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초대 문교부장관인 안호상(1902~1999) 박사가 장관시절, 중국의 세계적 문호 임어당(林語堂, 1895~1976)을 만났을 때 여담처럼 한자에 대해 이처럼 말했다고 한다. "중국이 한자를 만들어 놓아서 우리 한국까지 문제가 많습니다."고 하자 임어당이 놀라면서 "그게 무슨 말이오? 한자는 당신네 동이족이 만든 문자인데 그것도 아직 모른단 말입니까"’라는 핀잔을 들었답니다.
중국은 쓰지 않고 우리민족만 쓰는 한자 중에는 畓(논 답)이라는 글이 있다. 水(물 수)+田(밭 전)을 합쳐서 벼농사를 짓는 ‘논’이 생긴 것이다. 왜 중국에는 쓰지 않는 ‘논’을 우리는 사용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은 우리의 主食(주식)과 중국의 주식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민족은 쌀이 주식이고, 중국은 밀이 주식이다.
요즘은 경작을 하지 않는 농토들이 많은데 묵혀둔 농지를 보면서 논과 밭을 구별하는 것은 쉽다. 논은 물이 필요하기 때문에 수평이 필요하고, 밭은 경사지나 토지의 높낮이가 일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만 보면 구분이 가능하다.
畓이라는 글자는 중국이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든 고유의 글자이다.
또 하나 재미난 것은 弔자와 吊자이다. 두 글자다 ‘조상할 조’이다. 弔자는 우리민족이 사용하고, 吊자는 중국이 사용한다. 두 글자 중 어느 것이 원시적인 글인가? 또는 어느 글자가 먼저 만들어진 글자인가를 따져보면 한자를 누가 만든 것인지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弔는 弓(활 궁)+丨(뚫을 곤)이 합쳐진 글이다. 吊는 囗(에워쌀 위)+巾(수건 건)이 합쳐진 글이다. 弔를 사용하는 사람은 조상의 무덤을 활로 지키고 있는 모습이고, 吊를 사용하는 사람은 조상을 수건으로 에워쌓았다는 것으로 매장 문화를 시사하고 있다. 따라서 문화의 발전방향을 볼 때 弔를 사용하는 사람이 더 원시적인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弔자를 사용하는 사람이 한자를 만든 사람이라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지금 한자가 우리가 만든 글이라 주장하지 않으며, 훈민정음 또는 한글만 우리 글이라 생각하고 있는가이다. 고대 중국에서 나라를 만든 최초의 인종은 중국이 말하는 東夷族(동이족)이다. 하(夏), 은(殷), 1027-771 B.C. 주(周)로 이어지는 국가 존재는 모두 동이족이 세운 나라이다. 즉 우리민족은 왕족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왕족은 왕족 끼리 통하는 문자를 가지고 있었고 이 문자는 야만족과 함께 사용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야만족과 소통을 하려고 하니 그림과 형상으로 이해를 시키고 그것이 결국 한자라는 문자로 만들어진 것이다.
하(夏)나라 시대의 상(商)나라 때 사람, '문자의 신'이라 불리는 창힐(蒼頡)이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고대 백과사전인「산해경(山海經) 중산경-중차5경」끝에 나온다. 『찬란한 황금이 많은 양허산(陽虛山)은 현호수(玄扈水)를 가운데 두고 고용산(高聳山)을 마주보며 솟아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창힐이 양허산의 정상에 오르며 친히 현호수를 건넜다 한다. 이때 바로 청문(靑文)이 신서(神書)를 창힐에게 전해준 때라고 한다.』고 적었다.
창힐은 이름이 유소씨(有巢氏)로 수인씨, 열산씨, 신농씨의 이름을 취하는 방식과 비슷하게 지어졌다. 창힐은 치우천황의 신하로 알려져 있으며 문자를 만든 내용을 다룬 이야기들은 창힐의 생김새와 업적에 대해 심하게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고 평한다.
『그는 머리에 눈이 4개 있고 신명과 통하며, 위로는 괴성(魁星:북두칠성의 方形을 이룬 네 별)의 둥글고 굽은 형세를 관찰하고 아래로는 거북의 등껍데기 모양과 새 발자국의 형상을 살펴, 아름다운 것들을 널리 모아 글자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천지·귀신이 그것을 보고 감동하여 하늘에서는 곡식을 내리고 귀신은 밤에 곡을 했다고 한다. 문자가 세상에 전해지자 '이사(李斯)는 창힐이 쓴 28자를 보고 단지 8자만을 알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후한의 환제 때인 162년(延熹 5)에 세운 창힐묘비가 산시 성[陝西省] 시안[西安]에 있다. 묘비문은 예서 24행으로 되어 있으나 이미 마모되어 판독이 불가능하다. 순자는 〈해폐편 解蔽篇〉에서 "글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만 창힐만이 홀로 그 글을 전한 사람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잘 나가던 우리민족에게 비극이 찾아온다. 전설로만 전해오는 탁록전투(涿鹿之戰)가 그것이다. 산해경의 주장은 「탁록의 전투(涿鹿之戰)에서 황제는 곰, 말곰, 비, 휴, 승냥이, 호랑이의 여섯 마을을 연합하여 결전의 순간에 이들이 돕도록 했다. 蚩尤(치우)의 군대는 비록 용맹했으나 황제가 이끄는 연합군을 막아내지 못하고 패했다. 우레 소리가 둥둥 거리는 승전고를 울리며 황제는 승리를 했고 탁록의 들판에서 치우는 죽었다.」고 사마천의 사기에는 전한다. 이후 우리민족은 흩어져 도망을 가기 시작했고 결국 평양에까지 밀려와 중국의 눈치를 보며 살게 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환단고기에는 탁록의 전투에서 치우천황의 군대가 승리했다 전한다. 탁록의 전투가 있던 당시는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전환되던 때로 치우의 군대는 철기를 사용했고 황제의 연합 군대는 청동기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환단고기의 기록을 신뢰할 수 있다.
출처 및 참고
산해경(2010.4.15)-안티쿠스-서경호, 김영지 역
다음 백과사전-창힐
글자전쟁-새움-김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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