
一葉仙舟逐海雲 한 조각 신선배가 바다의 구름 좇고
三郞浦上日斜曛 삼랑포 하늘엔 해가 비스듬히 비치네
蓬萊此去無多路 봉래²⁾로 가는 데는 별 다른 길이 없으니
分付篙工捩柁勤 사공에 분부³⁾하여 부지런히 노를 젖게하네


1)삼랑포(三郞浦)-밀양시 삼랑진을 말한다. 이곳은 밀양강이 낙동강과 합류하는 곳으로 조선시대 조창이 있던 곳이다.
2)봉래(蓬萊)-동래(東萊)의 별칭이다.
3)분부(分付)-아랫 사람에게 명령을 내림 또 그 명령.


行狀[張升澤]

嗚呼 鷗洲姜先生家聲名節 卽南州縫掖之推重也 挽近左海陸沈 古家之文獻日索 公門後 承竊懼不傳不仁之禮 訓方收輯遺什付諸 手民遣門少聖祚英達奉家 狀一通屬狀行於不 佞顧公共尊衛之地敢辭諸謹按公晉陽世家 諱大適字學仲 系出麗朝 兵部尙書天 水縣開國男 殷烈公民瞻因簪組 名德世濟其美逮 本朝迭興太常卿渭祥 勳封晉州君 左贊成居好 佐世廟致治是爲七世 曾祖仁壽憲府監察 贈執義尸祝於道淵 祖世倬判官 贈同副承旨 考翼文司諫 號戇庵與同志聯疏 躋五賢於聖廡 續値昏朝骨肉之變 抗義彈疏爲奸 黨仁弘等所惎縷絏於王獄 長子大遂續上全恩疏 幷救鄭桐溪竄斥淮陽 及仁廟改玉親敎 旌褒曰父囚九年北寺 子竄十載南荒一節 如昨三綱不絶姜翼文父子 萬古瞻仰陞資
憲禮判妣貞夫人陝川李氏奉事得男之女 萬曆甲午誕公於江陽之館基 文學天資 而愛敬良能也 未離抱已承順無違及 上學先問讀書 卽爲人之方歟 承旨公已中心 期大焉不煩 長者鈐束而勤謹向上鞭辟近裏先究志義於 行墨之外未及勝冠聲譽已吃吃於鄕里 以寒沙爲兄 鏡湖爲弟 人稱戇翁家三難矣 壬子升司馬 與李白軒趙龍洲諸 名碩遊學芹泮臭味 相求究索經傳前矛衿紳 癸丑除宣陵參奉 軍資監直長 時彝天攸斁奸兇當國父繫兄竄
朝議洶懼乃屢度辨白冤鬱莫伸外擯濟源丞 丙辰遭祖考承旨公喪父兄幷罹王章情理叵 測公銜哀攝行附身附棺勿之有悔焉丙子金 虜覘國大駕播遷公從寒沙公倡義西赴至 鳥嶺聞下城之報投戈痛哭而還戊子遭外艱 年迫六旬據禮致慼廬墓終制及後喪年愈耆 而一遵前喪 自丙子後益無意於名路和 陶靖節採菊詩 以見志略曰 疏枝縱被嚴霜妬香味 寧隨暮歲更甲子記年悲舊國南山入望任閒 情庚寅除敎官辛卯以洗馬召皆不就或
迫於朝命黽勉就職而未曾淹時月也然憂 國恤民之意未嘗少弛每聞朝政有闕輒愀然 屢日壬辰因亢旱上進言疏辭旨切直義理謹 嚴朝著稱誦焉晩年尤嗜聖賢書選日邀友行 揖讓之古禮遞月集徒講性命之大原雅好佳 山水嘗南至鄭學圃孤山亭 與朴無悶堂河台溪河謙齋權東溪諸賢經談詩律 爲十日忘形 之遊卜築數椽於林北寬閒之境扁 以鷗洲精含窓明几淨琴書 自靖別構一室於其傍爲諸 生隷業之所好古道而牖後學皆此類也一時
衿紳以公爲繩尺焉肅廟戊午三月十九日 享年八十五而正終道伯以學問孝行聞于朝上 命贈左承旨復其戶旌其閭墓 郡東栗津面宜陽洞佩金山負酉原 淑夫人延日鄭氏參判思恕女圃隱后附于公墓 三男徽敏徽重幷 通德郞徽望進士 二女金羅趙㻶掌禮院別座 及竹山吳善基士人也 淑夫人彦陽金氏士人 錫柱女都事鍾后 墓栗津面烏葛里店後負亥原 三男徽俊通德郞贈戶曺參判 徽傑徽伋 幷通德郞 一女李時馣 徽敏五男尙齊泰齊受齊進士出 錫齊胤齊通德郞出 一女魚宗吉 徽重三男命齊慶齊聖齊 三女尹斗山朴壽玄李石緯 徽望五男顯齊永齊擇齊 業齊通政 建齊進士 一女許璉 徽俊五男弼齊以齊德齊應齊 有齊嘉善 徽傑一男萬齊一女鄭乙履 徽伋一男得齊 以下繁不錄嗚呼先生天性純粹沈雅 貞剛厚重忠孝質行 爲一家之茶飯文章德業 爲百世之標率風猷雷灌山仰有素今而奉讀 遺什一 一與舊所聞不爽如親承警咳於曠世之下 升澤與古爲徒不免夫夫之多言況公之役也 玆據家狀掇其略而歸之願更俟後世之堯夫云爾
玉山張升澤謹狀
鷗洲先生文集附錄卷之二


행장
