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창원시 동읍 용강리 오이원효자비와 정려각

천부인권 2016. 10. 31. 18:00

2016.10.26.  용강리 오이원효자비와 정려각 전경

용강고개에서 구룡산(九龍山;432.5m) 방향을 보면 구룡산[옛 태을산(太乙山)] 자락 아래 고속도로가 지나가고 그 아래쪽에 옹기종기 용강리 양달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양달마을 입구인 의창구 동읍 용강리 482번지에는 吳以源孝子碑旌閭閣(오이원효자비와 정려각)’이 있다. 이곳은 해발 60m이며 「위도 35°16′18″N 경도 128°38′07″E」이다.

처음 오씨효자비는 화강암으로 된 것이었으나 그 옆에 문중에서 새로 세운 비석이 있으며 그 뒤로 정려각이 있다. 비의 정면에는 孝子贈童蒙敎官吳以源之閭 上之三十二年十二月命旌(효자증동몽교관오이원지려 상지삼십이년십이월명려)’로 음각되어 있다.

비석의 내용은 효자 오이원의 효행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부친 오태성이 나무를 하러갔다가 범에게 물려 상처를 입었다. 온갖 양으로 치료를 했지만 부친의 상처에 호전의 기미는 없고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에 오이원은 부친을 해친 범을 찾아 구룡산의 호랑이 굴로 들어가 범의 배를 갈라 죽이고 그 새끼까지 죽여 버렸다 한다. 비의 높이는 168cm, 너비는 46cm, 비대의 높이는 7cm, 너비는 77cm이다.

 

2016.10.26 오이원의 옛 비

오이원의 효행과 이적행위에 대해 창원향교지는 이렇게 적었다. 오이원의 관향은 해주이고, 자는 甘發(감발), 호는 以秀(이수)이다. 국조유신 충정공 영의정 오윤겸의 8세손이며, 병조판서 서파공 오도의 5세손이다. 7살 때 어머니를 잃고 不食肉(불식육)하니 외조모께서 안타까워 육즙을 먹이니 갑자기 피를 토하여 보는 사람들이 경탄하였다. 부친이 산에 올라 범에게 물려 실신 했다는 소식을 듣고, 낫을 들고 범에게 달려들어 범의 배를 갈라 죽이고 부친을 업고 달려와 정성을 다하여 치료하여 회생케 했다. 향리인들이 감탄하여 부사에게 알리고, 부사는 예조에 알려 復戶(복호)를 받고, 부친은 80년 형수하다 천수로 별세했다. 장례 후 여묘살이를 조석으로 통곡하니 눈물 흘린 곳에 피 꽃이 피었다. 밤마다 여묘에 호랑이가 찾아와서 공을 지켜주니 효자 범이라 했다. 작고 후 향도 유림이 啓聞太山王辛卯(계문 태산왕 신묘) 1891년에 童蒙敎官朝奉大夫(동몽교관 조봉대부)에 증직하여 정려를 받았다.

 

2016.10.26 오이원의 옛 비 뒷면

디지털창원문화대전에는 아래처럼 기록하고 있다.

오씨 성은 중국 오나라의 왕부차에서 비롯하여 그의 손자 루양이 오씨 성을 하사 받고 오나라의 왕이 되면서부터이다. 우리나라의 오씨 시조는 신라 때 오응(吳應)이다. 초나라 제상 오기의 45세손인 오첨이, 500(신라 지증왕 1)에 중국에서 신라로 건너와 김종지의 딸과 결혼하여 함양에서 21년을 살다가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면서 둘째 아들 오응이 어려서 데려가지 못하고 함양에 두고 가면서부터이다. 해주 오씨의 시조는 오첨의 24세손으로 중서 문하성의 참지정사를 지낸 해주군의 오현보인데, 창원의 해주 오씨는 고려 검교 군기감(檢校軍器監) 오인유(吳仁裕)를 시조로 한다. 해주 오씨로는 조선 시대 충정공 오윤겸(吳允謙), 홍문관 대제학 서판(西坡) 오도일(吳道一) 등이 있다.

