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창원 회원동 회원서원 檜原書院

천부인권 2018. 10. 25. 09:36



2018.10.22 창원 회원동 회원서원


창원시 회원구 회원북23길 22에 위치한 회원서원(檜原書院)은 한강 정구(寒岡 鄭逑:1543~1620)를 추모하는 그의 문하생인 장문재(張文哉)가 관해정(觀海亭)을 세운 것에서 출발한다. 한강 정선생이 세상을 떠난 1634년(인조 12)에 서원을 세웠으며, 1708년(숙종 34)에 미수 허목(眉叟 許穆)의 위패를 함께 모시고 해마다 음력 9월 정중일(丁丑日)에 향사(享祀)를 봉행한다. 한강 정선생은 영남학과 기호학을 두루 배웠으며 그의 문하생 미수 허선생과 함께 영남의 거유(巨儒)로 받들고 있다. 1869년(고종 6)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복원하지 못하였다가 2001년 지금의 자리에 새롭게 건설했다. 아래에는 복원기와 옛 상량문 및 중수기를 옮겨 둔다.




2015.10.28. 회원서원



2018.10.22 현재 회원서원에 걸려 있는 복원기 편액


檜原書院復元記

馬海之北 舞峀之陽峭峭聳絶之一亭 此寒岡鄭先生往在朝鮮朝 宣祖二十年丁亥 年間 涖致咸安 時來往而見此地之 淸絶稱譽之 不已其時從徒中有 張之載起屋于此地以拱先生之閒養而亦副衆徒之受敎處也 其後先生之去世後觀海之亭 與名尙餘矣 而仁祖十二年 甲戌儒林 建議於朝家 而得檜原書院之 允許奉安 寒岡眉叟兩先生 師弟之亭至于 高宗午年戊辰 以時令撤毁而猶餘 海亭之初樣以至 高宗二十三年丙戌九月儒林之 總會成立而以寒岡先生主位眉叟先生從享之定位而 以九月上丁 菜享然而 以經理之 不優當時主管之甘文玉 文七坤玉鍾守等自力負擔之 多年至于 近年適以地方開發爲名而 有資者盡買 谷內山與地 觀海亭旣存亭 與基亦入 文化財則 斷不容許云 雖欲復院基地 亦不得不可求之近處乃 己則基金亦不足 慶南鄕校財團基金二億圓 當時盧秉德理事長 增資乃可算是 故求基之略一里下 檜原洞百五十一坪 起工於 庚辰二月 日而以辛巳五月 日 完工僉議 以爲此事之不可無記 以余之齒少前囑之 難過而 謹記所事如右云耳
聖紀2552年(2001) 辛巳八月 日 後學 裵文準 謹記


회원서원복원기

마해(馬海)의 북쪽 무학산 남쪽에 우뚝 빼어난 정자가 있는데 이곳은 한강(寒岡) 정선생이 지난 조선조 선조 20년 정해(1587) 연간에 함안에 부임하여 당시에 왕래하다가 이곳의 빼어난 경치를 보고 칭찬을 마지않았다. 그 때 따르던 제자 중에 장지재(張之載)가 이곳에 집을 지어 선생께서 휴양하는 곳으로 삼고 또한 학생들을 가르치는 곳으로 하였다. 그 후 선생이 돌아가신 후 관해정(觀海亭)이라는 이름과 함께 아직도 남아있다.
인조 12년 갑술(1634) 유림에서 조정에 건의하여 회원서원의 허락을 얻어 한강(寒岡)과 미수(眉叟) 두 분 선생을 봉안하고 스승과 제자의 정자로 하였다. 고종 5년 무진(1868)에 당시 서원 철훼령이 내려져 오직 관해정의 처음 모습으로 남아 있다가 고종 23년 병술(1886) 9월에 유림총회가 이루어져 한강선생을 주위(主位)로 모시고 미수선생을 종향으로 자리를 정하고 9월 상정에 제향을 올렸다. 그러나 자금이 넉넉하지 못하여 당시 맡아 관리하던 감문옥(甘文玉), 문칠곤(文七坤), 옥종수(玉鍾守) 등이 자력으로 부담한 것이 여러 해이다.
근년에 이르러 마침 지방 개발이라는 명분으로 자금이 있어 골안 산과 땅을 모두 매입하였고 관해정은 이미 정자가 있어 그 땅이 함께 또한 문화재로 들어가 단연히 허용하지 않는다 한다. 비록 옛 터를 복원하고자 하나 또한 가까운 곳을 구입하지 않을 수 없고 기금 또한 부족하여 경남향교재단 기금 2억원을 당시 노병덕(盧秉德) 이사장이 증자한 것으로 대응할 수가 있어 이에 옛 터에서 약 1리 아래 회원동의 151평을 구입하여 경진년(2000) 2월 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신사년(2001) 5월 일에 완공하였다. 여러 사람의 의논이 이 일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하고 내가 나이가 젊다고 부탁하기에 거절하기 어려워 삼가 기록하고 사실을 위와 같이 기록할 뿐이다.
공기(孔紀) 2552년 신사(2001) 8월 일에 후학 배문준(裵文準)은 삼가 기록하다.




