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창원시 진동면 사동리 전주이씨 영언각

천부인권 2016. 10. 22. 22:28

 

 

2016.10.17. 진동면 사동리 전주이씨 영언각 전경

 

창원시 진동면 사동리 240번지에 위치한 永言閣(영언각)은 옛 국도 2호선변인 진동면 과 진북면의 경계지점에 있다. 영언각은 조선시대 진북면 梨木里(이목리)에 살았던 효자 李國魯(이국노)의 효행을 기리는 旌閭閣(정려각)이다. 이국노는 孝寧大君(효령대군)15대손이며 1755년부터 1834년까지 농부로 생을 마감한 사람으로 자는 順直(순직), 호는 梨村(이촌), 본관은 全州(전주)이다. 그의 부친은 평소에 찰떡을 좋아하여 매년 두마지기의 논에 찰벼를 심어 부친에게 찰떡을 해드렸다. 어느 해 가뭄이 들어 논의 벼가 타들어가니 그는 밤마다 논둑에 서서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며 기도했다. 그의 기도가 하늘에 닿았음인지 홀연히 마른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이 비는 두마지기의 찰벼 논에만 흥건히 고였다고 한다.

또 부친이 잉어가 먹고 싶다고 해서 의령까지 잉어를 구하러 갔지만 구하지 못하고 허망하게 돌아오던 중 잉어 한 마리가 갑자기 이국노가 타고 있던 배위에 펄쩍 뛰어 올랐다는 등의 이적이 일어났다고 전한다. 그리고 부모 삼년상 기간 동안에 날씨와 상관없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묘소를 찾았으며, 돌아올 때 산길이 어두우면 두 마리의 범이 나타나 호위했다 전한다

경상도 유림이 그의 효행을 기렸으니, 1893(고종 30)에 나라에서 동몽교관을 내리고 정려를 세워 永言閣(영언각)’이라 했다정려각 안에는 비석은 없고, ‘孝子贈童蒙敎官朝奉大夫李國魯之閭(효자증동몽교관조봉대부이국노지려)라고 새긴 정려현판이 걸려 있다.

 

진동면 사등리 전주이씨 영언각永言閣 정려기旌閭記


永言閣旌閭記
上之臨御三十年癸巳六月 本道儒生鄭基元等 上言請近 故孝子李國魯 旌贈事允下 吏曹贈童蒙敎官 是歲十二月禮曹覆 啓命旌其閭謹 按公系出璿源 孝寧大君諱補別子也 子孫四世襲 封歷五世 有諱德祥官訓鍊副正錄原從勳 公其六世孫也 考諱世甲高年資護軍 公貧無以爲養負薪 易米織席換魚供甘旨未嘗乏父嗜黏餠歲每別種 數畝黏稻以爲供歲甲戌 旱枯公繞畝悲號俄 而天忽驟雨得大熟父嘗病思鯉膏市不得 則涕泣渡江 一隻鯉忽躍登舟歸 以供病得效及遭艱附身附棺 愼戒無悔日省墳墳距家五里餘 不以寒暑風雨廢 鄕里咨嗟咸曰 孝哉孝哉沒世 而不諼至蒙天褒 可式鄕邦休矣哉 綽楔旣具 公之三從孫都事勉宰命 余記其楣 余惟躬百役罔晝夜 匪懈與行傭之江革 體無全衣之王延果孰多 栗谷先生每念流涕者 在此公遭艱之日年已七十 在禮亦曰 衰麻在身 而已而公能致哀致 禮孺慕三年不怠 而卒免危身亦 非神明之所 扶護者歟誠能動物 其致靈感宜矣 然公之孝不由學習所性 而有者也 其符驗之著於物 特其應跡耳曷足爲加損於 公之孝哉世之稱 公者若切切於致感之一二 而不究本來資稟 則末矣抑 又聞之公少貧失學 時從塾生遊聞 古人懿行則輒 欽艶動色 其性識之明可想 噫齒角之不兼與久矣 天之畀公豐於內而嗇於 外不能讀古人書以自磨礱惜也 世之讀書業儒 而行不逮者聞 公之風亦可 以少愧矣 余於是乎重有感焉不辭 而爲之記 
旃蒙協洽之歲 南呂之月 八溪鄭載圭記

