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창원시 구암동 정봉락 처 은진송씨지려

천부인권 2016. 12. 3. 13:00



<2016.11.28. 구암동 정봉락 처 은진송씨지려>

 

창원시 구암동 13-3번지에는 3층 건물이 있고 바로 옆에 자의 벽돌로 담을 쌓고 입구엔 철문을 달아 둔 비각이 도심 속에 있다. 맞은편에는 구암1동작은도서관이 위치해 있어 비교적 찾기는 쉽다.

 




비는 자의 담장을 하고 전면에 철재로 문을 달았으며, 시멘트로 기단을 만들고 좌우에 편석을 세운 후 그 위에 지붕돌을 얻어 여각의 형태를 만들었다. 지붕돌 아래에는 가로로 석편액을 넣고 鄭鳳洛妻恩津宋氏之閭(정봉락처은진송씨지려)’라 적고, 그 옆에 光武九年九月三十一日 命旌(광무구년구월삼십일일 명정)이라 새겨 1905931일에 세웠음을 알게 했다.

비신은 碑座圓首(비좌원수)형으로 鄭烈婦宋氏旌閭碑(정열부송씨정려비)’로 시작하는 비문을 적었다. 비신의 뒷면에는 安東 權龍鉉(안동 권용현)()하고 盆城 金鍾河(분성 김종하)()하여 烈婦(열부)貞烈(정열)을 추모하고 있다.





정열부 송씨 정려비(鄭烈婦宋氏旌閭碑)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 비석은 雙淸堂 愉(쌍청당 유)의 후손으로 晉州人 鄭鳳洛(진주인 정봉락)의 처 恩津宋氏(은진 송씨)殉節(순절)을 나라에서 표창한 旌閭碑(정려비)이다. 부인은 宋元珍(송원진)의 딸로서 어려서부터 정숙하고 효성스러웠으며 婦德(부덕)을 쌓으며 성장했다. 정봉락과 결혼한 송씨는 再行(재행) 시 우연히 남편이 병을 얻어 며칠 고생하다가 귀가한 4일 만에 별세했다는 부고를 받고 媤家(시가)에 달려가 모든 장례절차를 치룬 뒤 시부모를 위로하고 자기 침방에 들어간 후 목숨을 끊으니 이때가 甲寅年(갑인년), 17949월로 결혼한 지 7개월이고, 나이 19세였다. 111년 후인 1905년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비로소 정려를 내렸다.




 

鄭烈婦宋氏旌閭碑

昔在 正祖時昌原有鄭烈婦宋氏殉其夫鄕省人士慕其義以狀齋龥于州府者前後數十年竟得上聞至光武九年特蒙旌褒之典於是其烈聞於國矣綽楔舊在郡治書龜岩之旁後孫以其歲久將圮且以其地之僻將移建于其西南孔道旁且具一石以紀其蹟介其族瓘錫以其辭屬余謹按宋氏系出恩津雙淸堂愉後父曰元珍母淸州韓氏烈婦自在室以孝順聞及笄爲鄭鳳洛妻鄭晋州人忠莊公笨後纔醮而至再行鳳洛偶遘病輿而歸烈婦欲隨行其家以病未劇而行且有期强留之居數日竟死聞烈婦卽奔往一大慟旣而躬視斂殯婉辭慰舅姑躬執爨奉舅姑饋下室俱如常未嘗以大戚狀見辭色舅姑頗安之及葬又自治祭奠具儀度自如葬畢謂家人曰吾久勞神疲今則可以寢矣入室久不出怪而審視之己整席而殊不可救卽甲寅九月十五日而距醮期七朔矣余觀世之殉夫者或多迫於境結於情而激於一時者矣今烈婦醮未幾而夫病且沒則未嘗有室家綢繆之樂而情義之結蓋亦未深矣守之而終固己善矣而乃決於判命下從者豈非其心惟見綱常之爲重而視六尺如無耶世之號爲士君子而具冠裳立人朝者或忧於一時之禍福棄綱常如土芥者何限矣而弱少一女子乃能從容李辦此則此固人紀之所賴而不墜者而可不表章之以警一世之耳目耶特深慨乎今世綱常之墜地而感烈婦之義爲叙次其事而系之以辭曰婦以夫天兮惟所從人之大倫兮天降衷夙興夫君兮託佳期夫忽不待兮我疇依期則雖短兮義重山我從在是兮曷盤桓人世無綠兮惟下地不以死從兮何所冀一縷區區兮豈足愛從吾所安兮魂亦快朝梁暮唐兮彼何人臭穢相傳兮神所嗔有石崔崔兮揭煌煌幾人過此兮不此顙

千九百五十八年 陰曆 7月 花山 權龍鉉 撰

盆城 金鍾河 書

玄孫 永錫 讚錫

 

정열부송씨정려비

옛날 정조 때에 창원에 정열부송씨가 있었는데 지아비를 따라 순절하니 도내 사림이 그 의를 추모하여 관아에 장계를 올리기를 오래토록 계속하였다. 마침내 조정에서 이를 알고 광무 9(1905)에 이르러 정려의 은전을 입었는데 이에 열부의 이름이 나라에 알려졌다. 정려각은 옛 관아의 서쪽 구암촌에 있었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지고 또 그 지역이 벽지였기 때문에 다시 그 남서쪽 구암리 앞 큰 도로변에 이건하였다. 또 비석을 갖추어 그 사적을 기록하여 같은 문중의 관석이 나에게 비문을 부탁하였다.

