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내서읍 삼풍대 앞 쌍효각 雙孝閣

천부인권 2018. 8. 16. 14:04



2015.3.19. 삼풍대 교하노씨 쌍효각


회원구 내서읍 삼계리 12, 동편 입구에는 쌍효각(雙孝閣)이라는 편액이 붙은 정려각(旌閭閣)이 있다. 이 정려각 안에는 「贈 從仕郞中敎官交河盧正中之閭(증 종사랑중교관교하노정중지려)」와 「贈 從仕郞中敎官交河盧晟中之閭(증 종사랑중교관교하노성중지려)」라 새긴 비(碑) 두 개가 서있다. 원래는 이 비(碑)는 삼계초등학교 북동쪽의 ‘큰보들’ 옆 가로변에 있었다. 근래의 대규모 택지조성에 따라 주변 경관이 크게 변모되었으나, 회화나무로 구성된 마을 숲인 삼풍대는 그대로 보존되었고, 동쪽 입구 쪽에 교하노씨(交河盧門)의 정중(正中)과 성중(晟中) 형제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쌍효각을 옮겨 세웠다.
비의 뒷면에는 아버지의 병중에 10 여년을 한결같이 봉양하고, 상을 당하매 그 애달픈 심정을 담은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읊어 여막에 걸어두고 봉송(奉頌)하면서 탈상(脫喪)까지 정성을 다했다. 이에 향리(鄕吏)의 유생(儒生)들이 조정요로(朝廷要路)에 상장(上狀)하였고, 경상관찰사(慶尙觀察使)가 이를 재차 조정에 장계(狀啓)하니 1905년에 두 형제의 효행을 기려 쌍효정려(雙孝旌閭)를 내렸다.
칠언절구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2015.3.19. 삼풍대 쌍효각 내력


慕廬菴詩 -효도를 다하지 못한 애달픈 글
家貧親老過平生 집이 가난하여 늙으신 부모님을 어렵게 평생을 지내게 하였으며
養送俱焉憾博輕 정성어린 봉양을 소홀히 하였고 별세하셔서도 장례를 초라하게 지냈으니 지난날 모두가 한이 되는 구나
奉不三牲違孝道 삼생(소·돼지·염소)을 차려서 공양을 하지 못하였으니 효도에 어긋났으며
葬無片石背恩情 장사를 지냈음에도 돌판 한 조각 갖추지 못하였으니 태산 같은 부모의 은혜에 등을 돌렸네.
喪當制限終身痛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애통해야 하는 몸가짐의 절차도 한정이 있었으니
日用省楸在世營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이라도 슬픔을 담아서 날마다 산소에 성묘를 해야 겠네
廬岳晝宵長在目 밤낮으로 여악산(광려산 기슭)을 애곡하는 마음으로 눈길을 보내고 있으나
昊天罔極不肖誠 하늘에 비길 수 없는 끝없는 은혜에 보답 못하였음이 애닯도다.