영언각정려기永言閣旌閭記
고종 30년 계사癸巳(1893) 6월에 본도本道의 유생 정기원鄭基元 등이 상소하여 근래에 와서 죽은 이국로李國魯의 정려旌閭를 청하매 증직하는 일에 윤허允許가 내리시어 이조吏曹에서 동몽교관童蒙敎官 조봉대부朝奉大夫를 증직으로 내리시고 이 해 12월에 예조禮曹에서 다시 그 마을에 정려를 명하였다.
삼가 안험按驗하건대 공의 계출系出은 선원 효령대군 이름이 보補인 분의 태종 대왕의 별자부터이다. 자손들이 4대에 걸쳐 봉함을 받았고 5대를 지나 이름 덕상德祥인 분이 훈련원부정 녹원종훈錄原從勳의 벼슬을 하였으니 공은 그의 6대손이다. 고考의 이름은 세갑世甲으로 높은 나이에 벼슬은 부호군이었다. 
공은 본래 가난하여 부모를 봉양할 수 없었기에 나무를 져다 팔아 쌀을 사고 자리를 짜서 팔아 생선을 사서 맛있는 음식을 봉야하되 일찍이 떨어짐이 없게 하였다. 어버이께서 찰떡을 즐기시니 해마다 별도로 찰벼 두어 마지기를 심어 찰떡을 해드렸는데 갑술甲戌(1814)년 여름에는 가뭄이 심하여 벼의 싹이 말랐다. 이에 공이 논을 둘러보고 슬퍼 울부짖으니 이윽고 하늘에서 갑자기 단비를 내려 풍년이 들었고 어버이께서 일찍이 병이 들어 잉어기름을 먹고 싶어하자 급하게 의령시장에 가서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나루에 이르러 눈물을 흘리며 배에 올라 강을 건너는데 잉어 한 마리가 갑자기 배로 뛰어 들어왔다. 그것을 가지고 돌아와 잉어기름을 내어 올리니 병환이 즉시 쾌차하였다. 
어버이 상을 당하여서는 몸을 의지하고 관을 의지하여 믿고 경계함이 조금도 후회함이 없게 하며 날마다 묘소를 살피었다. 묘소의 거리가 집에서 5리가 넘었는데도 추위와 더위와 바람 비를 빌미로 폐하지 아니하였으니 마을 사람들이 탄복하며 모두 말하기를 「효도롭고 효도롭도다.」하였다. 세상에 묻혀있어도 잊히지 않았으니 나라에서 포양함을 힘입음에 이르러서는 향리와 나라에서 본받을만 했다. 아름답도다. 작설綽楔이 이미 갖추어진 것은 공의 종현손從玄孫 도사都事 면재勉宰가 나에게 그 문설주에 달 정려기를 지어달라고 명하였던 터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공이 몸소 백가지 일을 하여 낮과 밤을 잊고 게으르지 아니하였으니 돌아다니며 품팔던 강혁江革과 몸에 온전한 옷을 입음이 없었던 왕연王延과 더불어 누가 이 일을 많이 했겠는가. 율곡선생栗谷先生이 매양 생각하고 눈물 흘렸던 것이 이에 있었다. 
공이 친상을 당했을 때에는 나이가 이미 칠십이었다. 상례喪禮에 있어서도 또한 최마복衰麻服을 몸에 입었을 따름인데 공이 애달아하고 예의를 차린 것은 젖먹던 시절을 생각하여 3년상을 개을리 아니하고 마침내 위태한 몸을 면하였으니 이 또한 신명이 붙들어 보호하여 준 바가 아니겠는가. 그 정성에는 동물이라 할지라도 그 신령함에 이르러는 감동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다. 그러나 공의 효도는 배우고 익힌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천성으로부터 그러했던 것이다. 그 징험함이 사물에 나타나 특별히 그 자취를 응한 것이다. 어찌 공의 효도에서 더하고 덜할 수 있으리오. 세상에서 공을 일컫는 사람들은 절실하게 한두번의 감동한 것에 그치고 그 본질을 생각하지 아니하였으니 벼슬을 받는 사실은 말단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아! 또 들으니 공은 젋어서 가난하여 학문을 하지 못했으나 때때로 서당에 나가 서생들을 쫓아 놀다가 옛 사람들의 아름다운 행실을 들으면 문득 부러워하여 낯빛을 움직이니 그 성품과 밝은 식견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아! 치각齒角을 더불어 하지 못한지가 오래되었다. 하늘이 공에게 내린 성품으로 공은 안으로 풍부하고 밖으로 거두어 들였으니 옛 사람의 글을 읽지 아니하여도 스스로 연마할 수 있었다. 애석하도다. 세상에 글을 읽고 선비의 업을 삼되 효행이 미치지 못하는 자는 공의 풍문을 듣고 조금은 부끄러울 것이다. 내 이에 거듭 감동한이 있어 사양하지 아니하고 그를 위해 기록하도다. 
을미년(고종 32; 1895) 8월에 팔계 정재규鄭載圭가 쓰다.

