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11. 거창 심소정과 소심루가 있는 풍경
거창군 남하면 양항길 253-158은 1983년 7월 20일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8호로 지정이 된 거창 심소정(居昌 心蘇亭)이 있는 곳이다. 이 곳은 세종 때 북벌의 공로자이고 성종 때 단성현감을 지낸 윤자선(尹孜善)¹⁾이 합천에서 단성을 오가며 평소에 봐두었던 이곳 심연(心淵)으로 이사하여 노닐던 곳이다. 살목마을 서쪽에 자리한 심소정 앞에는 소심루(小心樓)가 있으며 심소정 옆 뜰에는 강세백(姜世白)이 찬하고 아들인 생원 장흠(長欽)이 글을 쓴 『고현감화곡윤공지단(故縣監華谷尹公之壇)』 비가 있다.
심소정은 윤자선의 후손 윤동야(尹東野)의 주선으로 동쪽에 있던 폐암자를 뜯어서 옮겨 지은 정자이다. 이때 한 마을에 살던 외후손 이씨, 박씨들이 협조하여 개수 했다. 이곳에서 1919년 파리장서 문제를 유림들이 의논한 곳이며 신간회 회장 윤병수가 거창초등학교의 전신인 창남의숙(昌南義塾)을 세워 4년제 교육을 한 곳이기도 하다.
정자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5량 구조이고, 오른쪽에 방이 2칸, 왼쪽에 마루가 2칸이다. 마루에는 계자난간을 둘렀고 목조팔작지붕의 와가이다. 건물의 좌향은 정남향에서 동쪽으로 40〬 각도를 바라보고 앉았다. 정자 안에는 우록자(友鹿子) 강흔(姜俒)이 쓴 심소정기(心穌亭記)가 있고, 현와(弦窩) 윤동야(尹東野)의 심소정운(心穌亭韻), 유간(酉澗) 박희전(朴凞典)의 심소정중수운(心穌亭重修韻), 아호(鵝湖) 이동승(李東昇)의 심소정중수운(心穌亭重修韻), 교우(膠宇) 윤주하(尹胄夏)의 근차심소정원운(謹次心穌亭原韻)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현판은 초서체의 유려한 모습이고 심소정이란 ‘마음을 쉬는 정자’란 뜻이다.
정자는 높은 구릉 위에 위치하며 옆쪽에는 황강이 흐르고 앞쪽에서 대곡천과 합류를 한다. 황강 너머에는 넓은 들판이 펼쳐져 풍광이 아름답고 정자 뒤쪽은 절벽을 이루고 그 아래에 늪지가 펼쳐진다.
【주석】
윤자선(尹孜善)¹⁾ : 파평인으로 자는 희무(希舞), 호는 화곡(華谷)이며 성균관 생원, 단성현감을 역임하고 합천 묘산 화양동에서 영호(瀯湖) 심연(心淵)으로 이사하여 이거한 거창 입향조(入鄕祖)이다.
2018.12.11. 거창 심소정과 소심루 전경
2018.12.11. 거창 소심루에서 본 심소정
심소정 입구인 소심루(小心樓) 앞에는 안내판이 서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거창 심소정(居昌 心蘇亭)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8호
거창군 남하면 양항길 253-158
심소정(心蘇亭)은 조선 성종 때 단성현감(丹城縣監)을 지낸 화곡(華谷) 윤자선(尹孜善)이 1489(성종 20)년에 건립한 정자이다. 선생은 이 정자와 함께 심연재(心淵齋)를 지어 산수를 즐겼으며 후진(後進)을 가르쳤다. 대청과 방을 갖춘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형태의 5량 구조이다. 1771(영조 47)년에 중수하였고 1817(순조 17)년에 다시 손질하였다. 서편 뜰에는 1820(순조 20)년에 세운 단성현감윤공유허비(丹城縣監尹公遺墟碑)가 있다. 또한 이곳은 1919년 파리장서운동(巴里長書運動) 일명 독립청원운동(獨立請願運動)을 논의한 곳이며, 시간회 회장을 지낸 윤병수(尹秉洙)선생이 지금 거창초등학교의 전신인 창남의숙(昌南義塾)을 세워 교육하던 곳이기도 하다. 심소정이란 ‘마음을 되살리는 정자’란 의미이다.』라 적었다.