회원서원 강당에 걸려 있는 편액



회원서원 강당에 걸려 있는 주련


我欲爲亭近海灣 나는 가까운 바다 만에 정자를 지으려 하는데
坐中誰作蔡西山 좌중의 누가 채서산(蔡西山)¹⁾이 되려는가?
梔橘梅筠須早植 치자 유자 매화 대나무는 반드시 일찍 심어두고
莫敎風雨六年間 세월 험한 6년간은 가르치지 못할 것이네.


【주석】 채서산(蔡西山)¹⁾ - 주자의 제자이며, 송나라 때의 학자로 이름은 채원정(蔡元貞)이다. 학식이 넓고 단아한 사람으로 책을 읽을 때 항상 냉이를 먹음으로써 굶주림을 극복하였다고 한다.




회원서원 사당인 경덕사


檜原書院上樑文

伏以 設爲庠序學校 聖朝貴崇儒之治 敎以禮樂詩書士林重講業之所 是以玆堂之復建 擧喜舊院之維新 永惟兩先生配侑之祠 卽是百世師尊奉之地 卜杖履盤旋之處爲是知者水仁者山 擧俎豆享祀之儀寔在後而戊先以甲 岡眉之緖源相接以援以傳 山斗之景仰斯存無遠無近 旣以有多士 依歸之樂由是爲講堂肄習之方 秀岳淸湖察平直於向背 晴窓煥尾適歲月之如流 遂焉棟宇之漸壤 衿紳聚會難謀宴息之歡 鉛槧謾抛苦無講習之地 辛未之舊事追想宜乙役之物遲 甲乙之厄運纔經奈財力之難辨 幸而諸章甫建議 繼以一鄕人助成鳩功效勞亶出慕賢之誠意 翬飛定制亦由講道之苦心 比古則積損規模 革舊而可觀輪奐 緗編滿架罔非牖羣蒙之微言 靑衿雜筵復覩習重兌之盛擧 流觴曲水想蘭亭之風情春服希音挹舞壇之氣像 恭將短頌助擧脩樑 兒郞偉抛樑東 扶桑瑞旭人簾紅 待朝濟濟衿紳集 盡是先賢敎誨中 兒郞偉抛樑西 大海連天一望迷 東注百川無別派 尋津覺茂可提携 兒郞偉抛樑南 草木皆曾雨露涵 鄕塾至今遺澤在 家家不輟六經談 兒郞偉抛樑北 馬山浦上斯豊屋 淸幽界裡極繁美 商旅朝晡行不息 兒郞偉抛樑上 海色澄淸天氣朗 芬苾薦以絃誦騰 三盃一席相推讓 兒郞偉抛樑下 曲水循階流不捨 遺音遠挹兩先生 勗爾當今爲學者 伏願上樑之後 祠屋平安 林巒扶護 薦春秋之精享每歲中丁 勉夙夜之勤工 吾黨小子
歲 戊寅 承旨 李錫夏 撰


