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책과 기록

최윤덕 상국 유허지가 기록된 구복한 묘갈명

천부인권 2012. 9. 24. 16:05

 

 

<1962년 김종하선생이 발간한 '창원군지>

 

'창원군지'는 부산시 중구 동광동에 있는 국제인쇄주식회사에서 인쇄를 하고 국제신보출판사에서  발행을 하였으며 편찬자(編纂者)는 김종하씨로 1962년 9월에 발행되었다. 이 책의 서문에는 "昌原 郡誌는 구지(舊誌)를 표준(標準)하였는데 구지는 대단소략(大端疎略)하기도 하고 또 백년전(百年前)의 편찬(編纂)이다 그러므로 이 비재천식(菲才淺識)임을 자량(自量)치 못하고 다방면(多方面)으로 수집(收輯)하여 많은 증익(增益)을 한 것이다. 상하편을 나누었는데 상편은 사적(事蹟)과 연혁(沿革)의 류(類)이므로 우리 국문을 혼용하여 현대독자(現代讀者)의 편의(便宜)를 취(取)하였고 하편은 서기(序記), 전지(傳誌), 제영(題詠)의 류를 본문 그대로 수록(收錄)하였고 역해(譯解)하지 아니한 것은 작자(作者)의 본지(本旨)에 손상(損傷)이 있을가 함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후략) 

 

 

 

<창원군지 하편 86페이지의 '가선대부행전라병마절도사 구복한 묘갈명>

 

 

<창원군지 하편 86페이지의 '가선대부행전라병마절도사 구복한 묘갈명 내용>


嘉善大夫行全羅兵馬節度使具復漢墓碣銘
不佞璘嘗聞 郡北乃谷之原 有封向丙 曰故全羅兵馬節度使仇公之藏也 皇明正德十年表題云 日後孫麟元 以狀來 屬余爲銘曰 吾祖而尙闕顯刻 子孫之不肖也 惟是之懼 敢以請時余在憂服中 無以泚筆 續因其子然入之踵至 遂按狀而復之 公諱復漢 字象伯 具氏本姓 仇氏昌原人 正廟朝改錫今姓 高麗勳臣贊成事義昌君成吉 其上祖也 子喜亦贊成事 累傳歷生員雪 有曰宗吉我 世宗壬寅 中庭試 官至直提學 號川谷 卽公之考也 妣淑夫人星山李氏恬女 公性正直方嚴 才器夙就 官忠淸都事 江界府使 湖南兵馬節度使 江界有去思碑 此盖公之履歷大槪 而餘無可稽 生卒亦未詳 在子孫 殊爲可恨耳 然公當國初擧賢進能之日 始仕陞五品 從而莅邑制閫 遺愛在人 抑可以槩其蘊也 公嘗居乃谷之上里 居人名之曰 都事址 崔相國閏德遺墟 亦在其南 到于今竝稱之 配淑夫人昌寧卞氏璋女葬祔 公有子五人 男碩從義城訓導 理從 順從 俱進士 末從 女適黃自華 孫男有溫進士 有良 有恭 有儉 有績 英達 英春 安文 成敬 善達通政 哲達進士 豊善 餘不錄銘曰
若稽昌辰 則哲官人 公時膺選 珪組來纏 片石堪言 西民頌仁 百體雖虧 足辨肘跟 母或躪蹂 時維大夫之阡
己卯穀雨節 立

 

가선대부 행전라병마절도사 구복한 묘갈명    

김병린(金柄璘 : 1861[철종 12]∼1940)