아아! 구주(鷗洲) 강선생은 한 집안의 명성과 이름난 절개가 곧 남쪽 고을의 선비들에게 존중의 대상이 되어 왔다. 요새 우리나라가 망하여 고가(古家)의 문헌이 날마다 없어지고 있다. 공(公)의 집안 후손이 ‘조상의 훌륭함을 전하지 못함은 자손이 어질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예기』의 훈계를 두려워하고 바야흐로 남긴 시편(詩篇)을 모아서 수민(手民)에게 주고 문중(門中)의 젊은이 성조(聖祚), 영달(英達)을 보내어 가장(家狀) 한 통을 받들고 와서 나에게 행장을 부탁하는데 공공(公共)의 높게 모시던 처지를 돌이켜보면 감히 사양할 수 있겠는가?
삼가 상고하건대 공은 진양 세가¹⁾로써 휘(諱)는 대적(大適)이요, 자(字)는 학중(學仲)이니 계통은 고려조(高麗朝) 병부상서(兵部尙書) 천수현개국남(天水縣開國男) 은렬공(殷烈公) 민첨(民瞻)에게서 나왔는데, 그 뒤로 높은 벼슬과 이름난 덕이 있는 사람이 대대로 그 아름다움을 나타냈다. 본조(本朝)에 들어 와서는 태경상(太常卿) 위상(渭祥)에 이르러 훈작(勳爵)으로 진주군(晉州君)에 봉해졌으며 좌찬성(左贊成) 거호(居好)는 세종(世宗)의 정치를 도왔으니 이 분이 7세조가 된다. 증조(曾祖) 인수(仁壽)는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는데 집의(執義)에 증직되었고, 도연서원(道淵書院)에 제사지낸다. 조부 세탁(世倬)은 판관을 지냈는데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증직 되었다.
아버지 익문(翼文)은 사간(司諫)으로서 호가 당암(戇庵)이니, 동지들과 함께 연명(聯名)하여 소를 올려 오현(五賢)을 성무(聖廡)에 모시고자 했고, 계속하여 혼조(昏朝)의 골육의 변을 당하여 의리를 지켜 공격의 소(疏)를 올렸다가 간사한 무리 인홍(仁弘) 등의 거리끼는 바가 되어 감옥에 갇혔다. 큰 아들 대수(大遂)는 계속해서 전은소(全恩疏)를 올리고 이와 함께 정동계(鄭桐溪)²⁾를 구원하다가 회양(淮陽)으로 귀양 갔으나 인조(仁祖)가 반정하자 임금이 친히 교서를 내려 표창하기를 ‘아버지는 9년 동안 북시(北寺)³⁾에 갇히고 아들은 10년 동안 남쪽 변방으로 귀양 가서 한 가지 절도가 어제와 같이 삼강(三綱)이 끊어지지 않았으니 강익문(姜翼文) 부자(父子)는 만고에 우러러볼 사람이다.’라고 하고 계급을 예조판서로 올렸다.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이니 합천이씨(陜川李氏) 봉사(奉事) 득남(得男)의 따님으로 만력(萬曆) 갑오년(1594)에 공을 강양(江陽)의 관기리(館基里)⁴⁾에서 낳았다. 공은 타고난 바탕이 문학에 터를 잡았고 애경(愛敬)을 타고난 재능으로 삼았다. 강보(襁褓)⁵⁾를 떠나기 전에 이미 어른의 명령을 좇는 것을 어기지 않았고 입학(入學)하기에 이르자 먼저 글 읽는 것이 곧 사람 되는 방법이냐고 물으니 할아버지인 승지공(承旨公)이 이미 마음속으로 크게 될 것을 기대했다. 어른의 단속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부지런하고 삼가 학문이 몹시 절실하여 먼저 뜻과 의리를 글자 밖에서 연구하니 관례(冠禮)를 하기 전에 칭찬이 이미 향리에 자자했다. 한사(寒沙)를 형으로 삼고 경호(鏡湖)를 아우로 삼으니 사람들이 ‘당옹(戇翁)의 집을 삼난(三難)’이라고 일컬었다.
