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진전면 곡안리의 성주 이기석 의적비

천부인권 2018. 9. 30. 06:19



2016.10.17.진전면 곡안리 비림 입구에 위치한 이기석의적비


창원시 진전면에서 풍수 비보림이 잘 보존되어 온 곳이 곡안리(谷安里) 숲이다. 이 숲은 인근 향인(鄕人)들의 해치 장소로 또는 학생들의 소풍 장소로 알려진 곳이다. 이 비보숲 입구에 여러 기의 비들이 있고 그 중 비의 풍모가 잘 갖추어진 것이 성주이공기석순형의적비(星州李公基碩殉兄義蹟碑)이다.
6·25전란의 비애를 고스란히 간직한 이비는 전쟁의 비참함과 인륜과 의리의 표상을 알리기 위해 향인들의 뜻과 성주이씨 집안의 뜻을 모아 1952년 6월에 세운 의적비(義蹟碑:의리의 표상을 적은 비)이다. 전쟁 당시 이곳 곡안리는 밤에는 인민군이 점령을 하고 낮에는 유엔군이 점령을 하던 곳이라 수시로 전투가 벌어지던 곳이다. 이에 집안사람들과 일부 마을 사람들이 진전면 봉곡리 577번지에 위치한 성주이씨 재실인 해사정(海槎亭)으로 피신했다. 그의 형은 집안의 중요한 책을 가져 오다가 포탄에 돌아가시자 형을 구하기 위해 달려갔으나 이기석(李基碩)도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이비가 위치한 곳의 주소는 진전면 곡안리 61-1번지이다.





星州李公基碩殉兄義蹟碑
李君基碩殉兄之 又明年夏鄕人士將立石以褒 其義屬余爲銘余添在鄕友不可以老昏辭銘曰
君有賢兄其名基守 君爲賢弟老愈篤友 嗟歲庚寅國有大亂 彈雨爆雷天旋地轉 人名逃生惴惴慄慄 雖有兄弟亦皆相失 惟君衆族咸集亭堂 兄抱先籍追後倉黃 纔未及半中彈惻地 君時望見愕然膽墜 卽欲赴難子婦泣諫 厲聲叱退奮身冒彈 忽被飛彈殉于兄側 卓哉基碩萬夫之特 義則以立倫焉以明 倫明義立百世猶生 鄕有公評褒君樹碑 凡爲人弟視此銘辭
歲壬辰扐月上浣全州李康瑄撰




해문

성주이공기석순형의적비
이기석(李基碩)이 형을 구해내려다 죽은 그 다음해에 고을의 인사(人士)들이 장차 비를 세워 그 절의(節義)를 칭송하고자 하였는데 나에게 그 명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다. 보잘 것 없는 내가 고향친구 축에 드는지라 나이 많고 정신이 흐릿하다하여 사양할 수가 없었다. 명(銘)은 이러하다
아아 경인년(庚寅年)에 나라에 큰 난리가 있어 빗발 같은 총알에다 우레 같은 포탄으로 하늘이 빙빙도는 듯 지축이 흔들리는 듯 목숨을 보전하러 사람들 피난할 때 가슴은 두근두근 다리는 벌벌, 비록 형제 있다 하나 피날 길에 서로 흩어졌다네. 오직 그대 집안사람들만 선조의 재실에 모두 모여 들었다. 네 조상의 문적(文籍) 끌어안은 그대 형을 뒤쫓아서 황급히 달려오고 있었지. 반쯤도 못 왔을제 포탄에 맞아 땅에 쓰러졌다네. 바라보던 그대 그때에 놀라 간담이 다 떨어졌지. 곧바로 구하려고 달려가려 하자 며느리 울면서 만류했네. 엄한 목소리로 꾸짖어 물리치고 포탄을 무릎 쓰고 몸을 떨쳐나섰네. 눈 깜짝 새 날라 온 포탄을 뒤집어쓰고서 형 곁에서 따라 죽었네,
훌륭하도다. 기석(基碩)이여 많은 장부(丈夫) 가운데서 우뚝하도다. 그대로 인하여 의리가 서게 되었고 인륜(人倫)이 밝아지게 되었도다. 의리 세우고 인륜 세웠으니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나 다름없도다. 고을에 공정한 평이 있어 그대 기리고자 비를 세운다네. 무릇 남의 아우된 사람들이어 지나며 이글을 새겨 볼 지어다.
임진(壬辰, 1952)년 윤5월 상순에 전주 이강선(全州 李康瑄) 짓다.




2015.9.7. 진전면 봉곡리 이기석 순의(殉義) 표석


성주 이기석 순의지지(全州李基碩殉殉義之地)라 새긴 비갈이 위치한 곳이 형과 함께 죽은 곳이라 그 표석을 세워 두었다. 이곳은 성주이씨 재실인 해사정(海槎亭)으로 가는 길목인데 직선거리로 약 100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출처 및 참고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2004.1)-삼덕정판인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