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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전면 고사리 효부 창원황씨 기행비

천부인권 2018. 3. 6. 05:46



2017.1.14 진전면 거락마을의 회산황씨기행비


이 "효부유인회산황씨기행비(孝婦孺人檜山黃氏紀行碑)"는 진전면 고사리 1085번지에 위치한다. 청송 심영(靑松 沈塋)의 처였던 황씨 부인의 정열(貞烈)을 칭송하기 위해 1981년에 세운 비이다. 그 옆에는 남파거사청송심공효행비(南巴居士靑松沈公孝行碑)와 청송심씨의 재실인 죽포정(竹圃亭)이 위치해있다.








효부유인회산황씨기행비(孝婦孺人檜山黃氏紀行碑)

효부 황유인(黃孺人)은 돌아간 청송 심영(靑松 沈塋)의 처이다. 관향은 창원(옛 지명이 회산)으로 회산군 석기(檜山君 石奇)의 후(后)인 사인 우영(佑永)의 女이다. 유인(孺人)은 천성이 곧고 맑으며 여자가 지켜야 할 도덕이 일찍이 들어나서 나이 열여섯에 심씨(沈氏) 가문(家門)으로 시집와서 부도(婦道)를 굳게 지켜 옛날의 어질고 아름다운 여자의 모습이었다.
일찍 집이 가난하여 그 시부모를 봉양하는데 비록 험(險)한 음식(飮食)을 바치더라도 항상 그 뜻에 알맞게 하고 그 남편을 섬김에 공경(恭敬)히 처첩(妻妾)의 도로 받들어 그 뜻에 좇아 예에 알맞았다. 또 가정을 다스리는 절도(節度)가 부인의 내측(內則)에 합치(合致)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시어머니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약을 다려 바치는 것을 몸소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않았다.
혹 하늘과 산신에 기도(祈禱)하고 백방으로 치료하면서 극치(極致)를 쓰지 않는 바가 없었다. 상(喪)을 만나게 되자 장례하는 절차와 제를 드리는 의식(儀式)이 한결같이 예의 제도를 따라 조금도 섭섭함이 없었다. 이는 비록 사람됨이 부도(婦道)를 행하였지만 지극(至極)한 정성이 아니면 어찌 이와 같은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옛날의 우리 성왕(聖王)들이 인륜과 도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으로 하였는데 지금은 포상(褒賞)하는 은전(恩典)이 없으니 유인(孺人)을 위한 슬픔뿐만 아니라 세상의 도덕에 개탄(慨歎)할 일이다.
옛날 유인(孺人)의 시숙 사인 심린(媤叔 士人 沈璘)이 유림의 천장(薦狀)을 가지고 성균관의 「五倫行實」 중간소(重刊所)를 찾아가서 바치자 중간(重刊) 책임자인 판서(判書) 박공 기양(朴公 箕陽)이 특별히 선택하여 책에 싣게 되어 그 아름다운 이름이 길이 전하여지게 되고 또 온 나라에 교훈을 세우게 되었으니 아아! 위대하도다.
심씨는 좌의정 청성백 정안공 휘 덕부(左議政 靑城伯 定安公 諱 德符)의 후(后)로 아들 온(溫)과 손자 회(澮)가 이어서 영의정(領議政)에 오르게 되어 벼슬이 대대로 빛났고 칠대를 지나 휘 종립(諱 宗立)은 참의(參議)의 증직(贈職)을 받았는데 영(瑩)의 칠대조이다.
의음(宜飮)은 조노(祖老)이고 영도(永燾)는 아버지이고 진양정씨(晉陽鄭氏)는 그 어머니이다. 황유인(黃孺人)은 고종 무자(戊子 1888)년 7월 21일에 태어나서 계묘(癸卯 1963)년 9월 21일에 수(壽) 76세로 돌아가셔서 우거(寓居)하던 진양군 시봉면 등건촌 건릉곡 유좌(晉陽君 侍奉面 登乾村 建陵谷 酉坐)의 언덕에 공의 묘와 쌍봉(雙峰)하였다. 세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 갑섭(甲燮)은 백부(伯父) 린(璘)의 후(后)로 출가하였고 차자는 을섭(乙燮)과 병섭(丙燮)이다.
아아! 시숙 린이 포창(褒彰)하는 비를 세우는 일을 서둘지 못하고 돌아가신지 오십여년이 지난 경신(庚申 1980)년 겨울에 린씨(璘氏)의 자부(子婦) 진양정씨(晉陽鄭氏)가 항산 그 생가시모(生家媤母)의 효행을 흠모(欽慕)하고 그 시부(媤父)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간 것을 탄식하여 그 아들 재호(載昊)에게 명하여 많은 재물을 출연(出捐)케 하여 심씨의 고향인 함안군 여항면 고사리 거락(咸安郡 艅航面 姑寺里 巨落)에 비석을 세워 나타내게 하였다. 재호(載昊)가 명을 받고 감격(感激)하여 울면서 생가의 숙부(叔父)인 을섭군(乙燮君)에게 자문을 받아 나에게 명(銘)을 청하였다.
나는 일찍 그 이웃면에 살게 되어 그 행실을 상세(詳細)히 들은지 오래 되었다. 내 홀로 상상(想像)컨대 군이 이 일은 장차 가고 오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비석 앞을 지나가다가 서로 손질하여 칭송이 전하여져서 천지와 더불어 함께 민멸(泯滅)되지 않을 것인데 하필이면 비석을 세워 특별히 빛을 나타내려 하는가?
내가 그 뜻을 아름답게 여겨 그 포창문등(褒彰文等)을 살펴보고 이와 같이 서(序)하고 이어서 명(銘)에 가로데 시어머니를 섬기는 데는 살았을 때에는 즐거움으로 병이 들었을 때는 근심하고 돌아가셨을 때에는 슬픔을 다하고 제사에는 엄숙하였도다. 이것을 비록 항상 행하였으나 정성이 아니면 위 네 가지를 겸할 수 없었으리라. 뜻을 받들어 육체를 봉양하는 것이 효인데 그 뜻을 받들기 어려운 것인데 유인(孺人)이 잘 행하였으니 억지로 명예를 취한 것이 아니도다.
삼강행실록에 실려 있으니 참람한 것이 아니고 바름을 취하였구나. 효자가 끊어지지 않아 길이 그 명성을 보존하리라. 비석에다가 정열(貞烈)을 기록하니 빛나도다. 길이 밝게 전하리라.



전주 이병렬(李丙烈)이 짓고 쓰다.


단군기원 4314(1981)년 신유 3월에 삼가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