2015.3.19. 삼풍대 교하노씨 쌍효각 출입문


孝子贈中學敎官慕廬菴盧公兄弟旌閭記


上之四十二年乙巳 道臣以昌原孝子盧公兄弟 行卓異聞于朝 特贈二公 爵中學敎官 又命旌其閣以風勵 四方蓋盛典也 接二公諱正中字福汝其伯也 諱晟中字器汝其季也 兄弟二人先後生焉 而生則便之愛親之道 其匍匐而就食也 必先父母之口 其稍長而就傳也 不廢晨昏之節 滫隨必親檢而不懈應 唯必婉順而無違 其知能之夙著己 如此而及其遭 母夫人喪弱齡拚 號幾室滅性終 三年不近草木之滋 又書揭蓼莪詩于壁上 日三復流涕非至誠 而能如是乎 其事先公也 益復洞屬跬步不敢忘 先公偶患風痺 凡起居運動飮食便旋不須人 則不能公兄弟夙宵 侍側十年如一日 食上則曰 此某饌也 此某羹也 有外聞則曰 某處有此事也 某人有此擧也 惑作嬰兒戲如老萊 弄雛未嘗叱犬馬如孔明之所 學中裙汚穢親自浣濯 如石君家之中 郞皆人所難也 至遭故則公年已不毁 而哀哀孺子哭 有不忍聞者 殮葬諸節一遵 文公家禮以致 自盡之道 哀絰不祛身言語不共人遂日 省墓雖風雨不發 樵牧爲之治道 有雨雪爭先掃除稱之以孝子 程云駛雨如傾大川橫溢 而苴杖所臨使江水 而安流端穀挺出九橞穎栗 而血淚所滋屛雀鼠 而遠循則此乃天也 非人也 昌黎子所謂 唯有天翁知生 詳下端無時期者 非歟於是鄕里 聳難公議協同至 有堡聞之狀公 卽取而火之日 使我增益不孝之罪也 因屛蹟窮廬扁 其堂日慕廬名賦 四韻以寓終身之墓 朱夫子嘗日求知於世 而爲之則雖割服 廬墓弊車瀛馬亦爲人耳 苦二公者豈有一毫求知之心 哉雖然至誠而不勤者 未之有也 宮鍾聞外 恩褒鄭重使烏頭亦脚 炳郞窮廬垂耀 無窮則夫孰爲天之未定也 鳴乎 至矣二公以太師康弼之後 世以行誼相承 而至僉樞諱景宗 又以執徐倡義 有聞於世測 其篤孝純誠雖由於天 姿之異於人 而家勢脉之傳赤 有不可誣者矣 蘇氏曰 稱人之善 必本其父兄師友 誠哉是言也 日公之後孫鍾斗鉉斗等以 其父兄之命 踆涉四百餘里 請記於不佞 余雖老廢喜道人 忠孝事者遂作 而日有哉二公之孝也 旣能感物而格天 又能燾後 而貽孫克熾 而昌且秀 而都儘鄕族罕比也 幸使諸君克體二公之心 克述二組之事瞻悼楔 而益勉過門閣 而如見孝子慈孫繩繩 不贊則盧氏旌孝之閣 將見林立於昌原之境矣 吾將執契以侯之於是乎書


丙午秀要節前行義禁府事聞韶金道和記




2017.1.18 출입문 편액 모려문(현손 명현) 삼가 쓰다.