회원서원상량문

상서(庠序)와 학교를 세우는 것은 성스런 조정에서 유학 숭상을 통한 다스림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예악(禮樂)과 시서(詩書)로 교육하는 것은 사림이 강학하고 학업 하는 장소를 중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 당(堂)이 다시 세워지고 기쁜 마음으로 옛 서원을 새롭게 하는 일을 하여 두 분 선생을 배향하는 사당을 길이 생각하니 이는 곧 영원히 스승을 존중하는 자리이다. 그 행적이 닿았던 곳을 찾아 자리를 정했으니 이는 지혜로운 자가 물을 알고 어진 자가 산을 아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제사를 지내고 흠향을 올리니 이는 질서와 예를 아는 것이다. 한강(寒岡)과 미수(眉叟)의 맥통이 서로 이어져 전하니 태산북두와 같이 우러러 경모함이 이에 있으니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다. 이미 많은 선비들이 귀의하는 즐거움을 누렸고 이로부터 강당이 실습하는 방책이 생겨났다. 높은 산과 맑은 호수는 앞 뒤에서 평평하고 곧은 것을 살피게 하고 맑은 창문과 환한 집은 동쪽과 서쪽에 기거하기에 적합하게 되었다. 사계절 학문하고 구양함이 그침이 없으니 찬란히 기술할만 하고 온 골짜기 고운 경치가 오직 이 언덕에서 더욱 아름답다. 유연히 세월이 물처럼 흘러 서원의 기둥이 점차 기울어져 선비들이 모임을 하고 즐거운 향연을 베풀기 어렵게 되었고 글 쓰는 일들이 게을리 던져짐과 강습하는 자리가 없음을 괴로워하게 되었다.
신미(辛未)년의 옛 일을 생각하면 마땅히 공사가 늦어져서 안 될 것이지만 연이어지는 액운에 겨우 지내니 재물과 힘을 모으기 어렵게 되었다. 다행히 여러 선비들이 의론을 일으키고 고을 사람들이 모두 돕기로 하여 재물을 모으는 공과 노력을 기울여 순탄하게 현인을 연모하는 정성과 뜻이 발현되니 화려하고 우뚝하게 정비된 모습은 또한 도를 강학하는 고심(苦心)에서 비록된 것이다. 옛날에 비하면 규모가 약간 작지만 옛것을 혁신하니 그 훤출한 모습은 가히 볼만하다. 시렁에 가득한 책들은 뭇 어리석은 사람들의 미미한 말들을 깨우치지 않음이 없고 자리에 섞여 앉은 학생들은 다시 중태(重兌)의 성대한 일을 보게 하고 굽이 흐르는 물에 잔 띄우는 일은 난정(蘭亭)의 풍정(風情)을 생각하게 한다. 봄옷을 입고 도란거리는 말은 무단(舞壇)의 기상을 엿보게 한다. 공손히 짧은 노래를 하여 들보 올리는 일을 도우고자 하노라.
어랑차 들보를 동으로 던져라. 동쪽의 상스런 해 주렴 안에 붉으면 아침을 기다려서 재계하고 학생들 모아 선현의 가르침을 다하게 하리.
어랑차 들보를 서쪽으로 던져라. 하늘과 맞닿은 큰 바다 온통 아득하고 동으로 흐르는 온갖 개울 따로 갈라짐 없으니 나루 물어 뗏목타고 갈 수 있겠네.
 어랑차 들보를 남으로 던져라. 초목은 모두 비·이슬에 적셔지듯 이제 고을 학교의 은택을 입어 집집마다 육경 이야기 그치지 않네.
어랑차 들보를 북으로 던져라. 마산포 위의 이 풍성한 집은 맑고도 그윽한 풍경에 지극히 변화하고도 아름다원 유람객 발길 아침저녁 그치지 않네.
어랑차 들보를 위로 던져라. 바다색 맑고 하늘빛 밝으니 고운 향불 오르는 곳 강학소리 높아 세 잔에 한자리로 서로 양보하네.
어랑차 들보를 아래로 던져라. 굽이진 물 층계 따라 그침 없이 흐르듯 남겨진 뜻 멀리 두 분 선생의 말씀이니 지금에 배우는 자에 도움이 되리라.
엎드려 바라건대 이 들보 올린 후에 묘당은 편안하고 숲과 산이 보호하여 봄가을 향사를 매해마다 정일(丁日)에 맞추어지고 우리 고을 젊은이들 밤낮으로 열심히 공부하게 하소서.
무인년 승지 이석하(李錫夏) 삼가 씀.