2018.12.11. 심소정(心蘇亭)이라 쓴 초서체 현판
2018.12.11. 심소정(心蘇亭) 측면을 오르면서
남서 방향의 뜰에서 바라 본 심소정
심소정 뜰에서 서쪽 방향으로 본 모습
강세백(姜世白)이 찬하고 아들인 생원 장흠(長欽)이 글을 쓴 『고현감화곡윤공지단(故縣監華谷尹公之壇)』 비와 심소정
윤자선(尹孜善) 선생이 심소정을 지은 사연을 담은『고현감화곡윤공지단(故縣監華谷尹公之壇)』비문의 내용과 원문, 해문을 옮겨 둔다.
故縣監華谷尹公之壇
壇 故丹城縣監華谷尹公 杖屨之墟也 公諱孜善 字希舜 坡平人 公始居郟川之華陽洞 遂自號華谷 晩又卜築于此 愛其山水明媚 累石爲墠 蔭以大樹 往來逍遙 爲嘯詠飮射之所 其風流韻致 盖可想也 以壇下有水濚洄 故始謂之心淵 事載邑誌 若裴慕軒大維日記 所謂信淵 鄭八松必達所記 五州之勝 南有深淵者 皆是也 歷公之子司果諱耕 孫府使諱三聘 子姓始繁 而遂奠居焉 壇之東 英廟辛卯 撤傍近廢庵 爲亭 於是名曰心蘇 豹庵姜尙書世晃 其子乘旨俒 爲記若書然而制作 不稱形勝 今上丁丑 改而ㅁ之 同里李朴氏 於公爲外裔 故亦與是役 亭成咸曰 亭之作 自壇始 壇不可無識也
公之十世孫東野 請書其事于石 余惟古之人 若召棠王槐 後人尙恐其翦伐 而愛護焉 則矧乎祖先之攸芋 休列之攸被者乎 宜乎 孶孫之兢兢於是 而以寓不忘本之義也 遂爲識
通訓大夫 前行弘文館校理 知製敎兼經筵侍讀官 春秋館記注官 晋山 姜世白撰 使男生員長欽書
庚辰 正月 日
고현감화곡윤공지단(故縣監華谷尹公之壇)
단(壇)¹⁾은 옛날 단성 현감을 지낸 화곡윤공(尹孜善)의 장구(杖屨)²⁾하던 옛터이다. 공의 이름은 자선(孜善)이고 자는 희순(希舜)이며, 파평윤씨로 겹천(郟川)³⁾의 화양동에 처음 살았기에 스스로 화곡(華谷)이라 호를 삼았다. 말년에 또 여기에 복축(卜築)⁴⁾하였으니 산수의 경치가 맑고 아름다워서 였다. 여러 개의 돌이 선(墠:壇)처럼 되어 있고 큰 나무가 그늘을 지어 왕래하여 소요(逍遙)하면서 시를 읊고 술 마시며 활쏘기를 했던 곳이라 그 풍류운치(風流韻致)⁵⁾를 대강 상상할 수 있다.
단 아래에는 감도는 물이 있으므로 처음부터 심연(心淵)이라 불렀는데 사실이 읍지에 실려 있다. 모헌 배대유(慕軒 裵大維)의 일기에 ‘신연(信淵)’이라 일컬은 것과 팔송 정필달(八松 鄭必達)이 기록한바 우리 고을의 명승지로 남쪽에는 ‘심연(深淵)’이란 것이 있다 했는데 모두가 이것이로다.