삼가 살펴보니 송씨는 관이 은진이고 쌍청당유의 후손인 아버지 휘는 원진(元珍)이요 어머니는 청주한씨이다. 열부는 어릴 때부터 효성과 순함으로 알려졌고 시집가서는 정봉락(鄭鳳洛)의 처가 되었다. 정씨는 진주인으로 충장공 분의 후손이다 겨우 초례(醮禮)하여 재행에 이르러 봉락이 질병을 만나 실리어 되돌아가니 열부가 따라서 가고자 하였는데 친정에서 병이 아직 심하지 않고 신행에 또 기간이 남았다 하여 억지로 만류하였다. 수일동안 있다가 마침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열부가 곧 달려가 대성통곡하였다. 몸소 소렴(小殮)과 빈소를 살피고 부드러운 말로 시부모를 위로하였으며 직접 부엌에 들어가 시부모께 밥을 해 올리고 궤연(机筵)에 음식을 올리기를 다 한결같이 하였다. 일찍이 슬픈 모양을 얼굴과 말씨에 드러내지 아니하니 시부모가 자못 안심하였고 장례에 이르러서는 또 몸소 제전을 다 구비하고 거동을 자연스레 했다.

장례를 마치고 가족들에게 이르길 제가 오랫동안 수고로와 정신이 피곤하니 잠을 좀 잘까합니다 했다. 방에 들어가 오랫동안 나오지 않으니 괴이하여 살펴보니 이미 자리를 바로하고 눈을 감았으니 구제할 수가 없었다. 이때가 갑인(1794)915일 이었으니 초례를 한지 7개월 밖에 안 되었다.

내가 세상의 지아비를 따라 순절한 자를 보니 혹 많이 그 지경이 절박하여 정에 얽매이어 일 순간에 순절하는 것이 많았다. 이 열부는 초례한지 얼마 안 되어 지아비는 병들어 죽고 아직 남편과 아내의 어우러진 즐거움도 있지 아니하여 정이 맺어짐도 또한 깊지 아니하니 한평생 정절을 지켜 마쳐도 진실로 착하다고 할 것이다. 목숨을 끊고 지아비를 따라감을 결단한 것은 어찌 그 마음에 오직 강상(綱常)의 중함만 보겠고 육신이 없는 듯 함이 아니겠는가.

세상의 사군자를 일컫는 자들이 갓과 의상을 갖추고 조정에서는 자가 혹 일시의 화복을 겁내어 강상을 저버리기를 초개같이 하는 이가 얼마나 많은가. 약소한 한 여자가 이에 능히 조용히 순절하였으니 진실로 강상의 힘입은 바라 떨어지지 않으니 가히 표장하여 일세의 이목에 경계로 삼지 않겠는가. 내가 특별히 금세에 강상이 땅에 떨어짐을 깊이 개탄하고 열부의 의리에 감동하여 그녀를 위해 이 사적을 서술하고 거기에 따라 사()로 지어 가로대. 아내가 지아비를 소천으로 삼음이여 이것이 오직 삼종의 도인지라. 사람의 대륜은 하늘이 마음에 내림이라. 일찍이 부군과 함께 함이여 아름다운 날을 기약 했도다.

지아비 홀연 기다리지 아니하니 나는 누구에게 의지하리오. 기약함은 비록 짧으나 의는 태산보다 무겁도다. 나의 삼종지도가 여기에 있음이여 어찌 머뭇거림이 있겠는가. 인간 세상에 인연이 없음이여 오직 지하에 있노라. 따라 죽지 아니하고 무엇을 또 바라겠는가. 한 목숨 구구함이여 무엇을 아끼리오. 네 육신 편안한 바를 따르는데 혼이 아니 결할 소냐. 아침에 양()나라 가고 저물녘 당나라에 아부함이여 저 어떤 인간인가. 악취를 서로 전함이여 귀신도 또한 꾸짖는 바라. 비석이 높고 높음이여 빛나게 걸리었도다. 몇몇 사람 여기를 지나는 이여 이마에 땀 흘리지 아니하랴.

1958년 음력 7월 화산 권용현 지음.

분산 김종하 쓰고

현손 영석 찬석 세움


출처 및 참조

디지털창원문화대전

마산문화지(2004)-마산문화원




2018.01.05 현재 '정열부 송씨 정려비'는  창원시 마산회원구 구암동 710-11의 공원으로 이건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