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창원시 동읍 용강리 김소남 여사 창선비

천부인권 2016. 11. 2. 07:56



<2016.10.26. 동읍 용암리 김소남여사 창선비>

 

의창구 동읍 용강리 160-2번지는 현재 감나무 농장으로 되어 있으나 길에서 보면 烈女金寧金小南女史彰善碑(열녀김녕김소남여사창선비)’가 서있는 것이 보인다. 이곳은 용암마을회관과 40m에 위치하고, 회관 앞에는 관리번호 12-7-2호로 지정된 창원시 보호수인 용강리 팽나무가 위치한 곳이다. 또한 인접 하여 나주임씨 3대효자비가 세워져 있다.





김소남 여사 창선비는 197610월에 세운 것으로 曉齋 黃基完(효재 황기완)이 글을 썼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180cm, 비신 높이 128cm, 너비 45cm이며 가첨석과 비대를 갖춘 형식이다. 비석 뒷면에 새긴 내용은 대략 아래와 같다.

일찍이 김소남 여사의 열녀행적을 들은바 있었는데 어느 날 方致順 女史(방치순 여사)가 찾아와 孔夫子聖蹟圖五倫行實重刑所(공부자성적도오륜행실중형소)’에서 발급한 문서를 가져와 비문을 요청했다. 김소남 여사는 김녕김씨 基斗公(기두공)의 장녀로서 영산신씨 支順公(지순공)子婦(자부)이며 龍善(용선)의 처이다. 17세에 신용선 결혼하자마자 남편이 중풍에 걸려 눕고 말았는데 온갖 약을 써도 소용이 없을 만큼 병이 매우 위중하였다. 19세 되던 해 자신의 허벅지 살을 떼어 내 구워 남편에게 먹였다. 또 허리에 남아 있던 종기에서 고름이 흘러 나왔을 때도 더럽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종기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어 남편의 고통을 줄여 주었다. 김소남의 지극한 정성으로 남편의 병은 차도를 보여 완치되었지만 이후 다시 염질에 걸려 9년 만에 죽고 말았다.

그 후 김소남은 눈이 멀고 귀가 먹고, 망령까지 난 시어머니의 모진 구박에도 아랑곳없이 성심껏 섬기며, 오직 후사를 이을 자식이 없음을 걱정할 뿐이었다. 노년에는 조카와 특히 이질들의 훈육에 전념하였다.





김소남은 자신의 소생을 남기지 못한 채 197075세의 나이로 죽은 뒤 화장되었는데,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김소남은 평소 화장을 원하지 않아 화장장으로 향하는 차의 타이어가 5번이나 구멍이 났다고 한다.

 




출처 및 참조

디지털창원문화대전

김소남 여사 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