 

 

 


鎭邑小而俗尨孔子曰 十室之邑 必有忠信聖人之言 與天壤俱弊 今於季葉澆漓雖雄州 鉅郡鮮見 其儷之孝子出于鎭誰乎 孝寧大君之裔也 吁異於凡族矣 按其家狀孝子諱國魯 事親有根天之誠 家素寠躬稼漁 而晝則市薪販米夜 則織席買 漁甘毳常不匱 雖未暇受學 而時就群從書塾聞子路及董生之行歆慕 而力行者如是尢所卓異者 其考護軍公嗜粘餠 故二斗田課歲種黏稻 而甲戌夏旱全坪盡枯徹夜號泣于 田頭甘霈獨降于 其田野老歎曰 孝子雨 護軍公病思鯉膏 適宜寧市未販 而至鼎巖津登舟 而泣隻鯉忍躍入舟中 舟人驚曰孝子魚 一則熊袞 一則王祥及至 居憂省塋兩虎翼行至 今鎭入之耕者指田 而稱公之兩漁者臨江 而設公之鯉 樵者入山 而談公之虎 其格天感人噫其至矣 孝理之朝軫章甫之龥 特贈童蒙敎官 且旌其閭綽楔之始役也 公之從玄孫 都事勉宰來請六偉文 今訖功也 又走書請記 前後皆辭不文 而不獲抗顔奉副云
旃蒙協洽林鍾月中旬 越翌趙性家記

 


진해읍은 작으나 그 풍속은 크다.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십실十室의 고을에도 반드시 충신이 있다.」고 하였으니 성인의 말씀은 천지와 더불어 함께 폐할 것이다. 이제 말세에 인정이 각박해져 비록 큰 골에서라도 보기 드물어졌다. 그에 짝할만한 효자가 진해에서 낳았으니 그 누구인고? 효령대군의 후손이다. 한심스럽도다. 여러 일가들과는 다른지라 그 가장家長을 안험按驗하건대 효자의 이름은 국로國魯이다. 어버이를 섬김에 하늘에 근원한 정성이 있어 집이 본래 가난하여 몸소 밭갈고 고기잡으며 낮에는 나무를 져다 팔아 쌀을 사고 밤에는 자리를 짜서 팔아 생선을 사다가 맛있고 연한 것을 항상 부족하지 않게 하였다.
비록 글 배우는 이가 없으나 때때로 여러 종제들과 서당에 나가 자로子路와 동생董生의 효행을 듣고 부러워하고 흠모하여 힘써 행한 것이 이와 같았다. 더욱 탁월하게 다른 바는 그의 아버지 호군공護軍公이 찰떡을 즐기시어 두어 마지기 논에 해마다 찰벼를 심어 찰떡을 해 드렸는데 갑술년(1814) 여름에는 가뭄이 너무 심하여 창평의 들이 모두 말라 죽게 되었다. 논에 나가 밤새도록 하늘을 우러러 부르짖어 울더니 이윽고 단비가 그 논에만 흡족하게 내리어 들노인들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효자의 비」라 하였다. 호군공이 병드시어 잉어기름을 드시고 싶어하자 즉시 의령 장터에 가서 구하되 얻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정암나루에 이르러 배에 올라 눈물을 흘리며 울었더니 큰 잉어 한 마리가 갑자기 배로 뛰어 들어왔다. 사공이 놀라며 「효자의 고기」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일이 한 번은 웅곤熊袞에게서 또 한 번은 왕상王祥에게서 들었을 뿐이다. 잉어를 가지고 돌아와 즉시 기름을 내어 올리니 병환이 쾌차하여 졌다.
친상을 당하여 삼년상에 날마다 묘소를 살피며 곡을 하다가 날이 저물면 산길에 반드시 두 범이 나타나 행차를 도와 주었다. 지금까지도 진해 사람들 가운데 밭가는 자는 밭을 가리키며 공의 비를 말하고 고기잡는 자는 강물에 들어가면 공의 잉어를 말하며 나무하는 자가 산에 들어가면 공의 범을 말하니 그 하늘에 이르러서도 사람을 감동시킨 것이다.
아! 그 지극함이여 효도로 다스리는 조정에 경상도 유림들의 부르짖음이 움직이어 나라에서 특별히 동몽교관童蒙敎官 조봉대부의 벼슬을 증직으로 내리시고 또 그 정려를 명하였다. 작설에 시작하는 일이 모두 공의 종현손 도사都事 면재勉宰가 와서 육위문六偉文을 청한대 이제 조판을 마치었고 또 급히 와서 지어달라고 하는 글은 정려기를 청한 것이니 앞뒤로 모두 글을 못한다고 사양하였으나 얻지 못하여 낯빛을 바로하고 받들어 지었다고 이르리로다.
을미년(고종 32 : 1895) 6월 중순에 월익 조성가가 쓴다.

 

 

 

정려각 옆에는 2010년 봄에 마산시에서 세운 비석이 있는데 영언각의 유래를 기록해 두었다.

 

출처 및 참고

창원군지

영언각 비문

티지털창원문화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