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창원시 용원동 유주각과 부인당비

천부인권 2016. 12. 5. 05:58

 

 

 

<2016.11.30. 허황옥의 이동로를 알려주는 유주비각>

 

용원동 산 197번지에 위치한 維舟碑閣(유주비각)은 경상남도 기념물 제89호로 지정이 되었다. 유주비각은 융희 2(1908) 11월에 김해허씨 문중에서 정면 1,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목조와가로 건설했다. 비각 안의 維舟碑(유주비)는 높이 175cm, 76.5cm, 두께 35cm이다. 정면에는 大駕洛國太祖王妃普州太后許氏維舟之地(대가락국태조왕비보주태후허씨유주지지)’라 새겼다.

 

 

 

 

<2014.1.21 망산도 모습>

 

유주비각을 이곳에 세운 이유는 가락국 수로왕이 도읍을 정한지 7년만에 신하들이 왕비를 맞이할 것을 말하자 내가 여기에 온 것 같이 왕비 또한 하늘이 주실 것이라며 진해구 용원동 바닷가에 나가 기다릴 것을 명하고 기다리니 어느 날 서남쪽 해상에서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배한척이 다가왔다. 그 배는 阿踰陀國(아유타국)의 공주 許皇后(허황후)長兄(장형) 長遊知尙(장유지상)이 함께 타고 온 돌배(石舟)였다. 그러나 望山島(망산도) 250m지점에서 배가 좌초하니 이 곳이 維舟岩(유주암)이 있는 자리이다. 공주 許皇后(허황후) 일행이 급히 배에서 내린 곳이 망산도 인데 수로왕이 망산도까지 친히 迎接(영접)을 하여 처음으로 뭍에 오른 곳이 유주비각을 세운 이 夫人堂(부인당) 위치이다. 그래서 이 비각을 일러 熊川夫人堂碑(웅천부인당비)라 한다. 이곳 유주비각이 있는 자리에서 망산도까지는 직선거리로 280m이다. 당시에 망산도는 외로운 섬이었고, 이곳 부인당 앞은 모두 바다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14.1.21 망산도 바위 위에 세운 망산도 비갈>

 

 

 

<망산도 동남쪽에 위치한 유주암>

 

 

 

 

웅천 부인당 비음기(熊川夫人堂碑陰記)

熊川夫人堂碑陰記 隆熙二年戊申十一月 日 立

웅천 부인당 비음기 대한융희2년무신(1908) 11월 일 건립

 

駕洛國 首露王妃 普州太后 姓許氏 原系之出 或曰阿踰陀國 或曰南天竺國 又曰西域許國 見於史不同而 其言國君之女一也

가락국 수로왕비 보주태후의 성은 허()씨니, 원래의 계출은 아유타국, 남천축국 또는 서역 허국이라 하여, 역사문헌에 나타난 것이 동일하지 않으나, 그 국왕의 따님이라 함은 일치한다.

 

王定鼎于盆山之陽 越七年戊申 王曰 咨九干 朕降于玆. 天而配朕作后 亦有天也 乃命留天干 候之{}于海上

왕께서 분산(盆山)의 남쪽에 도읍을 정하신 지 7년째인 무신(서기48), 왕은 구간(九干)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이곳에 하강한 것은 하늘의 명령이다. 짐의 배필이 되어 왕후를 삼는 일도 또한 하늘이 명령할 것이다.하시고, 이에 유천간을 시켜 해상에 가 기다리게 하였다.

 

果有大舶 颺茜旗 載石塔 媵臣男女數十人 侍一公主 從西南而至 蓋父王 膺夢讖 命送者也 於是 王設幔殿 禮迎之 配德匹美 肇五百年基業 啓不億麗孫子 於戱盛哉

과연 큰 배가 있어, 붉은 기를 휘날리며 석탑을 실었는데, 잉신(媵臣) 남녀 수십인이 공주 한 분을 모시고 서남쪽에서 도착하였다. 대개 그 부왕이 몽조(夢兆)에 의하여 명령해 보내온 것이었다. 이에 왕께서는 장막으로 임시 궁궐을 설치하게 하시고, 예절을 갖추어 이를 맞이하였다. 미덕의 배필로서, 500년의 터전을 마련하시고, 불억수(不億數)의 후손을 계도하셨으니, ! 장하시었다.

