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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산 김기호 선생 유허비

천부인권 2018. 3. 27. 13:28



2017.4.1 추원재와 소산선생 유허비



2017.4.1 추원재 비갈과 소산 김선생 유허비




창원시 성산구 신사로 143에는 소산 김기호(小山 金琦浩)를 제향하는 추원재(追遠齋)가 있다. 추원재 앞에는 2014년 4월 24일 제막식(除幕式)을 가진 비가 있는데 전면에는 「소산김선생유허비(小山金先生遺墟碑)」라 새겼다. 이 비의 비문은 창원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장성진(長成鎭)이 삼가 지었다.





소산김선생유허비기(小山金先生遺墟碑記)
성정(誠正)의 수신(修身)으로 일관(一貫)한 군자(君子)요 성현(聖賢)의 대도(大道)로 후학(後學)을 깨우친 진유(眞儒)가 이 고을에 있어 향칭선사(鄕稱善士)하고 도천숙덕(道薦宿德)하여 조명(朝命) 통정대부(通政大夫)하니 바로 소산김공(小山金公)이다. 공(工)의 휘(諱)는 기호(琦浩)요 자(字)는 문범(文範)이요. 소산(小山) 또는 소파(小坡)는 호(號)이니 고려평장사(高麗平章事) 김녕군(金寧君) 휘(諱) 시흥(時興)의 후손(後孫)이다. 김녕김문(金寧金門)은 시조이래(始祖以來) 五代에 걸쳐 현관(顯官)을 지내고 조선조(朝鮮朝)에도 연이어 대작(大爵)에 올랐으나 공(公)의 십삼세조(十三世祖)인 충의공(忠毅公) 백촌(白村) 휘(諱) 문기선생(文起先生)이 단종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에 앞장섰다가 병자사화(丙子士禍)에 순절(殉節)한 이후(以後) 자손(子孫)이 유이보명(流離保命)하였다. 그 중 충의공(忠毅公)의 증손(曾孫) 휘(諱) 정무공(鼎武公)이 창원(昌原)에 정착(定着)하여 멸문(滅門)의 한(恨)을 안은 채 충절가(忠節家)의 법도(法度)를 지키며 세거하였다. 정조(正祖) 때 충의공(忠毅公)이 신설(伸雪)된 후 휘(諱) 서기(瑞起)는 수승(壽陞) 가선대부(嘉善大夫)하니 공의 증조(曾祖)이고 조휘(祖諱) 윤보(潤輔)는 조세(早世)하였으며 노(老) 휘(諱) 성철(聖哲)은 장자(長子)의 덕(德)을 지녔다. 비(妣)는 김해김씨(金海金氏)로 부도(婦道)가 높았으며 순조(純祖) 임오년(壬午年) 오월(五月) 육일(六日)에 사파정동제(沙芭亭洞第)에서 공(公)을 낳았다.
공(公)은 자품(資稟)이 총명(聰明)하고 시문(詩文)에 능(能)하여 한때 과거(科擧)에 뜻을 두었으나 성학(聖學)의 묘리(妙理)를 접하고는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잠심(潛心)하였다. 평생(平生)을 향촌(鄕村)에서 수신(修身)과 교학(敎學)으로 일관(一貫)하다가 광무(光武)오월(五月)이십팔일(二十八日)에 졸(卒)하니 향수(享壽) 팔십(八十一)이다. 공(公)은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여 봉구(封口)양지(養志)와 신종추원(愼終追遠)을 한결같이 실천(實踐)하였다. 환갑(還甲)을 맞아서는 회갑연(回甲宴)을 물리치고 선부군(先府君)의 生辰에 녜제(禰祭)를 올렸으며 고희(古稀)가 되던 해에는 선비(先妣)의 기일(忌日)에 추모(追募)하는 시(詩)를 지어 읍제(泣祭)하였다. 하세(下世)하기 열흘 전에 자만사(自挽詞)를 지어 불효(不孝)를 한탄(恨歎)하였으니 과연(果然) 천성지효(天性至孝)라 하겠다. 스승인 성재(性齋) 허선생(許先生) 전(傳)이 졸(卒)하자 육십오세(六十五歲)의 노령(老齡)임에도 자리를 깔고 곡(哭)한 뒤 소식가마(蔬食加麻)로 심상(心喪)의 예(禮)를 지켰다.