공의 아들 사과(司果)인 이름이 경(耕)과 손자인 부사 이름이 삼빙(三聘)을 거쳐서 자손이 비로소 번성해져 마침내 머물러 살게 되었다. 단(壇)의 동쪽에다가 영조 신묘(辛卯:1771)에 가까운 폐암(廢庵:중이 없는 버려진 암자)를 헐어서 정자(亭子)를 마련했으니 이에 이름을 지어 가로되 ‘심소정(心蘇亭)’이라 했다. 상서(尙書)를 지낸 표암 강세황(姜世晃:1712~1791)의 아들 승지(承旨) 흔(俒)이 기문을 짓고 겸해 글을 써 제작 했는데 뛰어난 형세는 칭송하지 않았다. 지금의 성상(聖上:여기서는 純祖) 정축(丁丑:1817)에 다시 고쳐서 ㅁㅁ하니 같은 마을의 이씨(李氏)와 박씨(朴氏)들이 공에게 외손(外孫)이기에 또한 함께 역사(役事)하였다. 정자가 완성 되자 모두 가로되 ‘정자를 지은 것은 단(壇)에서 시작 되었으니 단에 기록이 없을 수 없다’하였다.
공의 10세손 동야(東野)가 돌에다 적을 사실을 요청 하였다. 내가 생각하길 ‘옛날 분들은 소당(召棠)⁶⁾과 같은 왕회화나무를 후인들은 끊거나 벨까 두려워 애호(愛護)하노니, 하물며 선조께서 사신 곳이요 휴열(休列:훌륭한 공훈)을 입은 곳이야 오죽하리오. 번창한 자손들은 여기에서 긍긍(兢兢)⁷⁾하여 근본을 잊지 않은 의리를 가짐이 마땅하도다. 드디어 기록하도다.
통훈대부 전행홍문관교리 지제교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 진산 姜世白(강세백)⁸⁾이 찬하고 아들인 생원 장흠(長欽)으로 하여금 글 쓰게 하다.
경진(庚辰:1820) 정월 모일에 세움.
【주석】
단(壇)¹⁾ : 여기서는 제단의 뜻이 아니고 강의(講義) 등 행사를 행하기 위해 주변보다 높게 만든 자리.
장구(杖屨)²⁾ : 지팡이와 짚신을 말하나 훌륭한 사람이 머무른 자취를 말함.
겹천(郟川)³ : 합천(陜川)의 오기(誤記)로 보임.
복축(卜築)⁴⁾ : 살만한 땅을 가려서 그곳에 집이나 기타 건축물을 짓는 것.
풍류운치(風流韻致)⁵⁾ : 멋스럽고 풍치가 있으며 고상하고 우아한 멋을 일컬음.
소당(召棠)⁶⁾ : 관리(官吏)로 덕화(德化)가 뚜렷함을 뜻함. 주(周)의 소백(召伯)이 남국(南國)을 순행하여 당(棠:아가위나무) 아래에다 집을 삼으니 인민이 그 덕을 흠모하여 그 나무를 베지 않게 했던 고사임.
긍긍(兢兢)⁷⁾ : 두려워하고 조심한다는 뜻으로 시경에서 유래.
姜世白(강세백)⁸⁾ : 1748년(영조 24)∼1824년(순조 24). 조선 후기 유학자. 자는 청지(淸之)이고, 호는 호린(皓隣)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출신지는 경상북도 상주(尙州)이다.
증조부는 강석번(姜碩蕃), 조부는 국포(菊圃) 강박(姜樸), 부친은 강필악(姜必岳)이다. 외조부는 이재후(李載厚)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이 깊었는데, 1792년(정조 16) 3천 명이 넘는 유생이 지원한 도산서원(陶山書院) 응제(應製)에서 영남 유생 중 김희락(金熙洛)과 함께 정조(正祖)에 의해 직접 급제되었다. 관직은 가주서(假注書)‧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지평(持平)‧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 등을 역임하였으며, 지평에 재직 중에 임금이 힘쓸 일들에 대하여 상소하기도 하였다. 사임 후 낙향하여 정종로(鄭宗魯)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시문에 능하였다.