해주 오씨의 창원 입향조는 병조참판을 지낸 오수복(吳遂福)이다. 처음으로 창원시 의창구 동읍 용강으로 이거했으나 경위는 불분명하다. 다만 그의 증손자와 현손에 대한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증손자 오태성(吳泰聖)이 효성과 행실로 이름이 높아 나라에서 통정대부 공조참의(通政大夫工曹參議)에 추증하였고, 그 아들 오이원(吳以源) 역시 효자로 이름이 나서 조봉대부 동몽교관(朝奉大夫童蒙敎官)에 추증되었다. 현재 의창구 동읍 용강리 앞에는 조인승(曺寅承)이 지은 오효자정려기(吳孝子旌閭記)와 홍남주(洪南周)가 지은 오효자정려기(吳孝子旌閭記)가 있다. 이들 기문에는 효자 오이원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2016.10.26 효자 오이원을 기리고자  중건한 비

贈童蒙敎官吳孝子㫌閭記
父子 天性之親而人倫之至也 人之行 莫大於孝 故吾夫子著孝經 自天子諸侯 至於鄕大夫士庶人 皆有品節 使天下萬世 知父子之道 而各盡其職 夫孝 天經地義之所固有 而民生職分之所當爲者也 夫子之門 孝莫如曾子 而聖人不以孝稱之 但曰 事親 若曾子者可也 至於舜閔而後 必曰孝 何也 非非常之變 無以知其孝 非非常之行 亦無以知其人 後之如氷鯉雪筍 刲股斫指等事 皆是已 吾鄕 有吳孝子以原 國朝儒臣領議政諡忠貞諱允謙七世孫 兵曹判書號西坡諱道一之五世孫也 自孩提知愛其親 七歲遭母喪 哀毁如成人 朞而不食肉 其外祖母憐其孤弱 和肉汁潛餽之 小頃出血如流 數日不止 人皆驚歎 一日 其父登山採薪 有虎獲囓 同樵者皆逃匿 不敢近 孝子聞之 手短鎌大呼而直刳其腹 虎亦俯首就戮 因入其穴 獲二子殪之 負父而歸 療治得甦 里人異之 聞于府使 府使聞于春曹 立案復其戶 其父壽至八十 以天年終于家 及其葬也 廬於墓側 晨昏號哭 涕流處生血花 夜則虎來守之 時人目之爲孝子虎 廬傍有井極冽 孝子每齋沐 有樵夫頑者 糞於其上 忽遘疾幾殊 其家人摧謝求生 孝子衰絰禱于井 其人卽蘇 嗚呼 人之所畏 莫甚於虎 而以七歲之童 容易刺之 是豈人力也哉 推此以去 則白刃可蹈也 湯鑊可赴也 盖天彛之性 發於良知 知有其親 不知有其身 則揮鎌搏虎之際 何可論事之難易 勢之强弱哉 但一片赤心 迫於至誠惻怛 爲此千萬人所不爲 此眞孝子也 虎亦以物中之孝獸 豈不知孝子而爲相害哉 一則受刃而斃 一則防廬而衛 何其異也 天地神明 亦有所冥感 而扶護之也 太上王辛卯 贈童蒙敎官 有表宅之 命 國家之彰善至矣 其曾孫寅泳 持鄕道儒疏狀 及朴晩醒致馥所撰遺事示余 請爲之記 余亦嘉其孝而遂書之 爲百世人子之勸也
歲丁巳二月壬子商山金相頊撰

 