 

今熊川縣夫人堂 太后維舟之地 而堂之東 有望山島 命留 天候望之所 島之南 有巨石 穹然半浸于水 石舟之覆寘云

지금 웅천현(熊川縣)[1]의 부인당(夫人塘)은 왕후께서 배를 매었던 지역이요, 부인당의 동쪽에는 망산도(望山島)가 있으니, 유천간을 시켜 기다리었던 곳이요, 망산도의 남쪽에는 둥글고 큰 돌이 반쯤 물에 잠겨 있으니, 돌배를 엎어둔 것이라고 이른다.

[1]웅천현부인당(熊川縣夫人堂): 지금 경상남도 창원군 용동면 용원리 부인당마을로서, 거기에는 維舟碑閣이 있으며, 主浦村. 望山島. 旗出邊 그리고 綾峴 등 옛 지명이 전하는데, 김해 서남쪽으로 40리를 떨어진 곳이다.

 

命距千八百有餘年 始立石 誌其址 適値舊甲<戊申> 亦不偶然哉 今其後孫<惟幹事者 金禎一. 許埴數人 日 許君燂 >向余請表陰甚摯 强收耋癃 爲之畧叙顚末如是云爾

지금 1,800년이 지난 후에 처음 비석을 세우고 그 옛터를 표시하는데, 마침 옛갑자의 무신(戊申)을 만났으니, 또한 우연이 아니다. <오직 공사를 돌보는 자는 김 정일(金禎一). 허 식(許埴)외 수인이었고,> 어느 날 그 후손이 <허 담(許燂)군이> 나에게 매우 진지하게 글을 청하므로 굳이 늙은 병을 수습하여 그 전말을 이와 같이 대략 서술하는 바이다.

 

崇祿大夫前工曹判書兼知義禁府經筵春秋舘事同知成均館事弘文館學士原任 奎章閣提學 耆老社堂上 玉山 張錫龍 謹識

숭록대부 전공조판서 겸지의금부 경연춘추관사 동지성균관사 홍문관학사원임 규장각제학 기로사당상 옥산 장석용 근지

 

駕洛七年 后徠自天 歲維戊申 令屬七月 玉節煌煌 岾島屼屼 石塔渡海 茜旗暎斗 大洋之西 旗出之右 后乃維舟 克配于京 媵臣稽首 舟梁乃成 人神有母 萬姓歡迎 元君開國 坤元順乾 玉牒炳傳 丹靑表牋 維此主浦 大船之泊 北望綾峴 東瞻神亳 神聖遺蹟 百世如昨 迺竪短碣 百靈肅敬 昭示徠世 无貳弘命

가락[2] 7년에 왕후께서 천명(天命)으로 오셨도다. 태세(太歲)는 무신(戊申)이요. 월령(月令)7월에 속하다. 옥절(玉節)은 휘황하고, 승점(乘岾)과 망산도(望山島) 우뚝하다. 석탑은 바다를 건넜고, 붉은 기는 북두(北斗)를 비쳤다. 큰 바다의 서쪽이요, 기출변(旗出邊)의 오른편(右便)이로다. 왕후께서 배를 매고, 왕의 배필이 되셨다. 임신(媵臣)들 배례하니, 주량(舟梁)처럼 열()을 이루다. 인신(. )은 국모(國母)이었고, 만백성은 환영했도다. 원군(元君)께서 개국(開國)함에 왕후()을 순응하셨다. 옥첩(玉牒)을 전달하니 붉고 푸른 표전(表牋)이로다. 여기 주포(主浦)는 큰 배가 닿았던 곳이다. 북으로는 릉현(綾峴)을 바라보고, 동으로는 고도(古都)를 우러러 본다. 신성한 유적지에 백세(百世)가 어제 같도다. 이에 비석(碑石)을 세우니 백령(百靈)도 엄경(肅敬)하도다. 내세(來世)에 명시(明示)하노니, 유일한 큰 문헌(文獻)이로다.

 

[2] 駕洛7: 서기 48년에 해당함.

外裔 輔國崇祿大夫 行學部大臣原任 奎章閣學士 <驪興> 閔泳韶 謹撰

외예 보국숭록대부 행학부대신원임 규장각학사 <여흥> 민영소 근찬

 

<後孫 從仕郞 前行法部主事 金鍾大 謹書>

<후손 종사랑 전 행 법부주사 김종대 근서>

 

 

 

 

 

출처 및 참조

김해김씨 삼현파(판도판서공 휘 관파)-웅천 부인당 비음기(http://cafe.daum.net/kimthreepa)

창원향교지(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