2018.12.11. 심소정 뒤 구릉 위에서 본 심연(心淵)의 모습
거창의 이상재씨는 위 사진의 '심연(心淵)'이라 짐작하는 곳은 논이었던 것을 최근 생태습지로 만든 것이고, 본래 '심연(心淵)'의 위치는 심소정(心穌亭) 남쪽에 있었다한다. 아마도 심소정을 건설할 당시와 지금의 지형은 상상 이상의 많은 부분이 달라진 듯하다.
2018.12.11. 우록자(友鹿子) 강흔(姜俒)이 찬한 심소정기(心穌亭記)
心穌亭記
口鼻耳目擧天下之人相同也 即其不同者心耳 同井同爨 至老白首 其心則有不知者矣 今生老於千里之外 其口鼻耳目 未嘗仿佛於夢想 遴以論心之誼 託文於不佞 不佞 又率兩論心於千里之外 是烏乎可㢤然 古之人求心交於一世 而不得焉 則有尙友千古 以托契者 此 其有所感於心者也 心穌主人 讀書林泉 肥遯葆光 求遺址於先大夫釣遊杖屨之所 亭以楣曰 心穌 嗚呼 世之未穌其心者 多矣 飮者辭而壱其心 好色者惑而盡其心 富者貪而汨其心 仕宦者奔走而溺其心 今古 滔滔 其不失心者 幾希矣 主人 已能超脫 羈馬於数者之外 地以是名而待人 人以是地以名亭 於是乎 不相貪焉 則其心之惺惺澹澹 無一塵之爲累 一事之爲疵 不佞 即忖之而犁 然 有所感者矣 千里不足爲遠 口鼻耳目之未嘗仿佛 不足爲踈也 可無一言相贈 效古人千里論心之風哉 若其溪山亭榭榭勝 未及寓目 不暇悉記 大嶺以南 山水之鄕 布襪青鞋 夙有計矣 倘得叩子之居 登斯亭 把盃論文 亦有以穌我之塵心者矣
辛卯仲秋 友鹿子 姜俒 書
심소정기
입,코,귀,눈은 대개 세상 사람들이 서로 같고, 그 다른 것은 마음으로 듣는 것뿐이다. 같은 우물의 물을 마시고 같은 솥의 밥을 먹더라도, 흰머리가 되도록 늙어서도 그 마음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천리 밖에서 늙도록 살아오면서 그 이목구비가 일찍이 꿈에도 비슷하지 못한데 문득 마음을 논하라는 의논으로 내게 글을 부탁하기에 내가 또한 갑작스레 천리 밖에서 마음을 논하는 것이 이 어찌 옳겠는가? 그러나 옛날에 일생 동안 마음의 교제를 추구해도 얻지 못하면 오히려 천고를 벗하여 문서를 의탁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것이 그 마음에 느낀바가 있는 것이다.
심소의 주인이 자연에서 독서를 하며 재능을 숨기고 은거생활을 즐거워하면서 선대인이 고기를 낚으며 소요 자적하던 곳에 유지를 구하여 정자에 편액을 하였으니 심소정이다. 아, 세상에는 그 마음을 되살리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술을 마시는 사람은 취해서 그 마음을 상실하고, 여색을 좋아하는 사람은 미혹되어 그 마음을 소진하며, 부자는 욕심을 내어 그 마음을 빠트리고, 벼슬하는 사람은 바쁘게 다니며 그 마음을 허우적거리므로 예나 지금이나 도도하고서 그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 거의 드물다.
