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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 죽헌 이교재 순국기념비와 묘소

천부인권 2016. 10. 27. 07:23



<2016.10.17. 열사 이교재 묘소를 알리는 표식>

 

진목교차로에서 임곡삼거리로 가다보면 임곡마을로 들어가는 임곡교차로를 만난다. 이 교차로의 우측에는 죽헌로라는 표지판과 烈士竹軒李敎載墓所(열사죽헌이교재묘소)’라 새긴 표지석을 보게 된다. 표지석 옆에는 애국지사 이교재 선생의 묘라는 안내판도 있다. 이 안내판에는 열사의 간략한 소개와 묘의 위치를 그려 두었다. 이곳에서 임곡마을 방향으로 바라보면 약350m 전방 마을 입구 우측 산자락에 오석으로 만든 비석이 보인다. 창원시 진전면 임곡리 272번지로 그곳에는 열사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과 묘소가 있다.




<이교재 열사의 묘 위치를 알려 주는 안내판>



<묘소 입구 쪽에 위치한 안내판>



<안내판 아래에 있는 표지석>


임곡마을로 들어가다 보면 우측에 열사 이교재 선생 순국 기적비를 안내하는 표지판이 있고, 그 아래에는 열사의 묘소가 시멘트길을 따라가면 있다는 작은 안내석이 있다. 자동차로 계속 들어갈 수 있지만 이곳에 차량을 두고 잠시 걸어서 묘소를 찾았다.




<이교재 열사 묘역 전경>



멀고 험한 길

상해가 세번이라면

감옥은 네번이요

기 꺾일줄이 있으랴마는

몸은 이미 마쳤구나

아! 임이로다

나라와 겨레의 임이로다.





관리가 잘 된 열사의 묘소에는 비석 2기와 묘 2기가 나란히 위치해 있다. 묘의 상석에는 열사 성주 이교재배우자인 남양 홍씨의 묘소라 적었다.





이곳에 세운 열사죽헌이교재순국기적비의 내용을 살펴보니, 열사의 관향은 성주이고, 호는 竹軒(죽헌)이며, 188779일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에서 출생했다. 어릴 때부터 남달리 의협심이 강했으며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稟性(품성)이 있었다. 나이 24세에 경술국치를 당하자 오직 救國(구국)의 일념으로 항일투쟁에 나서게 되었고, 열사가 가는 길은 험하고, 고단했다. 1919년 진전면 오서리 본가를 거점으로 향리의 동지들과 함께 獨立宣言書(독립선언서)檄文(격문)을 작성하여 도내 일원에 비밀리에 배포하며 지하운동을 펴나갔다. 그 결과 慶南北一圓(경남북일원)에서 수많은 동지들을 규합했고 뒷날 기미삼일운동에 각 지방의 선도자가 되었다. 이 일로 진주경찰서에 검거되고 재판에 회부되어 부산지방법원진주지청에서 징역 26월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뤘다. 1921년 출옥 후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금과 국내연락의 밀명을 받아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하던 중 통영군 김종원 집에서 한 모금사실이 綻露(탄로)되어 1923911일 통영경찰서에 체포되어 마산형무소에서 두 번째로 2년의 옥고를 치뤘다. 출옥 후 상해로 다시 들어가려다 신의주 국경에서 被逮(피체)되어 세 번째로 서대문 감옥에서 2년간 피감 되었다. 일제의 회유와 고문이 있었지만 의지를 꺾지 않고, 다시 臨政(임정)의 밀명을 띄고 국내로 돌아온 열사는 苦學生(고학생)들을 포섭하여 ‘칼톱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이들로 하여금 전국을 돌며 정보교환과 애국사상 전파에 주력했다. 이들이 모은 정보는 수시로 임시정부에 보고하였으며 감돔회를 끝까지 배후에서 지휘하였다. 19311120일 상해임시정부의 내무장 趙琬九(조완구)와 재무장 金九(김구)의 지령으로 경남북도상주대표로 임명되었다.

경남북도상주대표의 비밀임무는 애국지사 간의 연락과 광복운동에 필요한 지방의 비밀조직결성이고, 국내에서 자금을 조달하여 임정으로 보내는 일이다. 이러한 중책을 띄고 진주 許萬正達城(허만정달성)文大李昌寧(문대 이창녕) 成洛文(성낙문) 등을 찾아 臨政(임정)의 활동자금헌납을 慫慂(종용)하는 등 맡은바 임무를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조국광복을 위해 고달픈 활동을 이어 왔으나 日警(일경)의 집요한 감시는 열사의 활동을 탐지하게 되어 다시 마산경찰서에 被逮(피체) 되었으며 부산형무소에서 손발톱이 뽑히는 고행 속에 6년간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열사의 끝임 없는 조국광복활동은 極熱抗日鬪士(극열항일투사)로 분류해 일제관헌의 잔인한 加虐(가학)과 형언할 수 없는 酷毒(혹독)한 고문의 표적이 되었다. 독립의지를 꺾지 않은 열사는 受刑(수형) 중 고문의 여독으로 끝내 순국하니 1933년 음력 120享年(향년) 47세였다. 천인공노할 일제의 만행은 형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열사의 묘소마저 鐵條網(철조망)으로 얽었으니 어찌 통분을 금할 수 있겠는가.

194585일 마침내 광복이 되었고 임시정부 김구 주석은 1946917일 창원군 진전면 산골에 묻힌 초라한 옛 동지의 묘소를 참배하고 哀悼(애도)의 뜻을 표했으며 유족을 위로하였다. 1954년 마산일보 金亨潤(김형윤) 사장은 열사의 애국충절을 기리고자 추모회를 조직하여 지역유지의 협찬과 학생들의 성금으로 현 위치에 묘소를 옮기고 묘비를 세웠다. 19633월 정부는 건국훈장독립장을 추서하여 열사의 거룩한 넋을 위로 하였다. 이 모든 사실들은 부인 홍씨가 열사에게 내려진 임명장을 잘 간수 하여 오늘날 유일한 증거가 되게 했기에 가능했다.

 





이교재 열사의 비문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일제치하의 경찰관과 법조인들은 모두 매국노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독립을 방해하며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기에 바빴다. 그 매국노들이 모여서 지금은 새누리당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후손들이 대부분이다. 그 대표적 인물이 다까끼마사오의 여식 박근혜이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논하기 전에 독립운동가들의 처절했던 삶을 보면 우리가 무엇을 행해야 하고 어떤 것을 정리해야 하는지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 나간 기성세대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미래세대의 먹거리마저 파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