공(公)은 소시(少時)에 효경(孝經)과 소학(小學)을 배우고 중년(中年)에 성리학(性理學)에 침잠(沈潛)하고 퇴계(退溪)의 언행록(言行錄)를 깊이 살폈다. 고종(高宗) 을축년(乙丑年)에 성재선생(性齋先生)이 김해부사(金海府使)로 부임(赴任)하여 강회(講會)를 열자 달려가 집지사사(執贄師事)하고 함허정강회(涵虛亭講會)에 나아가 경서(經書)와 사의(士儀)를 자세히 읽고 금관사록(金官私錄)에 기록해 두었다. 퇴계(退溪)와 남명(南冥)의 학문(學問)에 연원(淵源)을 두고 한강(寒岡)과 미수(眉叟)를 거쳐 성호(星湖)와 순암(順庵)에 이어진 성재학파(惺齋學派)을 계승(繼承) 하였다. 공(公)의 경학(經學)은 고경도설(古經圖說)과 용학발문(庸學發問)에 집약(集約)되었으며 수신(修身)의 요체(要諦)는 잠명(箴銘)에 새겨져 있다.
공은 이립전(而立前)부터 강학(講學)에 심혈(心血)을 기울이고 철종(哲宗) 신유년(辛酉年)에는 비음산(飛音山) 아래 소산재(小山齋)를 열어 성학(聖學)을 강(講)하니 젊은 유생(儒生)들이 모여 들었으며 고종(高宗) 정해년(丁亥年)부터는 춘추(春秋)로 강회(講會)를 열되 정읍례(庭揖禮)를 행하고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읽게 하여 학자(學者)의 도리(道理)를 엄정(嚴整)하게 하였다. 임진년(壬辰年)에는 마을 앞 소산(小山)으로 재실(齋室)를 이건(移建)하니 명유(名儒)들이 기문(記文)을 지어 공(公)의 학덕(學德)을 칭송(稱訟)하였다. 만년(晩年)인 광무(光武) 오년(五年)에는 창원향교(昌原鄕校) 훈장(訓長)에 추대(推戴)되었으며 소산재(小山齋) 문생(門生)들이 유계(儒契)를 결성(結成)하여 스승의 뜻을 이어 갔다.
공(公)은 시문(詩文)에 조예(造詣)가 깊어서 풍류(風流)속에 인지(仁智)를 융화(融和)시겼다. 철종(哲宗) 기미년(己未年)에 용화암(龍華庵) 계곡(溪谷)에서 유계(儒契)를 모아 요천시사(樂川詩社)라 이름 짓고 고을선비들과 매년(每年) 춘삼추구(春三秋九)에 시회(詩會)를 열었으며 시첩서(詩帖序)를 지었다. 을축년(乙丑年)에는 석유(碩儒)인 만성(晩醒) 박공(朴公) 치복(致馥)이 찾아와 요천시고(樂川詩稿)를 읽고 서(序)를 써서 추장(推獎)하였다. 광무(光武)이년(二年)과 륙년(六年) 두 차례에 걸쳐 부사(府使)가 관찰사(觀察使)에게 학행(學行)으로 천거(薦擧)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총은(寵恩)을 입었다.
공(公)은 진실로 당대(當代)의 진유(眞儒)이자 선학(先學)이며 천뢰(天籟) 터득(攄得)한 시인(詩人)이다. 돈목(敦睦)한 가풍(家風)은 자손(子孫)이 이어받고 깊은 학문(學問)은 후학(後學)이 익히며 시문(詩文)의 아정(雅情)은 문인(文人)이 창화(唱和)하니 다행(多幸)이다 하려니와 도시(都市)가 발달(發達)하면서 옛 숨결이 느껴지는 천석(泉石)이 사라지매 이를 안타까이 여긴 고을선비들이 공(公)의 장리지적(杖履之跡)을 되짚어 유허비(遺墟碑)를 세워 기리고자 한다. 모선숭현(慕先崇賢)의 중의(衆意)를 사양(辭讓)하기 어려워 비박(菲薄)을 무릅쓰고 무사(蕪辭)로 명(銘)을 지어 올린다.


지산(地山)에 재(齋)를 세워 성현(聖賢)을 우러르고
소천(小川)에 먹을 갈아 영귀(詠歸)를 기약(期約)했네
이제야 그 자취 기려 구의(摳衣)하고 따르리라


2014년 4월 24일
창원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장성진 근찬(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