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창원시 대장동 주정원 효자비

천부인권 2016. 12. 7. 08:39

 

2016.12.5. 대장동 진입로에 세운 주정원 효자비

대장동에는 오래전부터 이어진 성흥사가 있고, 대장동 계곡이 있어 인근 주민들의 휴식처로도 유명한 곳이다. 요즘은 진해구 앞 바다의 매립과 개발로 인해 조용하던 소사동과 대장동 일대가 도로 공사로 인해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실정이다. 또한 옛 아름다운 모습은 사라지고 도로로 인해 마을 자체가 보이지도 않는다. ‘호구총수에는 大正洞里(대정동리)’로 나오나 1899년 웅천군 지도에는 大壯洞(대장동)’로 기록 되어 있다.

大壯洞 朱鋌源 孝子碑(대장동 주정원 효자비)’는 대장동으로 진입하는 대장교에서 약 330m 지점인 진해구 대장동 22-17에 있는데 대장동 입구에 위치하여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보게 된다.

 

대장동 주정원 효자비가 위치한 곳은 마을 입구 도로변 들판에 있어 비를 보호하기 위해 자연석 막돌로 둥근 형태의 담장을 하고 정면에는 철문을 달았다. 비신(碑身)의 좌우측에 장방형의 판석형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돌을 얹은 형식의 비각(碑閣)을 갖추었고 비신이 직접 지붕돌과 맞닿아 있다. 담장 앞에는 배롱나무 한 그루를 심었으며 배롱나무 앞에는 菊井朱公(국정주공)의 비를 건립한 공이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새긴 수비위원 표지석이 있다.

이 효자비의 전체 높이는 178cm, 105cm, 두께 45cm이고, 가첨석(지붕돌)의 높이는 43cm, 136cm, 두께 75cm이다. 비신의 높이는 125cm, 47cm, 두께 19cm이며, 상단의 비좌 높이는 15cm, 72cm, 두께 51cm이고, 하단의 비좌 높이는 10cm, 131.5cm, 두께 67cm이다.

 

이 비는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기에 진해에 거주하였던 효행이 뛰어난 朱鋌源(주정원)의 행실을 칭송하기 위하여 1942년에 후손들이 대장동 마을 앞에 건립한 孝子碑(효자비)이다.

 

2016.12.5. 대장동 진입로에 세운 주정원 효자비

 

비의 전면에는 孝子菊井朱公鋌源之碑(효자국정주공정원지비)”라 음각으로 적었고 비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孝子菊井朱公鋌源之碑
鳳鎬 嘗從屏州士友 聞菊井朱孝子事稔矣 孝子既殁之明年 一鄉章甫會昌原校宮 又會朱夫子講堂 咸一辭言 菊井公懿行 自鄉道士 無不贊揚 以世道不古 綽楔無典 將伐石以表之 可乎 使申君珍圭 裴君健守 薺月城孫 斯文厚翼所撰狀 來余請文 顧惟拙訥 何能爾也 辭不獲 按其狀盆驗前聞之不左 因撮其姓系行治 而爲之銘曰 公諱鋌源 在三其字 井上有菊 厥號取義 赫赫大祖 紫陽夫子 夫子曾孫 以宋學士 避元渡東 東始有朱 文節文簡 爲國訏謨 繼有功臣 食采熊城 至諱漢奕 以孝蒙旌 相新慶馥 善周鳳甲 是公四親 傳襲儒業 維仁川李 爲公天只 辛未秋八 公乃產出 己卯仲夏 公實觀化 六十有九 是其年壽 院浦乾岡 衣履攸藏 公生三歲 齒誤觸乳 不欲吮湩 恐母痛楚 母患膈痞 食或廢却 泣進匙莇 母食乃食 七歲受讀 孝字究問 于徐晚悔 臀服艘踐 成童從學 野隱晚山 距家稍遠 日必省晨 弱冠以聘 文氏嘉配 敬夫无遠 春噓壺內 替夫執勞 俾專其學 鱧魚供姑 宿痾消釋 隣里咸稱 是婦是夫 公嘗赴舉 愼涉全軀 客館心驚 歸撲床炎 到老舞斑 務得歡心 嘗侍親癠 夜不交睫 脂指括肛 易通屎澁 裙牏自滌 不使人代 負扼抑搔 以迄數載 及後丁艱 毀幾滅性 逐日省墓 路介山徑 每當大日 必誦遺訓 僾然容聲 如聞如見 公之事親 自生至死 竭盡誠敬 其孝至矣 與弟友篤 箴切征邁 弟竟夭閼 孔懷莫耐 措置得宜 婚婦共炊 人不間言 家無怨咨 天翁有感 爲錫螟嗣 炅出炅宅 式穀式似 猗朱之裔 世趾其美 根深枝達 源遠委長 林林衆生 孰無彛常 視此顯刻 必有興作
重光 大荒落 黃鍾月 栽生明 南平 文鳳鎬 撰 
                               盆城 裴正台 書

 

효자국정주공정원지비

文鳳鎬(문봉호)가 일찍부터 웅천의 文友(문우)들에게 菊井(국정) 주 효자의 효행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 효자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에 창원향교의 鄕章甫會(향장보회)와 주부자강당(주자강당)에서 만났을 때 모두가 한마디씩 말하기를 菊井公(국정공)懿行(의행)은 우리 고장의 仁義(인의)를 아는 선비들이 찬양해 마지않는 이가 없으므로 비록 世道(세도)가 오래 되지 않아 綽楔(작설)典籍(전적)에 실리지 않으니 마땅히 돌을 쪼아 旌表(정표)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며 申珍圭(신진규), 裵健守(배건수)月城 孫厚翼( 월성 손후익)撰狀(찬장)으로 내게 청문하여 재주가 졸렬한데 어찌 능히 해낼 수 있겠는가 그래서 맡을 수 없다고 사양하다가 그 찬장을 근거로 추려 적게 되었으니 그르침이 없기를 바란다.