임자년(1612)에 사마(司馬)에 올라 이백헌(李白軒),⁶⁾ 조용주(趙龍洲)⁷⁾등 여러 이름난 선비들과 함께 성균관에 유학하여 취미(趣味)를 서로 구하고 경전(經傳)을 연구하여 의관(衣冠)한 사람에 앞섰다.
계축(1613)년에 선릉참봉(宣陵參奉) 군자감직장(軍資監直長)에 세수 되었다. 이 때 도리가 바뀌고 간사하고 흉악한 자들이 나라 일을 맡아서 아버지는 갇히고 형은 귀양 가서 조정 의논이 흉흉하고 두렵자, 이에 여러 번 그 억울함을 변명하다가 밖으로 제원승(濟源丞)에 내쫓겼다.
병진(1616)년에 조고(祖考) 승지공의 상사를 당했는데 아버지와 형이 모두 나라의 법에 걸려서 정리를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공은 슬픔을 머금고 대리로 행하여 몸에 붙이고 관(棺)에 붙여 하나도 후회함이 없도록 하였다.
병자(1636)년에 금(金)나라 오랑캐가 나라를 엿보자 임금이 파천했다. 이에 공은 맏형 한사공(寒沙公)과 함께 좇아 의병을 일으켜 서쪽으로 달려서 조령(鳥嶺)에 이르니 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고 돌아 왔다.
무자(1648)년에 아버지 상을 당하는데 나이가 육순(六旬)에 가까웠다. 예법에 의하고 슬픔을 다하여 여묘(廬墓)하고 상제(喪制)를 마쳤다. 뒤의 초상에는 나이가 더욱 늙었으나 한결같이 먼저 상사 때와 같이 했다.
병자년 이후로는 더욱 이름 내는 길에 뜻이 없어 도정절(陶靖節)⁸⁾의 「채국시(採菊詩)」에 화답하여 뜻을 보였으니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성긴 가지가 비록 엄한 서리의 시샘을 받더라도,
향기와 맛이 어찌 지는 해를 따라 그치랴?
갑자년을 기억하니 옛 나라가 슬프고,
남산이 바라보이니 한가한 심정이로다.


경인(1650)년에 교관(敎官)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신묘(1651)년에 세마(洗馬)로 불렸으나 역시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뜻은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아서 매양 조정의 정치에 잘못이 있다고 들으면 문득 여러 날을 슬퍼했다.
임진(1652)년에 극심한 가뭄으로 인하여 진언소(進言疏)를 올렸는데 말뜻이 간절하고도 돋고 의리가 삼가고 엄해서 조정 사람들이 몹시 칭송했다.
늘그막에는 더욱 성현(聖賢)의 글을 좋아했고 날을 가려 벗들을 불러 읍양(揖讓)의 고례(古禮)를 행하였고 달을 바꾸어 무리를 모아 성명(性命)의 대원(大原)을 강론했다. 한편 아름다운 산수를 좋아하여 일찍이 남쪽으로 정학포(鄭學圃)의 고산정(孤山亭)에 이르러 박 무민당(朴无悶堂), 하태계(河台溪), 하겸재(河謙齋), 권동계(權東溪) 등 여러 어진 이와 함께 시율(詩律)을 이야기하며 열흘 동안 세상을 잊고 자연을 즐겼다.
임북(林北)의 넓은 곳에서 두어 서까래의 집을 짓고 ‘구주정사(鷗洲精舍)’라고 이름 했는데, 창은 밝고 책상은 깨끗한데 거문고와 책이 스스로 편안했다. 따로 방 하나를 그 곁에 지어서 여러 학생들의 학업을 닦을 곳으로 삼았으니 옛 도를 좋아하고 후학을 깨우치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한 때의 선비들이 공을 본보기로 삼았다.
숙종(肅宗) 무오(1678)년 3월 19일 향년 85세로 생을 마치니, 도백(道伯)이 학문과 효행(孝行)을 조정에 아뢰자 임금이 명하여 좌승지를 증직하여 그 집을 회복시키고 정려를 내렸다.