주인이 이미 초탈하여 세상운수의 바깥에 거처를 정하였으니 땅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기다렸고 사람은 이 땅으로 좋은 정자를 이루었다. 이에 서로 말과 어긋나지 않으면 그 마음이 고요하고 담박하여 한 점의 흠결도 없고 한 가지 잘못도 없을 것이니 내가 곧 그것을 헤아려서 권하는 것이다.
그러나 느낌이 있기는 천리라도 멀기에 부족하고, 이목구비가 일찍이 비슷하지 않는 것은 통하기에 부족함이 있는 것이니, 한 마디 말을 서로 주어서 고인이 천리 밖에서 마음을 논한 유풍이 없을 수 있겠는가? 만약 그 시내와 산속에 있는 정자의 경치가 볼만한 것이 못되더라도 기문 짓기를 게을리 할 겨를이 없을 것인데, 대영남은 산수의 고장이라 여장을 꾸릴 계획을 일찍이 갖고 있으니, 혹시 그대의 거처를 방문하면 이 정자에 올라 술잔을 끌어안고 문장을 논함으로써 또한 나의 티끌 묻은 마음을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
신묘중추(1771년 8월) 우록자 강흔(姜俒)¹⁾ 쓰다.
【주석】
강흔(姜俒)¹⁾ : 조선 후기 서화가이자 문신인 표암(豹庵) 강세황(姜世晃, 1712~1791)의 아들, 호는 우록자(友鹿子), 진양인이며, 승지(承旨)를 지냈다. 『삼당재유고(三當齋遺稿)』4책이 전한다.
현와(弦窩) 윤동야(尹東野)의 심소정운(心穌亭韻)
心穌亭韻(심소정운)
尹東野(윤동야)¹⁾ 弦窩(현와)
東南賓主始登臨 손님과 주인이 동남쪽 이 정자에 처음 오르면
斗覺湖山倍豁襟 호수와 산이 가슴을 열어주는 줄 알았네.
十里桑麻仍大野 십리 뽕밭 삼밭은 한들로 이어지고
一川花柳又長林 한줄기 냇가 꽃버들은 긴 숲을 이루었네.
樓如石室宜藏史 누각은 석실 같아 역사책 두기 좋겠고
境似蓬萊可化琴 장소는 봉래산 같아 거문고를 조율하네.
洞闢入窓中夜起 한 밤중에 일어나니 창문입구에서 마을이 열리고
雨餘新月印江心 비갠 뒤 새로운 달이 강 한가운데 찍혀있네
憶曾吾祖戒淵臨 어릴 땐 우리 선조 연못에 가지 말라 하셨고
留却淸風灑滿襟 깨끗한 바람 옷깃에 가득차서 뿌리쳐도 머무르네.
不有魚龍奚取水 어룡이 없다면 물을 어찌 얻을까
可栖鸞鶴始爲林 난새와 학이 깃들만 하니 비로소 숲이 되었네.
諸君且置花間酒 제군들은 또한 꽃 사이에 술을 두시게
老子將聞月下琴 늙은이도 장차 달빛 아래 거문고 소리 듣겠네.
徙倚層欄重有感 배회하다가 난간 계단에 기대니 거듭 느낌이 있어
我家安淂又清心 우리 가문 또한 깨끗한 마음을 편안하게 얻겠네.
【주석】
尹東野(윤동야)¹⁾ : 조선 후기의 학자인 윤동야(1757~1827)는 자가 성교(聖郊), 호는 현와(弦窩) 소심(小心), 아버지는 윤석로(尹碩老)이고 문장과 행실이 뛰어났다. 저서로 「수여록(睡餘錄)」과 「현와집(弦窩集)」이 있다.
유간(酉澗) 박희전(朴凞典)의 심소정중수운(心穌亭重修韻)
心穌亭重修韻(심소정중수운)
朴凞典(박희전)¹⁾ 酉澗(유간)
山菴移得水邊臨 산의 암자 옮겨다 물가에 세웠고
講學由來濟濟襟 배우고 가르치는 유래는 많은 유생 있어서라.