공의 이름은 정원이고, ()在三(재삼)이며 우물위에 국화가 있다는 뜻의 국정으로 ()를 취했다. 혁혁한 시조인 紫陽夫子(자양부자-주자)曾孫(증손)宋學士(송학사 )가 원나라에서 오랑캐를 피해 도피하여 조선으로 건너 오셨으니 우리나라에 비로소 朱氏 姓(주씨 성)이 있게 되었다.

文節公(문절공 )文簡公(문간공 )이 나라를 위해 큰일을 도모하셨고 계속하여 공신을 내셨으며 熊城公(웅성공 子精) 이후 漢奕(한혁)에 이르러 효자로 旌褒(정포)가 내려졌고 공의 고조부는 相新(상신), 증조부 慶馥(경복), 조부는 善周(선주), 부친은 鳳甲(봉갑)으로 대대로 가문의 전통인 유업을 이어 받았으며 仁川 李氏(인천 이씨)를 공의 天只(천지)로 삼았다.

18178월에 공이 나고 19397월에 69세로 년수를 마치셨으니 원포의 서북쪽 산등이에 묘지를 마련했다. 공이 태어나 3살이 되던 때에 이빨이 젖가슴에 잘못 닿아 모친이 아플까봐 두려워서 젖을 빨지 않았으며 모친이 배속이 결리고 가슴이 아파서 식사를 하시다 말곤 하였는데 울면서 다가가 수저를 들어 어머니가 드시는 것을 보고서야 자신도 먹었다.

7세 때 글을 읽다가 ()究問(구문)하여 늦게 깨우친 것을 후회하며 몸소 실천할 것이라 하였으며 소년이 되어서 서당에 다닐 때는 이슥한 밤중에라도 집에서 제법 먼 거리인데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찾아가 새벽까지라도 깨우치곤 했다. 나이 스물이 되어 문씨를 배필로 맞아 들였는데 지아비를 공경하는 것이 오래지 않아 애뜻한 정으로 지아비를 섬기어 지아비의 執勞(집노)를 대신했으며 오로지 배운 바를 쫓아 시어머니에게 가물치를 잡아서 고와드려 숙환에서 나으시게 하니 인근 각처의 마을 사람들이 그 지아비에 지어미라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공이 일찍이 처가 곳에 갔다가 온 몸으로 전해오는 느낌이 있어 근심스럽고 내심 놀라 귀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밤길을 걸어서 돌아와 불붙은 상에 몸을 던져 끈 후 노인네 앞에서 춤을 추며 어우러져 기쁘게 해 드렸고 어버이의 병을 시중할 때는 밤잠을 멀리하고 손가락에 기름을 묻혀 항문에 넣어 용변을 쉽게 볼 수 있도록 하였으며 벗어 놓은 속옷은 손수 빨아 다른 사람을 대신 시키지 않았다.

온갖 어려움을 혼자 도맡아 억제한지 여러 해가 되더니 급기야 부친의 상을 당하여 지나치게 애통갈통하여 어찌 성정(성정)을 상하지 않았을까마는 날마다 묘에 찾아가 성묘하니 산속에 새로운 길이 생겼다. 날마다 지아비에게 당부하기를 반드시 부모의 유훈을 새기면 그 자태와 음성이 어렴풋이 보일러니 늘 부모의 자취가 보일 듯 들릴 듯 하리라. 공의 부모 섬김이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정성으로 공경을 다하였으니 그 효친이 지극하여 형제들과도 우의가 돈독하여 이르는 말을 모두 만나서 나누시니 아우들이 마침내 멀리서 그러지 못하게 하였으니 형제간에 의가 좋아 하지 못할 일이 없었고 조치가 적합하여 홀어머니와 살아도 사람들이 참견하지 못하였다. 집안에서 원망하거나 한탄하는 일이 없으니 하늘이 감동하여 炅出(경출)炅宅(경택) 두 아들을 후사로 내려 주셨고 잘 가르쳐서 대를 잇도록 하였으니 아! 송학사 주공(宋學士 朱公)後裔(후예)라 할 만하구나!

세거하는 터가 좋아야 뿌리가 깊고 가지가 잘 뻗어는 법이라 근원이 長久(장구)하면 숲마다 온갖 생물이 들끓는 것과 같이 누군들 弊常(폐상)이 없으랴 이를 비갈에 새기노니 반드시 興盛(흥성)함이 있을지어다.

1941(신사년) 113일 남평 文鳳鎬(문봉호)가 글을 짓고,

                                         분성 裵正台(배정태)가 쓰다.

 

출처 및 참조

진해의 땅 이름 이야기(2000)

디지털창원문화대전

진해의 비석(1997)

진해시 문화유적지표조사 보고-창원대학교박물관(1999.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