증동몽교관오효자정려기(贈童蒙敎官吳孝子㫌閭記)
아비와 자식은 하늘로부터 타고난 천성으로 절친함이 있고 인륜의 지극한 관계이다. 사람의 행실 중에서 효(孝)보다 큰 것은 없다. 그러므로 공자께서는 효경(孝經)을 저술하시었다. 위로는 천자(天子)와 제후(諸侯)로부터 아래로는 향리의 대부와 선비,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기품에 맞는 예절이 있게하여 천하의 백성들이 만세토록 부자의 도를 알게 하고 각각 그 직분을 다하게 하였다. 무릇 효는 천지의 이치에서 원래 존재하는 것이고 민생들의 직분으로 마땅히 해야 할 바이다. 공부자(孔夫子)의 문하에 효로서 증자(曾子)만한 이가 없으나 성인께서 그것을 효로써 일컫지 않고 단지 부모를 섬긴다고 하셨지만 증자와 같다면 효라고 이를 만 할 것이다. 효성이 지극하였던 순(舜)임금이나 민자건(閔子蹇)¹⁾을 일컬어 반드시 효라고 한 것은 무엇인가. 일상적이지 않는 비상한 변고가 아니면 그 효를 알지 못하고 비상한 행실이 아니면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후대에 얼음이 언 강에서 잉어를 구한다든지, 눈밭에서 죽순을 구한다든지, 허벅지 살을 베어 먹여 살렸다든지,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회생시켰다든지 하는 등의 이야기들이 모두 이러한 것이다. 우리 고을에는 효자 오이원(吳以原)이 있다. 그는 조선의 명신(名臣)이자 유학자로 영의정(領議政)에 오르고 시호가 충정(忠貞)인, 휘(諱) 윤겸(允謙)²⁾의 칠세손이며, 병조판서(兵曹判書)로 호(號)는 서파(西坡), 휘(諱) 도일(道一)³⁾의 오세손이다. 어려서부터 그 부모를 사랑할 줄 알아 일곱 살에 모친상을 당하였을 때 슬퍼하고 낙담하는 것이 어른과 같았으며 일주기 동안 육식을 하지 않으니 그 외조모께서 어리고 유약한 것을 불쌍히 여겨 몰래 고기국물을 섞어 먹였다. 조금 뒤 피를 쏟아내며 몇 일 동안 그치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탄복하였다. 하루는 그의 아버지가 산에 올라가 뗄나무를 할 때 호랑이에게 잡혀 물리게 되었다. 같이 있던 나무꾼들은 모두 도망하여 숨어서 감히 가까이 가지도 못하였는데 효자가 그것을 듣고 손에 짧은 낫을 들고 크게 부르짖으며 곧바로 나아가 그 배를 갈랐다. 호랑이도 또한 머리를 숙이고 죽임을 당하였다. 이에 호랑이 굴로 들어가 새끼 두 마리를 죽이고는 아비를 업고 돌아와 치료하니 소생하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부사에게 알리니 부사가 다시 춘조(春曹)⁴⁾에 알렸다. 예조에서는 안을 내어 그의 호세를 덜어주었다. 그의 아버지가 나이 팔십이 되어 천수를 다하고 집에서 별세하여 장사를 치르게 되었다. 묘 곁에 움막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통곡하니 눈물이 떨이진 곳마다 핏빛 꽃이 피는 것 같았다. 밤이면 호랑이가 와서 그를 지켜주니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효자호랑이라고 하였다. 움막 곁에 우물이 있었는데 매우 차가웠다. 효자는 매일 이곳에서 목욕재계하였는데 한 어리석은 나무꾼이 있어 그 위에서 변을 보게 되었다. 문득 병이 들어 아주 이상하게 되었다. 그 집안사람들이 놀라서 백배 사죄하고 살 방도를 구하니 효자가 상복을 주었다. 그것을 들고 샘에 기도하니 비로소 그 사람이 살아나게 되었다. 아아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으로 호랑이보다 심함이 없는데 일곱 살의 아이가 쉽게 호랑이를 찌른다는 것이 어찌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이것을 미루어 나아가면 하얗게 잘 드는 칼날도 밟을 것이며 끓는 솥으로 들어 갈수도 있을 것이다. 대개 하늘의 떳떳한 본성은 타고난 재능에서 발현되는 것이니 그 부모가 있음은 알면서도 자신의 몸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낫을 휘두르며 호랑이를 찌를 때에 어찌 일의 쉽고 어려움이나 힘의 강함과 약함을 논할 겨를이 있었겠는가. 다만 일편단심의 지극한 정성과 슬픔에 맞닿아 이처럼 천만 사람도 할 수 없는 일을 하였으니 이가 진정한 효자이다. 호랑이도 또한 동물 중의 효성스러운 짐승이다. 어찌 효자를 알고 해치지 않았던가. 한쪽은 낫에 찔려 죽임을 당하고 한쪽은 시묘살이 움막을 지키며 효자를 보호하니 어찌 기이하지 않으리. 천지신명이 또한 음으로 감동함이 있어 그렇게 보호한 것이리라. 태상왕(太上王) 신묘(辛卯)년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추증하고 그 집으로 정려를 표하였다. 왕께서 선을 표창함이 지극하심이다. 그의 증손(曾孫) 인영(寅泳)이 고을 유생들이 올린 소장(疏狀)과 만성(晩醒) 박치복(朴致馥)이 찬(撰)한 유사(遺事)를 가지고 와서 내게 보이며 기문을 청하였다. 내가 그 효성을 아름답게 여겨 드디어 글을 써니 백세토록 아들된 사람들을 권면하려 함이다.
정사(丁巳)년 이월(二月) 임자(壬子)에 상상(商山) 김상욱(金相頊) 씀.

