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창원시 외동 절강 팽씨 부자 포효비

천부인권 2016. 12. 3. 06:00

 

2016.12.02.  창원시 외동 절강팽씨 부자 포효비

 

창원시 성산구 외동 626-4번지에 위치한 外洞 浙江彭氏父子褒孝碑(외동 절강팽씨부자포효비)’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彭友德(팽우덕) 장군과 그의 아들 彭信吉(팽신길) 장군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이 비는 전면에 浙江彭氏父子褒孝碑(절강팽씨부자포효비)’라 새겼고, 비의 크기는 기단의 높이가 총 95cm, 이수에서 비신까지 229cm, 비신 높이 157cm, 너비 62cm, 높이 28cm이다. 비의 측면에는 辛亥十月小雪日(신해십월소설일)이라 기록하고 있어 음력 19711022일에 이 비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漢山 安朋彦(한산 안붕언)이 비문을 짓고, 盆城 金成學(분성 김성학)이 글씨를 썼으며 후손 應柱(응주)가 세웠다고 적었다.

 

 

 

임진왜란 때 명의 지원군 50여 장군 중에 禦倭摠兵 陸軍大都督( 어왜총병 육군대도독) 팽우덕 장군이 있었으며, 그의 아들은 御史中丞遊擊參將(어사중승유격참장)’ 팽신길 장군이다.

팽장군 부자는 왜란이 끝난 후 우리나라에 귀화하여 동래정씨 문중(東萊鄭氏 門中)의 사위가 되어 부산에 永住(영주)하다 절강팽씨의 시조가 되었다. 사후에 이 父子(부자)를 부산의 만덕산에 안장하였는데 정조 212월에 忠勳府(충훈부)에서 팽도독의 전공을 높이 찬양하여 웅천 안곡동의 임야를 하사하여 팽도독 부자의 무덤을 이장하게 하고 산 이름을 高節山(고절산)이라하였다. 현재 창원시 진해구 속천동과 해군사관학교 사이로 뻗은 이 산은 속칭 串出山(관출산), 고출산, 곶출산이라고도 불렸으나 高節山(고절산)이 바른 이름이다. 팽도독의 묘가 있는 고절산은 해군사관학교 내에 속하여 일반인들의 접근이 어려운 실정이다. 아래에는 비문과 해석문을 기록해 둔다.

 

 

 

浙江彭氏父子褒孝碑
浙江之彭 自壬辰東援之將 都督僉事 諱友德 晩亭文忠公 而遂爲吾邦人 厥後有
諱信古官御史中承 號隱齊 諡貞節 其居昌原 爲世亦久自能承緖無替 晩有二人之孝 相繼而尤著 爲即諱寬錫字禹七號孝友堂 暨諱淇洪字敬範號竹坡之父子是已 家貧乏資 樵漁養親 以盡其歡 父母嘗病 嘗糞以驗證 禱祀以求命 隋所思食而非時力求 氷鯉躍出竹露凝蜜 兩次所効 得延親壽於十有二年之久 盖其父之爲行也 出告反面 動遵親訓 至若菸酒之嗜 爲父所不食而一斷 至終不復 爲近父老而病已 年亦六十 猶汲汲於求藥 而爲壇屛處 祈天願代 盖其子之爲行也 父已早見揚於鄕省之士 雖未蒙褒典而薦聞 則有之子 亦屢爲坊邑之所賞所稱說迄不襄 盖其父子兩世之孝 輝暎前後 常者固爲俗之所難能而其異則 可追配於古孝之王孟 余嘗怪夫論世者 多謂今不如古 夫人秉彝之良 卽與天理之流行 不已而罔 有墜時 但人不行耳 苟其行之何間今古 今觀於彭氏所行之異 而盖知其爲謬說也 且又子配安氏 貞婉孝睦 稱有壹範 夫婦之有相勖 而其孝於親 尤不能不篤於是而家乃肥 盖不匱錫類 亦可於彭氏之後而擬之也 其子應柱今爲其父祖二公 合竪一紀孝之碑 於所居熊南外洞之閭側 而摠出力以成之者 爲其妹壻金命基 是又所希覯於世者 其介彭君謁余爲是碑則 余舊好金君學基 乃卽命基君 同堂之親 亦於彭氏爲族家之壻云 旣次其事 乃又系之以銘 銘曰 
是父是子 季世古人 子婦賢行 亦與之倫 人莫孝先 도? 禱不是勵 余庸作銘 以遺其世
辛亥十月小雪日 漢山 安朋彦 撰 (음력 1971년 10월 22일)
               盆城 金成學 書
               孫   應柱  謹竪