경덕사의 주련에는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이 걸려 있다.
人心惟危 인심은 위태하고
道心惟微 도심은 희미하니
惟精惟一 오직 정(精)하고 일(一)하여야
允執厥中 진실로 그 중(中)을 잡으리라




경덕사 내부에 걸려 있는 한강 정구 선생 영정



檜原書院重修記

上之七年丁卯夏 金君履七 訪余而言曰 本院重修之役 己完矣請執事之記之也 余雖不文 其敢辭 窃惟玆院 寒岡鄭先生杖屨之地 而妥靈之所也 歲久朽傷 屢圖修葺 而時詘 擧齎齎志未遂 前府使成公 慨然于斯 經紀工役 而旋以仕滿而歸 今候洪公 踵成前志 榱桷之朽嶊者 易以新之 丹碧之漫患者 塗以采之 廟宇講堂門庫 俱皆完繕 董其役者 金君曁安君必馹也 於是 溪山洞府 宛增精采 梅筠桅橘 更帶馨香 多士駿奔 絃誦之聲 揖讓地風 洋溢遠邇 先生之遺風餘韻 將氷久不墜 而吾洲之儒運 漸益隆昌 則莫非成洪二候二賜也 顧余衰老己極 縱未能周旋於 董役之列 而昌謂心不後於人人也 異日 當扶病登于斯院 與諸君 流觴於曲水之際 仰想先生之遺風 幷頌二候之功矣 遂略書所感于中者如右
金世黙 撰


회원서원중수기

지금 임금께서 보위에 오른 지 7년 되는 정묘(丁卯;1807)년 여름에 김이칠(金履七)군이 나를 방문하여 말하였다. “본 서원을 중수하는 일이 이미 완료되었으니 그 일을 집행한 기록을 청합니다.” 내가 비록 문장이 부족하지만 감히 사양할 수 없었다.
생각건대 이 서원은 한강(寒岡) 정선생께서 다니던 곳으로 그 영령을 편안히 모신 곳이다. 세월이 오래되어 썩고 상하여 여러 번 수선을 하였으나 시절이 궁벽하여 일을 이루지 못하여 수리하려는 생각만 남고 이루지 못하였다. 이전의 부사인 성공(成公)이 이 일을 개탄하여 공사를 진행하니 주변의 벼슬아치들이 많이 그 일을 도왔다.
지금 부사 홍공(洪公)이 앞 부사의 뜻을 좇아 이루어 서까래의 썩고 부러진 것은 새로 바꾸고 단청이 벗겨지고 낡은 것은 채색하여 칠하고 묘우(廟宇)와 강당과 문고(門庫)는 모두 완전히 수선 하였다. 그 일을 감독한 사람은 김기(金曁)와 안필일(安必馹)군이다.
이에 산천과 고을이 완연히 정연하고 아름답게 되었고 매화와 대나무, 귤 등이 다시 고운 향기를 띠고 많은 선비들이 모여들어 시를 읊고 읍하고 양보하는 풍속이 먼 곳이나 가까운 곳에 가득 넘쳐 선생의 남기신 풍정(風情)과 여운(餘韻)이 영원히 떨어지지 않게 되었으니 우리 고을 유학의 운명이 점점 더욱 융성이 나아가게 되었으니 성(成), 홍(洪) 두 부사의 사은이 아님이 없다. 나의 노쇠함이 이미 극심함을 생각하면 비록 이 일을 감독하는 반열로 주선될 수 없지만 스스로 마음만은 다른 사람들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다른 날 병을 추스르고 이 서원에 올라 흐르는 물에 잔을 띄우고 선생의 남긴 풍정을 우러러 생각하며 아울러 두 부사의 공을 칭송하였다. 드디어 그 중에 느낀 바를 간략히 이렇게 적어 본다.
김세묵(金世黙) 삼가 씀.




한강 선생 위패


출처 및 참조
창원향교지 하(2004.11)-창원향교
창원군지-국제신보출판사(1962) 김종하




미수 허목 선생 영정



미수 허목선생 위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