 

【주석】
민자건(閔子蹇)¹⁾ : 이름은 손(損), 자(字)는 자건(子蹇).공자보다 15세 아래다. 덕행에 있어 뛰어난 안연과 나란히 칭송되었다.  특히 그는 지극한 효성심으로 유명하여 중국 '24孝' 중 하나로 꼽히며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오윤겸(吳允謙 : 1559~1636)²⁾ :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자는 여익(汝益), 호는 추탄(楸灘) 토당(土塘)이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1582년(선조 15)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충청도 ·전라도 체찰사 정철(鄭澈)의 종사관을 지냈다. 그 뒤 평강(平康)현감으로서 1597년 대과에 급제, 이조좌랑 ·부교리를 지내고 성혼이 모함을 받자 사직하였다가 후에 복직하였다. 선현들의 문묘종사 반대를 탄핵하다가 강원도관찰사로 좌천되었으며 1613년(광해군 5) 계축화옥가 일어나자 광주(廣州)목사를 자청하였다. 1617년 일본에 가서 임진왜란 때 잡혀간 150여 명의 포로를 데려왔다. 그 뒤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여 탄핵을 받았고 1622년 중추부동지사로서 진하사(進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노서(老西)의 영수가 되어 대사헌 ·이조판서를 지냈고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공주(公州)에 호종하고 돌아와 돈령부지사 ·형조와 예조의 판서를 거쳐 1626년 우의정에 오르고 이듬해 정묘호란 때에는 왕세자를 배종, 강화(江華)에 피난, 돌아와 좌의정을 거쳐 1628년 영의정에 올랐다. 광주(廣州)의 귀암(龜巖)서원, 평강의 산앙재영당(山仰齋影堂)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추탄집》을 비롯하여 《동사상일록》 《해사조천일록(海槎朝天日錄)》 등이 있다.(네이버백과사전 참조)
오도일 (吳道一 : 1645~1703)³⁾ :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자는 관지(貫之), 호는 서파(西坡)이다.  1673년(현종 14)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1680년(숙종 6) 지평 ·부수찬 등을 지냈고 1687년 승지가 되어 자파(自派)를 옹호하다가 파직되었다. 7년 뒤에 개성부(開城府)유수로 복관된 뒤 주청부사(奏請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대사간 ·부제학 ·강원도관찰사에 이어 다시 부제학을 거쳐 1696년 도승지 ·대사헌을 지냈다. 이듬해 예문관제학 ·사직(司直) ·이조참판, 1698년 공조참판에서 양양(襄陽)부사로 좌천, 삭출(削黜)되었다가, 1700년 대제학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고 병조판서에 올랐다. 1702년 민언량(閔彦良)의 옥사에 연루, 장성(長城)에 유배되었다. 애주가로 문장에 뛰어났다. 죽은 뒤 복관(復官)되고 울산(蔚山)의 고산(孤山)서원에 배향되었다. 문집 《서파집》이 있다.(네이버백과사전참조)
춘조(春曹)⁴⁾ : 예조(禮曹)이다. 조선 시대에 육조 중 하나이다. 예악, 제사, 연향, 조빙, 학교, 과거 따위에 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태조 원년(1392)에 두었고 고종 31년(1894)에 폐하였다. 남궁(南宮)·춘조(春曹)라고도 한다.(네이버백과사전참조)

 

2016.10.26 효자 오이원 정려 중건기
정려각 모습

효자가 일곱 살 때 아버지를 따라서 산에 올라 나물을 따고 땔나무를 하는데 갑자기 큰 호랑이가 앞에 나타나 물어뜯었다. 아버지가 죽게 되었을 때 효자가 하늘을 향해 부르짖으며 낫을 휘둘러 호랑이를 베고 배를 갈라 아버지를 들쳐 업고 돌아와 살아나게 되었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특별히 군역(軍役)을 면하고 호세(戶稅)를 덜어주었다. 그 후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시묘 살이를 할 때 호랑이가 와서 삼 년 동안 호위하였다.” 이러한 내용으로 하여 성상(聖上) 28년 신묘(辛卯)에 특별히 창원의 효자 오이원에게 동교(童敎)의 직책을 내리셨다. 2년이 지나서 계사(癸巳)에 또한 정려(旌閭)를 명하였으니 대개 강상(綱常)을 지탱하고 풍교를 이루는 성대한 일이라 할 것이다.”라고 하여 의미를 강조하였다.

