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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전면 양촌리 초계 변상용 유허비

천부인권 2018. 3. 30. 08:45



2016.10.17 진전면 양촌리 성암거사초계변공상용유허비


창원시 진전면 양촌리 287에는 성암거사초계변공상용유허비(誠菴居士草溪卞公相瑢遺墟碑)가 세워져 있고 옆에는 양촌리 노거수 쌍수가 위치해 있다. 변공 유허비는 밀양 손원모(密陽 孫源模)가 글을 지었으며 1995년 5월에 세운 것으로 국한문 혼용체이다. 비(碑)는 하대석 위에 비희(贔屓)를 만들고 비희의 등에 비신(碑身)을 세운 후 쌍용을 양각한 이수(螭首)를 얻은 화려한 비석이다. 이곳 양촌리에는 변상용(卞相瑢)이 그의 증조 변지영(卞智榮)과 조부 변진(卞鎭)의 효와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1937년에 건립한 추모재(追慕齋)가 있으며, 그 옆 양촌리 개양마을에는 그가 선조를 그리워해서 지은 거연정(居然亭)도 있다.




2016.10.17 진전면 양촌리 성암거사 초계 변상용 유허비



2018.03.20 초계 변상용 비와 노거수 쌍수가 있는 풍경


유허비명병서(遺墟碑銘並序)
유진양(惟晉陽)의 금강산맥(金崗山脈)이 위이십리(逶迤十里)하여 병풍(屛風)처럼 열립(列立)한 기하(其下) 유촌(有村)하니 명왈양전(名曰良田)이다. 노송고백(老松古栢)이 언와잡처(偃臥雜處)하고 백석(白石)과 청천(淸川)이 은연(隱然)히 상영(相暎)한다. 근고성암변공(近故誠菴卞公) 휘(諱) 상용(相瑢) 자(字) 태견(泰見)은 여기서 생장을 하여 거주(居住)하시었다. 변씨(卞氏)는 초계인(草溪人)으로 고려문하시중(高麗門下侍中) 팔계군문렬공(八溪君文烈公)이 시조(始祖)이시며 팔세(八世)를 거쳐 휘(諱)윤(贇)은 문하평리(門下評理)로 려말(麗末)에 두문동(杜門洞)에서 고절(高絶)하셨으니 현조(顯祖)이시다. 또 청주(淸州)에서 장흥(長興)을 거쳐 입랑면(入良面)하신 진사공(進士公) 휘(諱) 국수(國秀)는 공(公)의 이십대조(二十代祖)이시다. 고휘(考諱)는 기연(箕淵) 비(妣)는 칠원윤씨(漆原尹氏) 치용(致甬)의 녀(女)로서 기묘년(己卯年:1897) 사월(四月) 육일(六日)에 독자(獨子)로 태어나시다. 공(公)은 조자간고(早自幹蠱)하여 학업(學業)에 전념(專念)치는 못하였으나 간서(看書)를 불태(不怠)하여 그 동정(動靜)과 언행(言行)이 선비다워 오늘에 이르러서도 군자(君子)라 칭송(稱頌)해 마지않는다. 또한 부모(父母)를 섬김에 효성(孝誠)스러워 입에 맞고 맛나는 음식(飮食)을 미리 올려 드리고 계절에 따라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한 의복(衣服)을 상비(常備)하여 늘 평안(平安)하시도록 모셨다. 친상(親喪)을 당(當)하여서는 실유(失乳)한 록아(祿兒)처럼 애통(哀痛)하여 의예(儀禮)를 유월(踰越)하여 치루었으며 부모의 기일(忌日)에는 살아 계신 것처럼 정성(精誠)을 다하셨다. 또 원조(遠祖)의 제전(祭田)과 석의(石儀)를 수위정비(隨位定備)하고 선대(先代)의 향사(享祀)를 위해 성구사(誠久祠) 건립(建立)에 진성(盡誠)하셨다.
선고(先考)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천석가처(泉石佳處)에 거연정(居然亭)을 건립(建立)하여 음락지일(飮樂之日)에 원근(遠近)의 사우(士友)를 초치(招致)하여 더불어 잔(盞)을 돌리며 시(試)를 짓고 읊어나니 그 여적(餘蹟)으로 동화록일편(同話錄一編)이 있다. 또 증대부(曾大父)를 위하여 추모재(追慕齋)를 건립(建立)하여 경모추념(敬慕追念)하셨다. 일생(一生)을 통(通)하여 근고(勤苦)한 고(故)로 드디어 가세(家勢)에 여유(餘裕)가 생기자 궁심(窮甚)한 족친(族親)과 빈극(貧極)한 지우(知友)들의 생활(生活)을 도왔다. 해병(咳病)으로 신사년(辛巳年: 1941) 정월(正月) 구일(九日)에 졸(卒)하시니 수육심삼(壽六十三)이요 묘소(墓所)는 대송(大松) 전선영하축좌원(田先瑩下丑座原)이다. 배(配)는 선산김씨(善山金氏) 경호녀(璟浩女)로 소유의덕(素有懿德)하고 능진부도(能盡婦道)하며 생팔남(生八男)하셨다. 거년추(去年秋)에 기자(其字) 만변군(萬變君)이 그 장질(長姪) 재덕(在德)과 더불어 멀리서 루지(陋地)를 내방(來訪)하여 말하기를 오늘날 세상(世上)이 격변(激變)을 거듭하여 후손(後孫)들이 사방(四方)으로 흩어져 정처(定處)가 없고 향리(鄕里)를 지키지 못하니 이를 안타까이 여겨 표석(表石)을 세우고자 비문(碑文)을 청(請)하거늘 사양(辭讓)할 수 없었다.
내가 생각한 바 땅은 걸인(傑人)을 낳은 후(後)에야 지령(地靈)의 이름이 있고 사람은 영지(靈地)를 득(得)한 후(后)에야 나는 것이니 이 땅은 황폐(荒廢)치 않을 것이다.
군의 원모지사(遠慕之思)를 장(壯)하게 여기어 이에 명왈(銘曰)
이곳 량전(良田)은 진양(晋陽)고을의 한 귀퉁이로 뒤편으로 금강(金崗)에 기대고 앞 편으로 장병(藏兵)을 마주하고 샘물은 달고 땅은 기름지도다. 공은 여기에 노닐며 전원생활(田園生活)에 젖어 명성(名聲)을 꺼려 했구려 가산(家産)을 기울여 구휼(救恤)하고 가난한 벗들이 생활토록 도우며 선대(先代)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일당(一堂)을 우뚝하게 세웠도다. 손님과 벗들이 모여들어 시를 지으며 술잔을 기우렸도다. 무릇 빼어난 자취를 돌을 다듬어 그 뒷면에 명(銘)을 새기노니 이 유허(遺墟)와 이 명(銘)은 세월과 더불어 장구(長久)하기를 바라노라.
[惟此良田晋之一方 背衲金崗顔對藏兵 泉甘土肥惟公鴻沓 寓樂田園不慕名聲 傾孺佾恤貧友炊屑 乃承先志輪奐一堂 賓友之至賦詩乞觴 凡此懿蹟伐石背銘 此墟此銘與歲俱長]


갑술(甲戌)모춘(暮春)절(節) 담양(潭陽) 전흥진(田興鎭) 근찬(謹撰)
밀양(密陽)손원모(孫源模) 근서(謹書)
서기(西紀) 1995년 5월 7일 근수(謹竪)


[출처 및 참조] 마산문화지(2004) - 마산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