절강팽씨부자포효비(浙江彭氏父子褒孝碑)[해문-박태성]
절강(浙江) 팽씨(彭氏)는 임란(壬辰) 동정원정 온 장수 도독첨사(都督僉事) 휘(諱) 우덕(友德) 만정(晩亭) 문충공(文忠公)이 우리나라 사람이 되면서 부터이다. 그 후에 휘 신고(信古)는 벼슬이 어사중승(御史中承)으로 호는 은재(隱齊)이며 시호는 정절(貞節)인데 창원에 기거한 뒤로 대대로 오랫동안 계대를 이어 끊이지 않았다. 늦은 뒤에 두 사람의 효자가 서로 이어 이름이 났는데 휘 관석(寬錫) 자(字) 우칠(禹七) 호(號) 효후당(孝友堂)과 휘 기홍(淇洪) 자 경범(敬範) 호 죽파(竹坡) 부자가 그들이다. 집안이 가난하여 나무를 하고 물고기를 잡아 부모를 봉양하면서도 그 기쁨을 다하였다. 부모님이 일찍이 병이 들자 똥을 맛보아 병세를 징험하였고 기도하여 생명을 구하였다. 부모가 먹고 싶다는 생각하는 바에 따라 때가 아니더라도 힘써 구하니 얼음에서 잉어가 뛰어오르고 대나무에서 이슬이 응고되어 꿀이 되니 이 두 가지 이적의 효험으로 부친의 나이가 12년이나 더 연장되었다. 이것이 그 아버지의 행실이다. 외출할 때는 고하고 돌아와서 얼굴을 뵈며 부모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며 부친이 술을 매우 좋아하자 그 아버지를 위하여 먹지 않고 한번 끊은 뒤 다시 먹지 않고 아버지께서 늙고 병들어 나이가 육십이 되니 약을 구하는데 부지런하며 병풍처럼 두른 곳에 제단을 차리고 하늘에 기도하여 대신 아프기를 빌었다. 이것이 그 아들의 행실이다. 그 부친은 이미 고을이 살피는 선비로 선양되었다. 비록 나라의 포상과 은전으로 천거되지는 못하였지만 그 아들은 여러 번 고을에서 포상과 칭송을 하는 논의가 있었지만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대개 부자(父子) 양대의 효행이 앞뒤로 빛나니 평상시 세속에서는 잘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이적은 옛날의 효자  왕상(王祥:얼음에서 잉어가 나옴) 맹종(孟宗:겨울 대나무에서 죽순이 남)에 짝한다고 할 것이다. 나는 일찍이 사람들이 세상을 논할 때 지금이 옛날보다 못하다고 하는 말을 듣고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무릇 사람이 떳떳한 윤리의 순한 것을 지탱하는 것은 곧 천리(天理)의 유행과 같아서 그치지 않고 사라지지 않으며 어느 시대에도 없어질 때가 없는 것이니 다만 사람들이 행하지 않을 뿐이다. 진실로 그것을 행한다면 어찌 옛날과 지금의 간극이 있겠는가. 지금 팽씨들이 행한 이적을 보면 그 말들이 잘못된 것을 알겠다. 또한 그 자부(子婦)인 안씨도 정숙하고 아름다우며 효성스럽고 화목하여 범절이 있다는 칭찬을 받았다. 부부가 서로 도우며 돋우어 부모에게 효도하니 더욱 이보다 더 독독함이 있겠는가 집안이 부유해지며 뛰어난 후손이 생겨남을 감출 수 없을 것이니 팽씨의 후손들이 그에 의탁하여 살아 갈 것이다. 그 아들 응주(應柱)가 지금에 아버지와 할아버지 두 분의 일을 기록한 효행비를 그들이 살던 웅남(熊南) 외동(外洞) 마을 앞에 세우려고 하니 그 모든 것에 힘을 내어 이룬 사람은 그의 매제인 김명기(金命基)이다. 이 또한 세상에 보기 드문 일이다. 팽군을 나에게 소개하여 이 비석을 이루려는 사람은 나의 옛 친구 김학기(金學基) 군인데 명기군과 같은 서당 벗이다. 그리고 팽씨의 집안 사위라고 한다. 이에 그 일을 차례로 기록하고 또한 명(銘)을 지었다. 명왈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니 후세에도 옛 사람의 면모가 있도다. 그 아들과 부인도 어질어 같이 떳떳한 윤리를 지켰네, 사람들이 조상에 효도하지 않는다면 어찌 이일로써 노력하지 않겠는가. 내 비명을 지어 대대로 남기려 하노라. 
辛亥十月小雪日신해십월소설일 漢山한산 安朋彦 撰안붕언 짓고 (음력 1971년 10월 22일)
               盆城분성 金成學김성학 쓰며,
               孫 자손  應柱응주  삼가세우다.

 

출처 및 참고

디지털창원문화대전

창원시문화유적분포지도(2005)-창원대학교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