 

 

려 현판 및 오효자전

효자 오이원에 대한 기록은 거의 같은 내용으로 보이지만 전하는 내용마다 조금씩 다른 면도 있다. 그리고 효자와 호랑이 이야기는 거의 모든 효자이야기에 같은 내용으로 전해온다

 

吳孝子傳 後贈童蒙敎官旌閭

合浦故學生吳公以源首陽著族也小名甘發父聖
大流寓孤貧業耒耟公生七歲母沒朞而不肉外王 母哀其弱而瘠也潛以肉汁飼之小頃血出不止人 皆知爲天孝一日其父登山採薪有虎搏噬耽耽怒 虣觀者辟易四逬甘發聞之手短鎌大號而前虎讋 不動甘發直刳其腹虎遂斃探其穴殪二子負父而 歸療治得蘇府使嘉之聞于春曹立案復其戶其父 享期頤以天年終葬廬墓三年晨昏號哭廬傍有井 極甘冽每沐浴於此有樵夫頑蠢者放穢其上忽遇 神祟幾殊藥不效其人摧謝懇乞公著縗衣禱于井 卽蘇至今鄕里人傳爲稗談
外史氏曰 至誠與天通天且不違 而況於鬼神乎方 公之揮鎌 而進也 皇天臨在上鬼神列在傍虎雖猛 其敢弄其爪牙肆其咆▼(口+勃)與天與鬼神相抗哉且虎 孝獸也其忍賊孝子之親而與孝子爲仇敵哉此所 以俯首而就刳也不然以六尺之稚操三寸之刃能 斃攫人之虎吾不信也童年扼虎千古惟楊香一人 而公之蹟尤偉焉惜乎生晩左海能不朽人世無任 其責者旣生異人竟泯其名此天意也耶此天意也 耶
崇禎紀元後五庚寅仲春上澣
通仕郎前行義禁府都事 凝川 朴致馥 

 

 

吳孝子旌閭記
聖上二十八年辛卯 特贈昌原故孝子吳以源童敎之職 粤二年癸巳 又命旌其閭 盖扶倫綱敍風敎之盛事也 孝哉斯人 其實行異跡之聳人耳目者 考之史乘 鮮見其儔 纔七歲童穉時 隨父而登山採樵 見猛獸欲害其父 號泣呼天 揮鎌直前 剔項刳腹 立卽判之 遂救父而舁還 竟得回生 以終考命於多年之後 若其平日之愉婉承順 菽水溫淸 宜猶屬常行之微節 事聞于朝 至蒙復其戶蠲其役之典 及其父歿 哀毁踰度 廬墓三霜虎來守之 噫 苟非誠孝之格天 似此眈視之物 其何以就斃於髫兒之手 衛護於棘人之側乎 皆是陰騭之所由來者明矣 甚庸嘉歎 盖聞君子有孝子 孝子生君子 且求忠臣 必於孝子之門 宜其子孫 有君子也哉 忠臣也哉 於是乎荀龍賈虎 復觀今日 而南徼之人 其將慕效 亦無不知親其上 死其長矣 豈不盛乎 余適莅此邑 綽楔際降 見其蹟而壯之 略敍其實 以爲永世不朽之資云 靑駒孟夏知府事原任夏官侍郞金吾同知親軍副督訓練院兼務太僕驂乘 經筵特進官豊山洪南周書

 