내가 일찍이 들으니 군 북쪽(북면) 내곡에 병향(丙向)에 봉분(封墳)이 있는데 옛날 전라병마절도사 구공의 장리(藏履)라고 하였다. 정덕(正德) 18년 표제(表題)에 이르기를 후손 인원(麟元)이 행장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碑銘을 부탁하였다. “나의 선조의 무덤에 비명이 없으니 이는 자손이 불초한 탓입니다. 이제 글을 남겨 후세에 징험하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나는 병으로 몸이 좋지 않고 아름다운 문장도 잘 쓰지 못한다고 사양하였다. 그러나 그 아들 연팔(然八)까지 연이어 와서 부탁하였다. 이에 드디어 그 행장을 살펴보고 글을 쓰게 되었다. 공의 휘는 복한(復漢)이며 자는 상백(象伯)이다. 구씨(仇氏)는 창원인이다. 정조대왕 때 현재의 성인 구(具)씨를 하사하였다. 고려 훈신인 贊成事 義昌君 성길(成吉)이 그 윗대 조상이다. 그 아들 喜 역시 찬성사이다. 여러 대를 전하여 생원 雪 그리고 종길(宗吉)이 있다. 조선 세종 임인년에 정시(庭試)에 급제하여 관직이 直提學에 이르렀는데 호를 천곡(川谷)이라 하니 공의 고(考)이시다. 비(妣)는 숙부인 성산 이씨 념(恬)의 딸이시다. 공의 성품은 정직하고 방엄(方嚴)하며 재능과 기량이 일찍이 다듬어졌다. 관직은 충청도사, 강계부사, 호남병마절도사 등을 거치셨는데 강계(江界)에 거사비(去思碑)가 있다. 이것이 공의 이력의 대략인데 다른 것은 계고(稽考)할 수 없다. 생졸연대 역시 미상이며 자손들만 있으니 매우 애석한 일이다. 그러나 공이 일찍이 조선 초기에 어질고 능력 있는 사람을 천거하여 쓸 때 정오품의 벼슬로 관직에 올랐다.  이어서 바로 고을의 수령을 맡아 백성들을 아끼어 거사비(去思碑)를 사람들이 남기게 되었으니 그 온축된 대략을 알 수 있다. 공은 일찍이 내곡의 상리에 살았는데 마을 사람들이 도사(都事) 집터라고 일컬었는데 상국 최윤덕의 유허이다. 또한 그 남쪽도 지금까지 그렇게 말하고 있다. 배(配)는 숙부인 창녕 변씨(卞氏) 장(璋)의 따님인데 합부하였다. 공의 자녀는 다섯인데 석종(碩從)은 의성훈도이며, 理從. 順從은 모두 진사이며 末從이 있다.  그리고 딸은 황자화(黃自華)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유홍(有泓)은 진사이며 유량, 유공, 유검, 유적,  영달, 영춘, 안문, 성경, 선달(通政), 철달(進士), 풍선 등이 있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명(銘)왈 若稽昌辰, 卽哲官人, 公時膺選, 珪組來纏, 片石堪言, 西民頌仁, 百體雖虧, 足辨肘踉, 無或躪蹂 是維大夫之阡
나라가 창성할 시대에는  관직에 사람을 밝게 뽑아 쓰는데 공은 이 때 천거를 받아 벼슬을 하시게 되었다. 비석에 몇 마디 말을 남기지만 이미 강계의 백성들이 그 어짊을 칭송하였다. 모든 행적을 다 기록하지는 못하지만 그 삶의 대개는 족히 판단할 수 있으니 그로 인하여 짓밟히는 일은 없을 것이니 이곳이 바로 대부의 무덤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역해 : 박태성

 

최윤덕장군이 태어난 곳은 아버지 최운해의 유허지인 무곡리 였다고 한다면 살았다고 전하는 생가지의 기록은 눌재 김병린(訥齋 金柄璘)이 지은 '구복한(具復漢)의 묘갈명'이 현재까지는 기록으로 남은 유일한 글이다. 

 

그리고 http://www.shinjongwoo.co.kr/name/ga/gu/ckddnjs/ckd5.htm에 의하면 아래처럼 소개를 하고 있다.

구복한(具復漢)

창원인 자(字)는 상백(象伯)이요, 본관(本貫)은 창원(昌原)이니 고려(高麗) 공신(功臣)으로 찬성사(贊成事) 의창군(義昌君) 성길(成吉)의 후손(後孫)이다.