三姓衣冠常合席 세 성씨²⁾가 의관 차려 항상 한자리에 모이니
百年花木已成林 백년의 꽃피는 나무는 이미 숲을 이루었다.
彌甥追感遺墟碣 빈터에 남은 비갈은 외갓집 추억이 서려있고
賢祖垂傳古匣琴 어진 선조 드리운 전통은 옛 상자의 거문고라.
地勝人文相有待 땅의 뛰어남과 사람 문화는 서로를 기다려서
淵名拈取揭楣心 연못 이름으로 처마에 마음 심(心)자 높이 달았네.
辟立千秋百尺臨 오랜 세월 흘러 백 척에 이르는 우뚝한 절벽
常簾蒼翠繞虛襟 항상 푸른 주렴이 텅 빈 마음을 둘렀네.
修藏後學顔行地 후학이 수행하여 안회(顔回)³⁾를 행하던 곳이요
愛護先公手種林 선공이 애호하여 직접 가꾼 숲이라네.
止水涵明還得鏡 연못 물 맑아서 도리어 거울이 되었고
衆山孕響自然琴 뭇 산은 소리를 가져 자연 거문고가 되었다.
危欄獨坐凝睇久 난간 가에 홀로 앉아 오래도록 응시하니
萬尙周流造化心 만물이 순환하며 마음을 조화시키누나.
【주석】
朴凞典(박희전)¹⁾ : 1803년(순조 3)∼1888년(고종 25). 조선 후기 유학자로 자는 문칙(文則)이고, 호는 유간(酉澗)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경상남도 거창(居昌) 출신이다.
증조부는 월곡(月谷) 박윤복(朴胤福)이고, 조부는 행원(杏園) 박경대(朴慶大)이며, 부친은 박명직(朴命稷)이다. 형은 박희화(朴熙禾)이다. 문집으로 『유간집(酉澗集)』이 있다.
세 성씨²⁾ : 파평 윤씨와 외손인 박씨, 이씨를 말한다.
안회(顔回)³⁾ : 안자(顔子) 공자가 총애하던 제자.
아호(鵝湖) 이동승(李東昇)의 심소정중수운(心穌亭重修韻)
心穌亭重修韻(심소정중수운)
李東昇(이동승)¹⁾ 鵝湖(아호)
更上何如昔日臨 다시 올랐더니 어찌 전과 같은가
一層樓景灑神襟 일층 누각 경치가 마음을 씻어준다.
八聰明月江山夜 창으로 드는 밝은 달빛 강산의 밤이요
数畒清風竹樹林 몇 이랑 막은 바람 대나무 숲이로다.
悉欲長穌仍舊額 모두 다 오래도록 소생하기 바라며 옛 편액 사용했고
功因改觀奏新琴 모습 바꾸려는 노력으로 새 거문고를 연주 한다.
曠年經始今秋迄 오랜 세월 경영하다 이번 가을에 마치고
了得前賢未了心 옛 현인이 깨닫지 못한 마음을 깨달았다네.
重開飛閣畵中臨 중수하니 날 듯한 정자가 그림 속에 내려와
頓覺淸風爽我襟 맑은 바람에 내 마음이 문득 상쾌해진다.
雄壓湖山新棟宇 호수와 산을 웅장하게 누리니 건물이 새롭고
安排梧竹好園林 오동과 대나무를 안배하니 원림이 좋아졌다.
魚龍識字頻窺硯 고기는 글자를 알아 자주 벼루를 엿보고
禽鳥知音慣聽琴 새들은 소리를 알아 거문고 듣는 게 버릇이라
箇裡無邊光霽夜 이 속에 넓고 깨끗한 밤 가없어
更看楣號便穌心 편액 이름 다시 보니 소심정이라네.
