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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 정곡의 효부담양전씨 비문

천부인권 2018. 9. 26. 12:12



2017.11.27. 1011지방도에서 본 효부담양전씨비


의령군 정곡면 성황리 산 75-2에 위치한 효부담양전씨지비(孝婦潭陽田氏之碑)는 함안 법수면에서 의령 정곡면으로 가는 1011 지방도에 붙어 있다. 비는 지붕돌인 가첨석과 비신 및 비단이 갖추어진 형태이고 높이는 125cm이며, 가로 35cm, 두께 14cm이다. 비기(碑記)는 1924년 시암(是庵) 이직현(李直鉉)이 짓고, 글씨는 남상도(南相道)가 썼다.




원문


孝婦潭陽田氏之碑
孺人姓田籍潭陽 文元公耕隱先生 祖生之後 勉穰女也 生有異質淑愼持躬 父母有珍味 而賜貧則藏以復進 年十八歸于宜寧南尙熙 南乃秋溪先生振後致連子 旣嫁舅己沒以不得事舅爲至恨 夫日極致誠意養姑 夫前配河氏無育 而天祭則必致潔 年二十四夫子遘疾歿 哭擗氣絶賴救而甦 旣而悔曰 吾何忍重傷老姑心 卽隱哀而不敢泄 家素寒菽艱耕而樵 任於晝綠而績 課於夜適口便身靡闕於姑 姑嬰長瘧無他嗜願生鰍膏 時寒難於求日 剖氷掘泥必以繼 聞人肉療瘧 潛割股煮進竟得差 鄕里感歎息稱之孝 備酒饌以勞賞之固 刦曰使老姑而缺甘旨 吟貞疾咎在吾不致養罪之難 贖況敢溢以受此從不聽 及姑歿附身克無憾泣血踰 制於是鄕人士以其狀 呈營邑適國家危亂 未得上聞 惜哉 孺人生以丙申 卒以乙卯 享年八十 秖育女以族子 相周爲嗣 尙熙再從斗熙洛熙 懼至行之湮歿 將載其蹟於石 而抱狀淸銘者相海相重也 銘曰潭陽田氏 孺人賢貞淑質孝烈全 剖氷求供必虔刲股 進瘧立痊 刻子石昭來千 終不墜秉彛天
閼逢困敦之無射上澣 江陽 李直鉉 識
                           再從侄 南相道 謹書





효부담양전씨지비
유인(孺人)의 성은 전(田)씨요 관향(貫鄕)은 담양(潭陽)이며 문원공(文元公) 경은선생(耕隱先生) 조생(祖生)의 후손이요. 면양(勉穰)의 딸이다. 태어날 때부터 남다른 기질이 있어서 맑고 삼감을 몸가짐으로 하였다. 진미(珍味)가 있으면 부모에게 주어서 먹였고 간수했다가 다시 나누어주었다. 나이 열여덟에 의령 남상희(南尙熙)에게 시집갔는데 남상희는 곧 추계선생(秋溪先生) 진(振)의 후손이요 치련(致連)의 아들이다. 시집가니 시아버지는 이미 죽어 시아버지의 섬김을 얻지 못한 것이 지극한 한이 되었다. 날마다 지극한 정성으로 시어머니를 섬겼고 남편의 전처인 하씨는 자녀를 두지 못하고서 일찍 죽었는데 제사는 반드시 깨끗하게 치렀다. 나이 스물넷에 남편이 병을 만나 죽으니 통곡하고 가슴 치며 기절하여 구원에 힘입어서 갱생하였다. 그러고서 후회하며 가로되 내가 어찌 차마 늙은 시어머니를 거듭 상심케하겠나 하고 곧 슬픔을 숨기고서 감히 문물을 흘리지 아니하였다. 집이 본래 가난하여 끼니를 이어가기 어려워서 김매고 나무하고 하여 낮에는 길쌈에 맡겨 베짜고 밤에는 입에 맞는 음식과 몸을 편히 하는데 일로 삼아서 시어머니에게 빠뜨림 없이 하였다. 시어머니가 오래도록 학질(瘧疾)에 걸렸는데 다른 음식은 즐김이 없고 생미꾸라지 즙을 원하였다. 때는 추워서 구하기 어려웠지만 얼음을 깨어 진흙을 파서 이어드렸고 사람의 살점이 학질을 낫게 한다는 말을 듣고 가만히 허벅지를 베어서 달여 드리니 마침내 차도를 얻었다. 고을과 마을에서 모두 탄식하며 지극한 효도라 일컬고 술과 안주를 갖추어서 노고를 상주려 하니 굳이 물리치며 가로되 늙은 시어머니로 하여금 단맛도 빠뜨리고 병에도 걸리게 한 허물이 나에게 있고 잘 봉양하지 못한 죄 속죄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감히 외람되게 이를 받겠나 하고 마침내 듣지 아니하였다. 시어머니가 죽음에 이르러서 부신(附身:시체에 입히는 옷과 널 등)을 능히 유감없게 하고 피눈물로 울며 삼년상을 넘겼다. 이때고을의 인사(人士)가 그의 행장(行狀)으로써 고을에 드러내려 하였으나 마침 국가가 위태롭고 어지러워 임금에게 들림을 얻지 못했다. 아깝도다! 유인이여 병신(丙申)년에 태어나서 을묘(乙卯)년에 죽으니 향년이 여든이라 다만 딸만 길렀으니 친족 아들 상주(相周)로써 후사(後嗣)로 삼았다. 상희(尙熙) 재종 두희(斗熙) 락희(洛熙)가 지극한 행함이 빠질까 두려워서 장차 그 행적을 돌에 실을 재, 행장(行狀)을 안고서 명(銘)을 청한 자는 상해(相海), 상중(相重)이었다. 새겨 가로되 담양전씨의 유인은 어질고 곧고 맑은 자질이라 효도와 열녀를 온전히 하였네. 얼음을 깨어서 미꾸라지 구하여 이바지하기를 반드시 경건히 하였고 허벅지를 베어드리니 학질이 낳았다. 돌에 새김이 천추토록 밝아 오리니 마침내 삼강오륜이 떨어지지 아니할 진저.


갑자(甲子:1924)년 9월 상한에 강양 이직현(李直鉉)¹⁾ 짓고
재종질 남상도(南相道)가 쓰다.





¹⁾【이직현(李直鉉;1850~1928년)】
합천인(陜川人), 자(字) 필서(弼瑞), 호(號) 시암(是庵), 거(居) 합천(陜川) 무능(武陵)

개(開)의 후손, 규문(奎文)의 자(子)로 기정진(奇正鎭), 송병선(宋秉璿)의 문인으로 기호학(畿湖學)을 전수하여 경사(經史)와 성이학(性理學)에 밝았다. 경술국치후 왜정이 주는 은사금(恩賜金)을 거절하였고 독립운동(獨立運動)에 70고령으로 배후 조정하여 초계(草溪)시장 만세 의거(義擧)로 갖은 고초를 당하였다. 박문환(朴文煥), 조성주(趙性宙), 송희용(宋禧用), 정재두(鄭載斗), 조시용(曺始永) 등과 시문(詩文)으로 망국의 한(恨)을 창수(唱酬)하였으며 문장(文章)과 절의(節義)로 명세(名世)하였다. 문집 21권11책이 전하며 글은 구태서(具泰書)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출처 및 참조
의령충효열록(상)-의령문화원(200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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