그는 창원군(의창군) 북면(北面) 내곡리(內谷里) 최윤덕 [崔潤德, 1376~1445]의 유지(遺址)인 상리(上里)마을에서 구종길(具宗吉)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품(性品)이 정직(正直)하고 그릇이 커서 대인(大人)의 풍모(風貌)를 지녔으니 매사(每事)를 처리(處理)함에 있어 사람들로부터 두터운 신임(信任)을 받아 왔다고 한다. 일찌기 무과(武科)에 출세(出世)하니 벼술이 충청도사(忠淸都事)를 거쳐 강계부사(江界府使)와 전라병마절도사(全羅兵馬節度使)를 역임(歷任)하였다.

 

창원구씨 세보 권지일에 기록 된 또다른 구복한의 비문 내용이다. 함안 산인 고려동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학자 우산 이훈호선생이 쓴 비문은 이처럼 적혀 있다.

 

 

 

 

 

부사공 휘복한 묘표(府使公 諱復漢 墓表)
우산 이훈호(芋山 李熏浩:1859~1932)

 

공의 휘는 복한(復漢)이요 자는 상백(象伯)이며 성은 구씨니 본관은 창원이다. 시조의 휘는 성길(成吉)이니 고려 해종조에 벼슬이 찬성사에 이르렀고 서경에서 공훈을 세워 의창군에 봉하여 졌다. 그의 아들 희(喜)도 또한 찬성사에 이르렀다. 후세에 휘 설(雪)은 생원(生員)이요 생원의 아들은 川谷先生이니 휘는 종길(宗吉)이요 역학(易學)에 밝았다. 우리 세종조 문과에 합격하여 직제학이 되니 바로 공의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숙부인 성주이씨 념(恬)의 따님이다. 공의 생졸은 정확하지 않다.
구보에 말하기를 공은 천성이 정직하고 엄격하였으며 재행(才行)이 일찍 성숙하였다. 관직이 충청도사, 강계부사, 전라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창원부 북면 내곡은 도사공이 태어난 곳이요 마을 뒷산 병향(丙向)의 자리는 공의 묘가 있다. 숙부인 창녕변씨 장(璋)의 따님은 오른쪽에 합장하였다. 옛 묘갈(墓碣)이 있는데 정덕(正德 : 명나라 연호 1515) 십년에 세웠다.
아들은 넷인데 장남 석종(碩從)은 의성 훈도요, 차남 이종(理從)은 진사요, 삼남 순종(順從)도 진사요, 말종(末從)은 벼슬이 없다. 딸은 황자화(黃自華)에게 출가했다. 석종은 유온(有溫)을 낳으니 진사요, 유량(有良), 유공(有恭), 유검(有儉), 유적(有績) 등 아들이 있다. 이종의 子는 영당(英達), 영춘(英春)이다. 순종의 子는 안문(安文), 성경(成敬)이다. 말종의 子는 선달(善達)로 동우(同樞)요 철달(哲達)은 진사요 풍선(豊善)이다.
아아! 공이 이룩한 사행과 치적은 꼭 전할만한 것이 있을 것이나 여러번 병란에 불타서 옛 역사를 모르게 되었다. 공이 강계부사로 있을 때 경내 백성들을 무애(撫愛)하여 마치 간난 아이 같이 보살피니 비록 우부우부(愚夫愚婦)라도 다 그 덕을 칭송하여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다. 지금도 그 자취를 알 수 있다. 내곡에는 도사재가 있고 도사터가 있어 나뭇꾼들도 서로 그 곳을 가리켜 어제 일같이 전할 정도이니 이는 대개 공이 여기 살았기 때문이다. 그의 자손이 번성하지는 못해도 다 세대를 능히 이어 창성할 조짐이 보이니 또한 선조의 아름다운 공덕의 덕분이 아니겠는가
후손인 린환(麟煥)은 옛 비갈이 마멸되었음을 안타깝게 여겨 다시 세우려 하다가 준공도 채 되기 전에 젋은 나이로 죽었다. 종친들이 말하기를 이미 된 비를 그만 둘 수 없다고 하고 그 족인 재휴(在烋)를 보내 나에게 글을 청했다. 사양할 수 없어 사실에 의하여 위와 같이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