효자 증 중학교관 모려암 노공형제 정려기


고종 42년 을사(乙巳 1905)에 관찰사가 창원 효자 노공형제 효행의 탁이함이 조정에 들리어 특별히 두 공에게 중학교관(中學敎官)을 증직하고 또 정려를 명하여 사방을 풍동시켰으니 대개 풍성한 은혜이다. 살펴보건대 두 공은 자(字)가 복여(福汝)인 맏이의 이름은 정중(正中)이요, 자가 기여(器汝)인 아래의 이름은 성중(晟中)이다. 형제 두 사람이 차례로 태어났는데 나면서부터 문득 부모 사랑하는 도리를 알아 엉금엉금 걸어 다닐 때에도 먹을 것이 있으면 반드시 부모님 입에 먼저 드리더니 점점 자라면서 옛 교훈을 따라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절차를 폐하지 않고, 부모의 소변을 친히 점검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고, 부모 앞에 나아갈 때는 안색을 부드럽고 순히 하여 뜻에 어김이 없었고 효행하는 것이 능히 일찍부터 나타났다.
모부인의 상을 당하여 어린 나이임에도 애통해 하여 거의 생명을 잃을 뻔 했으며 삼년 여묘 살이 때에는 무덤 앞에 초목이 더 자라지 않았다. 륙아(戮芽)의 시를 벽에 써서 걸어두고 날마다 세 번씩 읽으며 눈물을 흘리었으니 지극한 정성이 없고서야 이같이 하겠는가. 그 선공을 섬김에도 더욱 살펴 드리기를 잠시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부친이 우연히 풍이 들어 무릇 기거운동과 음식하고 대소변 수발 등, 한 시도 사람이 곁에 없어서는 안 되어 공의 형제가 주야로 곁에 모시어 10년을 하루같이 하며 음식이 나오면 이는 무슨 반찬이며 무슨 국입니다 하고 밖에 소문이 있으면 어느 곳에는 이런 일이 있으며 아무 사람은 이런 행동이 있었다고 하고 때로는 어린아이 재롱하듯 노래자(老萊子)같이 했다. 이러한 일이 다 사람으로 어려운 바라고 했다. 상을 당해서는 공의 나이가 이미 많아 심하게 울지 않아야 되는데도 슬퍼하기를 어린애 울음 같아 차마 들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염습과 장례지내는 주문공(朱文公)의 가례를 따르므로 스스로 다하는 도리를 이루었다. 「친상고소자진(親喪固所自盡)」 최질을 몸에 벗지 않으며 사람과 같이 말을 접하지 않고 날마다 성묘하여 비록 비바람에도 폐하지 않으니 나뭇꾼과 목동들이 길을 닦아주며 눈이 내리면 앞을 다투어 소제하여 효자의 길이라 칭하였다. 하루는 소낙비가 쏟아 붇듯이 내려 큰 내가 범람했으나 상장을 집고 다니는 곳에는 강물과 같이 곱게 흘러서 곡식이 무성하게 되고 벼알이 잘 여물었으며 피눈물이 떨어진 곳에 새와 쥐까지도 멀리 도망가 버렸으니 이것은 하늘의 소사요 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겠으나 창려자(昌黎子)가 이른바 오직 천옹(天翁)이 앎이 있어서 상서(詳端)를 내림이 시기가 없다 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에 향리에서 우러러 탄식하고 공의가 일치되어 위에 포장하자는 소장이 있기에 공이 즉시 빼앗아 불에 넣으며 이르기를 「나로 하여금 불효의 죄를 더하게 한다하고」 옴팡집에 종적을 감추어 그 집을 묘려(墓廬)로 편액하고 각각 사율시(四律詩)를 지어 죽을 때까지 사모를 붙이었다. 주부자(朱夫子)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세상에 앎을 구하려 한다면 비록 다리를 베고 시묘(侍墓)를 살며 수례가 헐고 말이 파리했어도 또한 사람을 위하여 함이 된다.」고 하시었으니 두 공과 같은 자는 어찌 일호인들 덜 앎을 구하는 마음이 있겠는가! 비록 그러나 지성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나라의 종소리가 밖에 들리어 은포(恩褒)가 정중하게 내리어 오두적각(烏頭赤脚)이 병랑하고 옴팡집이 무궁토록 빛을 드리웠는 즉 누가 하늘의 이치가 정해져 있지 않다 하겠는가? 아! 지극히도 성대하도다. 두 공은 태사공(太師公) 강필(康弼)의 후예로 대대로 행의(行誼)로서 서로 이어 왔는데 첨추공(僉樞公) 휘 경종(景宗)이 또 임진왜란에 창의하여 세상에 들림이 있은 즉 그 돈독 한 효와 순수한 성의는 비록 천품이 남보다 탁월한데에서 말미암았으나 가세의 기맥이 유전됨을 또한 속일 수가 없음이 있다. 소동파(蘇東坡)가 이르기를 「사람의 선행을 칭하려면 반듯이 그 부형과 사우를 근본 해야 된다.」고 했으니 이 말씀이 참으로 그러하다고 하겠다.하루는 공의 후손 종두(鍾斗) 현두(鉉斗) 등이 그 부형의 명으로 400여리를 찾아와 나에게 기문을 청하니 내 비록 노혼하였으나 남의 충효사적을 말하기 좋아함으로 드디어 일어나서 말하되 이 후손을 감싸고 도와서 번창하고 또 준수함이 향족으로 견줄 이가 드무니 다행이 제군들로 하여금 두 공의 마음을 잘 본받고 두 조상의 사적을 잘 계술하여 정문을 바라보며 더욱 힘쓰고 동네를 지나며 효도하는 아들과 사랑하는 손자가 계속 길이 이어서 즉 노씨의 효자 정문이 창원 지역에 빽빽하게 세워질 것이니 내가 장차 기약하여 기다릴 것이다. 이에 쓰노라


병오(丙午 : 1906년) 수요(秀要 : 4월)에 전행의 의금부도사 문소 김도화(金道和)가 쓰다.




2017.1.18 정려각


*김도화(金道和,1825~1912)
조선 말기의 학자이며 의병장으로 활동 했다.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달민(達民), 호는 척암(拓菴). 안동 출신. 김약수(金若洙)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진양정씨(晉陽鄭氏)이다. 유치명(柳致明)의 문인이다.
1893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다. 1895년 12월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안동군내 유림대표로 거의통문(擧義通文)을 발표하였다. 또한 안동에 입성한 김도화는 의병진의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그해 12월 3일에 안동의 의병 수백명이 모여 안동관찰부를 점령하고 무기를 빼앗자 관찰사 김석중(金奭中)은 도망하였다.
이로 인하여 안동의병의 기세를 크게 떨쳤다. 1896년 태봉전투에 참전하였으며, 그뒤 노환으로 은거하면서도 을사조약과 경술국치를 맞아 항의문과 규탄문을 통하여 일제에 항거하였다. 저서로는 『척암문집(拓庵文集)』이 있다. 1983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2017.1.18 정려각 편액 쌍효각


출처 및 참고
문화유적분포지도-마산시(2005), 경남대학교 박물관
마산삼계리근린생활공원조성지표조사-경남발전연구원(2006-03)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2004-0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17.1.18 비문 전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