오효자정려기(吳孝子旌閭記)
성상(聖上) 이십팔년 신묘(辛卯1832)년에 특별히 창원의 효자 오이원(吳以源)¹⁾에게 동교(童敎)의 직책을 내리셨다. 이 년이 지나서 계사(癸巳)에 또한 정려(旌閭)를 명하였으니 대개 강상(綱常)을 지탱하고 풍교를 이루는 성대한 일이라 할 것이다. 효자로다 이 사람이여! 그의 행실과 이적(異跡)은 사람들의 이목에 뚜렷이 드러나도다. 역사서를 살펴보아도 그에 짝할 만한 효성은 드물다. 겨우 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아비를 따라 산에 나무를 하러가서 맹수가 그의 아비를 해치려는 것을 보고 하늘을 보고 울부짖으며 낫을 휘둘러 곧장 앞으로 달려가 그 목을 배고 배를 곧바로 갈라 단판 지어 드디어 그 아비를 구하여 업고 돌아와서 끝내 회생시켰다. 몇 년이 지난 뒤 그의 아비가 임종하자 평일에 유순히 명을 받드는 것처럼 소박한 음식이나마 마련하여 상식(上食)을 올리며 더운 것과 시원한 것을 가리니 평상시에 어버이를 대하는 정성과 같았다. 그 일이 조정에 알려져 그 집의 호세(戶稅)를 덜어내고 군역을 면하게 하는 은전(恩典)을 입게 되었다. 그의 아비가 세상을 떠난 뒤에 슬퍼하는 것이 몸을 상할 정도였으며 삼년의 시묘살이를 하는 동안 호랑이가 와서 그를 지켜주었다. 아아 진실로 정성을 다한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킨 것이 아니라면 이처럼 호시탐탐 사람을 해치려고 하는 동물이 어찌 더벅머리 어린아이의 손에 죽임을 당하며 또한 상주의 곁에서 그를 보호하겠는가. 이것은 오직 하늘이 그 음덕을 내려서 그렇게 된 것이 분명하니 아름답고도 감탄할 만한 일이다. 대개 듣기에 군자 중에 효자가 있고 효자가 군자를 낳는다고 하며 또한 충신을 구하려면 반드시 효자의 가문에서 구하니 마땅히 효자가 군자가 됨이며 충신이 됨이로다. 이에 순룡가호(荀龍賈虎)²⁾의 일을 오늘에 다시 보게 되니 남방의 사람들이 장차 그 일을 본받아 그 윗대 조상을 절친히 하는 일을 모르는 이가 없으니 죽어서도 그것이 길이 이어지니 어찌 성대하지 않은가. 내가 마침 이 고을에 임명되어 정려문 곁을 지나서 내려오다가 그 행적이 성대한 것을 보고 대략 그 사실을 기록한 것은 영원세세토록 잊혀지지 않는 바탕으로 삼으려 함이다.
청구(靑駒)³⁾ 맹하(孟夏) 4월 지부사원임하관시랑(知府事原任夏官侍郞) 금오동지친군부독훈련원(金吾同知親軍副督訓練院) 겸(兼) 무태복참승경연특진관(務太僕驂乘經筵特進官) 풍산(豊山) 홍남주(洪南周)⁴⁾ 서(書)

 

【주석】
오이원(吳以源)¹⁾ : 오이원에 관한 기록은 효자각의 기록을 참고로 재구하였다. 창원시 동읍 용강리에 있는 효자각은 조선말기의 효자 오이원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이다. 현판에는 "孝子贈童蒙敎官朝奉大夫吳以源之閣 上之三十二年十二月命旌"이라 새겨져 있다. 오이원의 어릴 때 이름은 감발이며 동읍 용강리에서 태성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곱 살 이었을 때 그의 부친이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범에 물려서 큰 상처를 입었다. 이원은 즉시 낫을 들고 뒷산으로 가서 새끼 두 마리도 마저 죽였다. 그뒤 부친이 세상을 떠나니 3년간 묘를 지키며 아침저녁으로 호곡하니 범이 옆에 와서 지켜 주었다 한다. 효자각 앞에는 효자각 중수비와 오재규시혜불망비가 있다.
순룡가호(荀龍賈虎)²⁾ : 荀氏八龍(순씨팔용)과 가씨삼호(賈氏三虎)의 줄인 말, 이름난 형제가 많음을 이름. 순씨팔용은 한(漢) 나라 순숙(荀淑)의 아들 팔 형제가 모두 훌륭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순씨 팔룡(荀氏八龍)’이라 하였다.  또한 가씨삼호는 후한의 賈彪(가표) 삼형제를 이르니, 「後漢(후한) 賈彪傳(가표전)」에 보면 彪(표) 형제 삼인은 아울러 높은 이름이 있으되, 彪(표)가 가장 우수한지라 그러므로 천하에서 칭하기를 賈氏(가씨) 삼형제 중에 偉節(위절:彪(표)의 字(자))이 가장 세차다 하였다.
청구(靑駒)³⁾ : 청구(靑駒)는 원래 청구(靑丘)로 우리나라를 부르는 다른 이름이나 구(丘)가 공자의 이름이기 때문에 구(駒)로 표기한 것이다.
홍남주(洪南周)⁴⁾ : 무신으로 서울 사람이다. 1869년 회령부사(會寧府使)가 되어 빈민구제에 힘썼다. 고종7(1870) 경상좌도수군절도사. 1871년 경상좌도병마절도사, 1886 동지훈련원사, 한성부우윤, 1887년 병조참판, 1891년 갑산부사, 1894년 창원부사, 1895년(고종 32년) 삼도수군통제사(統制使) 등을 지냈다. 『창원부읍지』에 의하면 홍남주는 가의대부로 계사(1893)년 10월에 청안현감으로 있다가 부임하여 갑오(1894)년 9월에 통제사로 옮겨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출처 및 참고

2005 창원시문화유적분포지도-창원대학교 박물관

창원향교지

디지털창원문화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