【주석】
李東昇(이동승)¹⁾ : 이동승(1786~1863)의 본관은 완산(完山)이다. 조선 태종(太宗)의 아들 양녕 대군(讓寧大君)의 후손이다. 을사사화(乙巳士禍)를 피해 집안 전체가 거창부(居昌府) 양항리(梁項里) 양촌(陽村)으로 이주하였다. 고조할아버지는 이기상(李基祥), 증조할아버지는 이석지(李碩枝), 할아버지는 이홍(李泓), 아버지는 이양도(李陽肇)이다. 어머니는 연안 이씨(延安李氏)로, 이우항(李遇恒)의 딸이다. 이상경(李尙敬)의 딸 하빈 이씨(河濱李氏)와 혼인해 2남 1녀를 두었다. 첫째 아들은 이문규(李文奎)이고, 둘째 아들은 이응규(李應奎)이다. 딸은 박이상(朴以常)에게 시집갔다. 거창군 남하면 양항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같은 마을에 살던 현와(弦窩) 윤동야(尹東野)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나, 평생 과거 시험에 뜻을 두지 않아 벼슬에는 오르지 않았다. 또한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전국을 돌아다녔는데, 동으로는 동해(東海), 서로는 채석(采石), 남으로는 통영(統營), 북으로는 화산(華山)까지 여행하였다. 증조할머니인 허씨의 열려(烈閭)가 오래되어 퇴패(頹敗)해지자 이를 중건하였다. 1863년(철종 14)에 7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저서로는 『아호집(鵝湖集)』이 있다.
교우(膠宇) 윤주하(尹胄夏)의 근차심소정원운(謹次心穌亭原韻)
謹次心穌亭原韻(근차심소정원운)
膠宇(교우) 尹胄夏(윤주하)¹⁾ 撰(찬)
悽愴先靈若降臨 선조 영혼 강림하신 듯 슬픈 느낌 일어나니
古壇松石想眞襟 옛 소나무 단의 비석에도 채취가 느껴지네.
至今夜月長江水 오늘 밤 달뜨니 강물은 길고
不盡春風兩岸林 봄바람 양 언덕으로 끊임없이 살랑이네.
曠野晴嵐移妙墨 넓은 들, 맑은 기운 묘한 붓끝으로 옮기니
逗雲橫鴈八高琴 구름 속에 머문 비낀 기러기 거문고 소리 높구나.
憑軒眺矚常如故 마루에 기대어 바라보니 옛날과 늘 같은데
易捨難存奈此心 버리기 쉽고 가지기 어려운 이 마음 어이할꼬?
【주석】
尹胄夏(윤주하)¹⁾ : 윤주하(1846~1906) 조선 말기 유학자. 자는 충여(忠汝)이고, 호는 교우(膠宇)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출신지는 경상남도 합천군(陜川郡)이다. 부친은 윤흠도(尹欽道)이고, 생부는 윤문도(尹文道)이다. 1884년(고종 21)에는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을 방문하여 학문의 대의(大義)와 방도(方道)를 질의하고 논의하였다. 1894년(고종 31)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 등과 학문을 질정(質正: 묻거나 따져서 바로잡음)하고 논변하였다. 이승래(李承來)‧이영훈(李永薰)‧박종권(朴鍾權)‧윤계하(尹啓夏) 등과 교유하였으며, 문인으로 윤희도(尹禧道)‧최효근(崔孝根)‧윤정하(尹貞夏) 등이 있다. 1906년(광무 10) 을사조약을 체결하게 한 매국오적(賣國五賊)의 목을 벨 것을 임금에게 주청하고자 하였는데 뜻을 이루지 못하고, 향년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 『교우선생문집(膠宇先生文集)』이 있다.
출처 및 참조
거창의 누정-거창문화원(1998.12)/박기용-금창인쇄사
거창금석문대관-거창문화원(2009.12.25.)/정주환-도서출판 술이
거창군사-거창군사 편찬 위원회(거창군, 1997)
한국민족대백과사전-인물편/윤동야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한국학중앙연구원/朴凞典(박희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李東昇(이동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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