묘소는 고을 동쪽 율진면(栗津面) 의양동(宜陽洞) 패금산(佩金山) 유좌(酉坐) 언덕이다. 숙부인(淑夫人)은 연일정씨 참판사저(參判思恕)의 따님이요 포은(圃隱)의 후손이니 공에게 부묘(附墓)했다. 아들이 셋이니 휘민(徽敏)과 휘중(徽重)은 모두 통덕랑(通德郞)이요 휘망(徽望)은 진사이다. 딸은 둘이니 장례원별좌(掌禮院別座) 금라(金羅) 조필(趙㻶)과 사인(士人) 죽산(竹山) 오선기(吳善基)에게 시집갔다.
숙부인(淑夫人) 언양김씨(彦陽金氏)는 사인 석주(錫柱)의 따님이니 도사(都事) 종(鐘)의 후손이다. 묘는 율진면 오갈리(烏葛里) 해좌(亥坐) 언덕이다. 3남을 두었는데 휘준(徽俊)은 통덕랑으로서 호조참판에 추증되었고, 휘걸(徽傑)과 휘급(徽伋)은 모두 통덕랑이다. 사위는 이시암(李時馣)이다.
휘민(徽敏)은 5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상제(尙齊), 둘째 태제(泰齊), 셋째 수제(受齊)는 진사인데 출계(出系)하였고, 넷째는 석제(錫齊), 막내아들 윤제(胤齊)는 통덕랑인데 출계하였다. 사위는 어종길(魚宗吉)이다. 휘중(徽重)은 3남 3녀를 두었으니 명제(命齊), 경제(慶齊), 성제(聖齊)이고, 사위는 윤두산(尹斗山), 박수현(朴壽玄), 이석위(李石緯)이다. 휘망()은 5남을 두었으니 첫째 현제(顯齊), 둘째 영제(永齊), 셋째 택제(擇齊)이고, 넷째 업제(業齊)는 통정(通政)이고 막내아들 건제(建齊)는 진사이다. 1녀는 허련(許璉)에게 출가 했다. 휘준(徽俊)은 5남을 두었으니 필제(弼齊), 이제(以齊), 덕제(德齊), 응제(應齊), 유제(有齊)는 가선(嘉善)이다. 휘걸(徽傑)은 1남을 두었으니 만제(萬齊)이고, 1녀는 정을리(鄭乙履)에게 출가 했다. 휘급(徽伋)은 1남을 두었으니 득제(得齊)이다. 이하는 번다해서 기록하지 못한다.
아아! 선생은 타고난 성품이 순수하고 침착하며 아담하여 곧고 굳세고 두텁고 무서운데다가 충성과 효도를 성실히 행하는 것을 한 집안에서 으레 하는 일로 삼았고 문장과 덕업(德業)을 백세(百世)의 표준으로 삼아서 바람이 불고 천둥이 쳐도 본래부터 산처럼 우러러왔었다. 그러다가 이제 그 남긴 시문(詩文)을 받들어 읽으니, 하나하나가 옛날에 듣던 바와 다르지 않아 마치 친히 경해(謦咳)의 음성을 여러 대 후에 듣는 것과 같도다.
승택(升澤)이 옛 사람과 무리가 되어 사람마다 많은 말을 면할 수 없는데, 하물며 공이 몰(歿 )했음에랴? 이에 가장(家狀)에 의하여 그 대략을 추려서 돌려보내는바 원컨대 다시 후세의 요부(堯夫)⁹⁾를 기다릴 것이다.
옥산(玉山) 장승택(張升澤)¹⁰⁾이 삼가 행장을 씀.


세가(世家)¹⁾ : 대대로 국록(國祿)을 받는 집안.
정동계(鄭桐溪)²⁾ : 정온(鄭蘊). 동계(桐溪)는 호이며, 병자호란에 척화(斥和)를 주장함.
북시(北寺)³⁾ : 환관(宦官)이 있는 곳
관기리(館基里)⁴⁾ : 합천군 묘산면 관기리
강보(襁褓)⁵⁾ : 어린아이의 작은 이불(포대기)
이백헌(李白軒)⁶⁾ : 이경석(李景奭)의 호가 백헌(白軒)이다. 병자호란에 척화신(斥和臣)으로 심양(瀋陽)에 잡혀 감.
조용주(趙龍洲)⁷⁾ : 조경(趙絅)의 호가 용주(龍洲)이다. 척화신(斥和臣)으로 의주(義州)에 안치 됨.
도정절(陶靖節)⁸⁾ : 도연명(陶淵明)의 시호가 정절(靖節)임.
요부(堯夫)⁹⁾ : 송나라 학자 소옹(邵雍)의 자(字)
장승택(張升澤)¹⁰⁾ : 1838~1916, 조선 말기의 유학자.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희백(羲伯) 호는 농산(農山)이다.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경북 칠곡에서 뇌양정사(뢰磊精舍)를 건립하여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